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흔들리는 별빛 (4)
마지막 목적지에서 목적을 다 이루고 나서 급히 집에 돌아와 영상을 짜 맞췄다.
편집 툴을 오랜만에 다루는 거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했다.
안 쓴 지 오래됐어도 몸이 기억하나 보다.
그래도 시간은 꽤 걸려서 어느덧 저녁 열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영상 편집 작업은 끝마쳤지만, 아직 편집한 걸 영상으로 옮기는 렌더링 작업이 끝나지 않아 조금 시간이 떠버렸다.
오늘 애들 스케줄이 어떻게 됐더라.
확인해보니 다행히 지금은 끝나고 숙소에 있을 시간이다. 만든 영상을 내일 줄까 고민도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늦긴 했지만 지금 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영상 추출 작업이 끝나고 숙소로 출발하기 전에 연락을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이나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니. 왜?”
전화를 걸자 다급한 이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러지?
- 안 나왔잖아요! 아침에 팀장님이 차 끌고 오길래 무슨 일 있나 했죠. 팀장님 말로는 그냥 일 있어서 하루 쉰다고 하던데, 뭐예요?
남진수도 애들한테 자세한 건 이야기 안 한 듯싶었다.
“아… 별건 아닌데, 희진이 루머 때문에 이것저것 조사했어.
- 네? 그냥 루머라면서요. 설마… 희진이가 거짓말한다 생각하고 뒤 캔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지금 뭐 해?”
- 수상한데…. 저희는 지금 쉬고 있죠.
생각해보니 뒷조사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나라와 통화하다가 생각 난 건데 신희진이 활동하면서 박정석 선생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신희진이 꽤 기억력이 좋아서 문제다.
우기는 거로 넘어갈 수 있을까?
우기는 방법 말고는 답이 안 보였다.
“애들은 자?”
- 지금 잘 시간 아닌데요?
“희진이는?”
- 여전히 방구석에 콕 박혀서 누워 있어요. 자는 건 아닌 것 같던데.
“핸드폰 계속 본 거야?”
- 아뇨, 못 보게 했죠. 저희도 안 봤구요. 지금도 핸드폰은 제가 뺏었어요. 그래도 조금씩 괜찮아지고는 있는 것 같아요.
씩씩하게 말하는 이나라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예전과 다르게 팀 분위기도 좋고 기세가 상승세라 그런지 신희진의 상태가 좀 더 빠르게 회복하고 있는 듯했다.
이거 괜한 짓 한 건가?
“알았어. 잠깐 희진이한테 줄 거 있거든? 숙소로 갈게.”
- 지금 시간에요?
“어, 빨리 처리하는 게 낫지 싶어서.”
- 뭔지 궁금하긴 한데, 일단 알았어요.
“그래. 알았다. 조금 이따가 보자.”
- 네.
내가 줘야 할 물건이 있다고 말하자 굉장히 궁금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나라였다.
괜히 따로 불러서 몰래 주는 거보다 다 있을 때 공개적으로 주는 게 낫지 싶었다.
특별하게 숨겨야 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통화를 종료하고 나서도 아직 추출이 끝나지 않았길래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러 들어갔다.
회사의 강경 대응 발표 이후로 놀랍게도 화제가 확 식어버렸다. 확실히 이게 효과적이다.
기사의 댓글을 쭉 훑어보면 팬들 이외에 대중들의 반응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루머가 퍼졌었다는 사실을 기사로 알리는 건 이미지에 썩 좋지는 않았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어느덧 완성된 영상이 나왔다.
영상을 어제 사두었던 문어 USB에 옮긴 뒤 USB를 챙기고 집을 나와 애들 숙소로 향했다.
* * *
“금남의 구역에 들어오려면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열어.”
“저희는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어요. 돌아가세요.”
유미소가 킥킥대며 문을 안 열어줬다.
내가 스케줄로 방문한 건 아니다 보니 장난을 치고 있었다.
스케줄이었으면 냉큼 열어줬겠지.
“아이스크림 사왔는데?”
“웰컴 투 스타즈 하우스!”
분위기가 축 처져서 있는 것보다 이러는 게 훨씬 좋다.
긍정적인 분위기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으니까.
예전에 분위기 안 좋았을 때는 정말 마이너스 에너지밖에 못 느꼈었다.
문이 벌컥 열렸는데 문을 열어준 건 서지영이었다.
“와! 아이스크림!”
