제84화. 흔들리는 별빛 (5)
“지금 엉뚱한 생각했죠?”
“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자의식 과잉 아니에요?”
신희진의 당돌한 말에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왜 이리 덥지. 벌써 여름인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말려들 것 같아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신희진을 바라봤다.
“내 얼굴에 뭐라고 쓰여 있는데?”
“얘가 나 좋아하나? 갑자기 왜 이러지?”
내 말에 환한 웃음을 보이며 신희진이 내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아닌데?”
“맞는데?”
나는 그런 신희진의 보폭에 맞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신희진 또한 내 보폭에 맞춰 다가왔다.
신희진과 거리가 사람 한 명 들어올 만큼 좁아지자 신희진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어쨌든 고마워요.”
“뭐가?”
“영상이요.”
고맙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 시선 처리하는 게 힘들었나 보다.
“회사에서 시킨 거야.”
“영상 초반에 들린 건 아니었는데?”
신희진은 내 말에 고개를 불쑥 들고 의아한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기 가득한 신희진의 눈동자를 보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죽어 있던 눈이 180도 바뀌니 적응이 안 됐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응? 무슨 소리야. 깜깜한 화면 나오고 영상 시작하지 않았어?”
“뭐야 일부러 넣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네. 흑백화면에서 떡하니 성수 목소리랑 민정이 목소리에서 회사에서 시킨 게 아니라고요? 이러면서 나레이션처럼 나왔는데.”
“그런 걸 내가 왜 일부러 넣겠어.”
급하게 영상을 만들다 보니 쓸데없는 사운드를 걷어내야 했는데 못 뺀 것 같았다.
이건 실수였다.
나오기 전에 영상 확인 한 번이라도 할걸.
“내가 널 위해 준비했다! 알아봐라! 에헴! 이런 의도인 줄 알았죠.”
“내가 그렇게 유치하지는 않다.”
기분이 좋은 듯 밝게 말하는 신희진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유치한데? 영상 제목만 봐도 유치해 보였는데?”
회심의 제목이었는데 유치하다고 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파졌다.
괜한 반발심이 생겼다.
“아닌데?”
“이것 봐. 또, 또. 여덟 살이나 어린 애한테 이겨 먹고 싶어요?”
“와… 야. 너 아까랑 완전 다르다?”
“사람은 원래 적응의 동물이라구요.”
“그래. 그게 더 보기 좋다.”
이런 모습이 신희진의 매력이 아닐까.
다행이었다.
헛된 일을 한 건 아니라서.
“그런데요, 쌤은 어떻게 알고 찾아가셨어요? 우리 부모님이야 회사랑 이야기할 때 알 수 있었다지만… 친구들도 쌤이 도와준 거죠?”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한 신희진이 불쑥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답변을 생각해 준비해놨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어? 박정석 선생님은 네가 예전에 대기실에서 흘리듯 말했잖아. 데뷔 초였나? 그때 데뷔할 때 너 믿고 응원해준 게 박정석 선생님이라고 한 거 기억나서 찾아뵀지.”
“제가요? 기억에 없는데….”
“바쁘기도 했고 흘리듯 말하는 거라 기억 못 하는 거 아냐?”
“그런가?”
내 말에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신희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워요.”
너무 가까이 둘이 붙어 있는 것 같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에 신희진이 무어라 작게 말했는데 듣지를 못했다.
“뭐라고?”
“고맙다고요. 하…. 딱 30분 전만 해도 은퇴 생각했는데.”
“무슨 데뷔하고 반년 만에 은퇴를 생각해?”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듯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하게 루머에 휘말렸을 때 많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도와주지도 못하고 그냥 보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힘들 줄 몰랐죠.”
“알고 시작한 거 아니야?”
“누가 이런 걸 알고 시작해요? 그리고 안다고 해도 이건 겪어봐야 알겠던데요. 막상 겪어보니 정말 별로구요. 밤하늘 참 이쁘다.”
신희진이 자조 섞인 말을 하다가 밤하늘을 바라봤다.
나도 신희진과 같이 밤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날씨가 좋았는지 드문드문 별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이는 별이었다.
그리고 다시 신희진을 바라봤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는 말도 있잖아.”