서지영이 내 손에 있는 아이스크림부터 거칠게 빼앗아갔다.
허탈하게 웃으며 나는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무슨 맛이에요?”
“다양하게 사 왔어. 취향 몰라서.”
박혜연도 아이스크림에 관심이 있는지 내게 다가와 물어왔다.
늦게 방문하는 게 마음에 걸려 꽤 고가의 아이스크림을 사 왔는데 예상외 사비 지출이라 눈물이 찔끔 났다.
아이스크림이 뭐 이렇게 더럽게 비싼지… 맛은 있는데 너무 비싸.
“초코초코 민트초코.”
“그거. 먹는 거. 아니야.”
다른 애들도 하나둘 나한테 오기보다는 아이스크림 쪽으로 향했다.
개중에는 눈을 빛내는 유코와 찌푸리는 린이 대조되어 보였다.
“민초 먹는 애들 보면 신기해. 저걸 어떻게 먹어? 우웩.”
몸서리치는 이나라였다.
“희진 언니랑 박혜연은 잘만 먹던데?”
“희진 언니는 가리는 게 없잖아.”
민트초코맛 아이스크림은 장난으로 사 왔는데 저걸 먹는 애들이 있었구나.
유미소와 서지영의 대화에서 민트초코를 먹는 멤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박혜연과 신희진은 잘 먹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언니. 아직 안 나왔네.”
“희진이한테는 내가 가서 이야기할게. 줄 것만 주고 난 금방 갈 거니까.”
린이 지금 여기에 없는 신희진을 언급하길래 내가 나섰다.
“그러고 보니 뭘 준다는 거예요?”
“그건 희진이한테 들어.”
내가 준다는 물건에 궁금증을 터트리는 서지영이었다.
“뭐야. 희진 언니만 특별히 챙기는 거예요? 지금?”
“생일 선물인가?”
“그걸 지금?”
“나중에 줘도 되는데?”
“아니 딱히 생일 선물은 아닌데….”
그러고 보니 생일 선물도 있었네.
생각을 못 했다.
선물도 또 따로 준비해야 하나?
왁자지껄 떠드는 애들을 뒤로하고 신희진이 있는 방으로 가, 문 앞에서 노크했다.
똑똑.
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자는 건가 싶었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
“…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희진이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메이크업 상태 그대로인 거 보니 아직 씻지도 않고 누워 있었나 보다.
“왜요?”
“대뜸 ‘왜요’가 뭐야? 딴 게 아니라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것도 안 돼요? 힘든 건 견뎌내야죠, 뭐…. 언니한테 듣기로는 저한테 줄 거 있다면서요?”
“어? 어.”
직설적으로 말하는 신희진에게 조금 당황했다. 별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
“자, 여기.”
“이건 뭐예요?”
“그냥 간단한 응원 영상? 담아온 USB야. 힘내라고 담아왔어.”
“응원 영상이요? 핫.”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꺄르륵 웃는 신희진이었다.
“생각보다 회사에서 케어가 좋네요. 간만에 웃었어요. 별 신경 안 쓰는 것 같더니.”
“그런가? 아무튼 난 전했다. 근데 일단 혼자 보고 나서 멤버들이랑 다시 볼지는 네가 결정해.”
신희진의 반응에 조금 머쓱해져서 황급히 둘러댔다.
반응을 보니 괜한 오지랖이 아닌가 싶은 후회도 몰려왔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유가 있어요?”
“암튼… 좀 들어라.”
계속 궁금하다는 듯 말하는 신희진이었지만 이런 건 혼자 보는 게 제맛 아니겠나.
“알았어요. 더 할 말 없죠?”
“응? 어. 쉬어.”
“네. 들어가세요.”
이런 상황이 웃음이 나오는지 기분이 조금 풀린 듯했다.
“참, 아이스크림 사 왔는데 먹을래? 애들은 지금 뜯어서 먹고 있는데.”
“별로 생각 없어요. 많이 먹으라 해요.”
“그래. 알았다.”
“네. 들어가세요.”
“그래. 내일 보자.”
기분과 별개로 식욕은 여전히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밝은 척하는 건가?
신희진을 뒤로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언니는요?”
나 혼자 나오자 신희진이 걱정되는지 박혜연이 물어왔다.
“입맛 없대.”
“사람이 힘들면 확 바뀌기도 하는구나.”
“언니가 먹을 거 안 먹는다고 하는 거 첨 봤어.”
내 말에 씁쓸하게 말하는 박혜연이었다.
그 뒤로 서지영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거들었다.
“혜연아, 먹고 있는 민초 좀 남겨놔.”
“먹는 싸람이 씽기한 그 맛.”
이나라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있는 박혜연에게 말하자 유코는 신기하다는 듯 박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나라는 무심하게 평소와 같은 분위기를 잡았다.
아마도 많이 겪어봐서 걱정하는 게 서로에게 더 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숙소 분위기가 무겁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니 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애들을 한번 보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난 간다.”
“네~”
간다고 하니 문 앞까지는 와서 얼굴이라도 비춰줄 줄 알았는데 아이스크림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투적으로 먹는 걸 보니 많이 고팠던 듯했다.
활동기라 식단 조절이 빡빡했으니까.
오히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눈치 보고 그랬으면 전반적인 팀 분위기가 더 안 좋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신희진만 잘 추스르면 최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애들의 숙소에서 빠져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애들이 힘들 때마다 내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에도 담배가 땡겼다.
답답함을 풀어놓을 수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풀어야지 별수 있나.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쭈욱 빨고 뱉었다.
그나마 좀 낫네.
* * *
“언니! 안 먹을 거야?”
“생각 없어!”
“알았어! 다 먹어도 뭐라 하면 안 돼!”
“응!”
밖에서 들려온 서지영의 목소리에 신희진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워 있던 신희진은 김현진이 주고 간 문어 모양의 USB를 톡톡 건드리면서 보다가 방에 있는 노트북으로 향했다.
USB를 노트북에 연결하고 안에 있는 폴더를 들어가서 파일명을 확인하고는 웃음이 나왔다.
[혼자가 아닌 우리.avi]
“와… 파일명 개구려.”
신희진이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구린 제목이었다.
신희진이 마우스로 파일을 눌러 영상을 켜자 흑백 화면이 나왔다.
-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 회사에서 하라고 시킨 거예요? 아니라고요?
“응?”
신희진이 노트북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와 그 내용에 의아해했다.
- 야야. 안 어울리게 칭얼거린다며?
- 희진이! 언제 볼 거야!
- 연락하기는 좀 그렇고 앨범은 샀다?
- 노래 좋더라. 안무도 재밌었어!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들이 나오는 모습에 신희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동자뿐만 아니라 심장도 거세게 쿵쿵 뛰었다.
영상을 보며 당황하던 신희진과는 반대로 영상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영상 속에 친구들의 응원 모습을 보니 신희진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져 갔다.
그리고 영상은 화룡점정에 이르렀다.
- 희진아, 안녕? 잘 지냈지? 쌤이야. 연예인 할래요! 하던 네가 벌써 데뷔를 했구나. 바쁘기도 할 것 같고 혹시 신경 쓸까 봐 연락을 못 했어. 데뷔 축하한다. 그리고 너를 항상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노래 항상 잘 듣고 있다. 화이팅!
“하….”
신희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영상이 끝이 난 듯 다시 흑백 화면이 보였다.
신희진이 마우스에 손을 대려고 하려는 그때 다시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희진아. 우리 귀여운 희진이. 조금 쑥스럽네. 네 아빠도 같이 찍자고 했는데, 네 아빠한테도 내 잘못이라며 혼 많이 났다. 엄마도 반성하고 있고… 항상 응원하는 거 알지?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신희진의 엄마가 수줍게 정면을 보고 말하는 모습이 나왔다.
신희진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엄마의 모습을 보자 참고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 우리 딸 언제 와? 얼굴 본 지 4개월 됐네. 4개월밖에 안 된 건가? 그래도 또 보고 싶다. 사랑해.
“나도….”
신희진의 엄마를 끝으로 영상이 끝이 났다.
이내 멍하니 있던 신희진이 침대로 가 핸드폰을 쥐고 전화를 걸었다.
* * *
대뜸 신희진에게서 전화가 와 어디냐고 묻길래 아직 숙소 앞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 앞에서 딱 기다려요.’라고 잠긴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고는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신희진이 보였다.
뛰어오느라 숨이 차는 듯 헉헉 숨을 몰아쉬고 양손을 무릎에 대며 고개를 숙이는 신희진이었다.
“갑자기 왜? 할 말 있으면 내일 하면 되지. 아니면 전화로 이야기하던가.”
“그냥… 그냥 보고 싶어서요.”
뜬금없는 신희진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뭔데 이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