“그거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진짜 싫어요. 왕관 너무 무거운데요? 소름 끼치게.”
내가 말하자 신희진이 하늘을 보면서 몸을 떨며 내 말을 받아쳤다.
엄살 부리는 거 보니 이제는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은 다 그래. 강도의 차이일 뿐이지.”
신희진은 계속해서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내 말에 다시 내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렇겠죠…. 아무튼 선물 고맙게 받았어요. 생일 선물 대신이라고 생각할게요. 솔직히 말해 봐요. 제 선물 생각 안 했었죠?”
어두컴컴해서 그런지 말하는 신희진의 눈이 고양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눈을 보니 여기서 솔직하게 준비 안 했다고 말할 배짱이 사라졌다.
“무슨 소리야. 배송 중이라니까?”
“배송 중이었으면 오늘 같이 가져왔겠죠.”
쓸데없이 날카롭네, 얘는.
“그게, 배송이 꼬였나 봐.”
내가 또 어설프게 변명하자 웃음을 참으려 하는 신희진이었지만 참지 못하고 쿡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 받은 거로 칠게요. 저는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에도 또 그러면 애들한테 올해 내내 시달릴걸요?”
“아니, 그래. 졌다 졌어.”
내가 두 손을 들며 말하자 신희진이 호탕하게 웃길래 나도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서로 웃음이 잦아들자 침묵이 잦아들었다.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늦었으니까 얼른 들어가.”
“네. 내일 뵐게요.”
“그래. 들어가.”
서로 인사를 나눈 후에, 신희진이 뒤를 돌아 숙소로 향했다.
나는 나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신희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돌아가던 신희진이 갑자기 뒤를 돌아봤는데, 그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런 신희진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내 모습이 웃겼는지 신희진이 피식 웃다가 몸을 다시 돌려 숙소로 들어갔다.
다행히 잘 끝난 것 같다.
뭔가 마음이 뿌듯했다.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니 드문드문 빛나던 별들이 아까보다도 더 빛나 보였다.
* * *
“밤에 갑자기 나가서 놀랐잖아!”
“나가기 전에 말하고 나갔잖아.”
신희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버럭 화를 내는 이나라였다.
“아니 그래도 갑자기 휙 하고 말하고 나가니까 놀랐지.”
신희진이 밝은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말하자 급하게 쭈그러드는 이나라였다.
“왜 갑자기 나간 거야?”
“아, 딴 게 아니고 응원 영상을 받았는데 그거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나갔던 거야.”
서지영이 신희진 곁으로 스리슬쩍 다가와 묻는 말에 신희진이 대답했다.
“뭔데 뭔데. 같이 보자.”
“싫어.”
“아, 왜!”
유미소도 바뀐 신희진의 분위기에 쉽게 다가가 안으면서 칭얼거렸지만 신희진의 방어는 두터웠다.
“아무도 안 보여줄 거야.”
“왜!”
“왜에!”
신희진 곁으로 나머지 멤버들도 우르르 다가와 농성을 벌였다.
“내맘이지롱~”
“우리는 하나. 우리는 일심동체. 아니야?”
신희진이 혀를 내밀며 약 올리자 린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 분들이 내 것도 안 남기고 아이스크림 다 먹어?”
“언제는 먹으라며!”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투덜대는 신희진과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는 서지영의 모습이 무척 다정했다.
“으이구.”
“왜 또 머리를 쥐어박는데!”
“머리 나빠지라고 박았는데?”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던 이나라가 신희진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잘 극복한 것 같아 다행이야. 진짜.”
“내가 뭘? 난 원래 이랬는데?”
이나라의 말에 신희진은 태연하게 답했다.
한 편의 꽁트를 보는 것 같던 스타즈 멤버들은 폭소했다.
“아무튼! 여러분 미안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분위기가 안 좋았었죠? 다 극복했어요~”
멤버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신희진이 말했다.
“근데 언니. 아이스크림. 남았어.”
“응? 남겼어? 웬일이야?”
린의 무심한 말에 신희진이 눈이 동그래지며 되물었다.
“민초는 언니랑 혜연이밖에 안 먹잖아. 혜연이가 남겨줬어.”
“민초가 얼마나 맛있는데… 민초맛을 모르다니.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민초로 넘어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유미소에게 신희진은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그거 먹을 바엔 치약 먹음. 차라리 인생 절반 손해 볼래.”
“미투.”
“이하동문.”
이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유미소와 서지영이었다.
“맛잘알은 민초맛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고. 아이스크림 맛을 모르시네들.”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자 신희진은 혀를 찼다.
“진짜 마씻써?”
“진짜 맛있다니까.”
신희진의 행복한 얼굴에 혹한 유코가 신희진에게 묻자 신희진이 영업을 시도했다.
“많이들 드셔. 난 안 먹을 테니.”
“우리 내일 오전 인터뷰 아냐?”
서로 웃고 떠들다가 내일 스케줄이 생각났는지 하나둘 얼굴이 굳어져 갔다.
“맞네. 빨리 씻고 자자. 내일도 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
이나라도 시간을 보고는 애들을 조금씩 밀어내며 잔소리했다.
“왜 음방 끝났는데도 새벽에 일어나야 해?”
“그래도 한가한 거보다 바쁜 게 좋지.”
입을 삐쭉 내밀며 서지영이 투덜거렸지만 이나라의 말에 다시 아무 말도 못 했다.
“나 먼저 씻는다!”
유미소는 재빠르게 화장실을 선점하러 달려갔다.
* * *
단순히 신희진 멘탈 케어를 하려고 했던 프로젝트가 내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급물살을 탔다.
내가 연락을 돌린 신희진의 친구들이 신희진을 응원한답시고 Love Up&Down 안무 커버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응원과 함께 대박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 친구들의 마음에 대중들도 움직였다.
원래는 곡이 점차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10위권 대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커버 영상과 친구들의 서포트로 인해 반등했다.
그 결과로 지금 차트 3위 안에 스타즈의 타이틀곡이 들어가 있었다.
신희진에게 영상을 주고 불과 2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2주 안에 몇 가지 일이 있었다.
마녀가 최종화 시청률 37.4%로 종영했고 이예진의 주가가 배우 생활 커리어 중 최고치를 찍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번 가을에 개봉하는 가을동화에도 탄력을 받게 되리라 생각한다.
주연급으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꽤 비중이 있는 역할이었으니까.
그리고 슬쩍 이진철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투자 기획서를 써서 이진성 실장에게 올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가장 핫하고 바쁜 건 스타즈였다.
내가 선택한 곡과 내가 나선 행동에 나비효과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어떤 계기로 Love Up&Down이 메가 히트를 치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이번 계기로 메가 히트의 조짐이 보였다.
“이번에 스타즈의 신희진 친구들의 사연이 대중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향후 전략을 조금 바꾸려 합니다.”
기획팀이 회의실 중앙에서 향후 계획에 대해 중심을 잡는다는 말에 경청했다.
“우선, 향후 활동은 지금 잡혀 있는 스케줄을 포함해서 각자 하고 싶은 개인 활동을 최대한 지원하려고 합니다. 멤버들이 소속된 소속사들도 이미지 소모를 조금 감수하고 더 다양한 활동을 하는 걸 원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흐름에서는 이미지 소모를 두려워해 이미지를 아끼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지금은 흐름을 타는 게 맞다.
확실히 여태까지 이미지 소모를 아꼈다면 지금같이 탄력을 받았을 때 소모를 감수하고서라도 뭔가 하는 게 더 좋긴 했다.
예전과는 다른 행보지만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예전에 이 시기는 팀의 분위기가 워낙 안 좋아서 스타즈 애들의 소속사에서 어떻게 하면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궁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무렵이 지나고 린이 중국으로 건너간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이제 봄입니다. 겨울과 달리 봄과 여름에는 대학축제 등 행사가 많습니다. 또한, 지금의 스타즈는 이미지 소모가 아닌 확립을 할 수 있는 단계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이런 반등의 기회는 놓치기 아깝죠. 따라서 행사와 함께 스타즈 멤버들이 각자 하고 싶은 개인 활동을 최대한 지원하는 가닥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기획팀의 말에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애들의 스타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애들의 특출난 분야나 하고 싶은 걸 밀어준다는 이야기겠지?
잠깐… 그렇다면 연기도 시킬 수 있지 않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