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보이지 않는 손 (3)
“그래. 빨리 왔네. 벌써 포기인가?”
“아뇨. 애들도 동의했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앉자 정인수 대표도 내 앞에 마주 앉아 이야기했다.
“그래? 뭘 믿고 이렇게 빨리 설득했나?”
“제가 약을 좀 잘 팔았나 봅니다, 하하하.”
정인수 대표도 의아했는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설득에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이게 그렇게 쉬운 문제였나?
“노래를 부를 가수가 동의했다고 하니…. 그럼 타이틀곡은 Love Up&Down으로 하는 거로 하지. 나중에 녹음할 때 꼭 애들이랑 같이 와. 녹음 날짜도 빠르게 잡을 테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툭 던지는 정인수 대표의 화법에 나는 정신을 못 차렸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인 것 같다.
“근데 성공할 것 같나?”
“네, 분명히.”
“곡의 퀄리티로 보면 나도 A&R팀이 선택한 Babe Baby가 나은 거 같은데 말이야. 물론 Love Up&Down도 좋아. 종이 한 장 차이랄까?”
“천재와 바보도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습니다.”
정인수 대표의 말에 나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움츠러드는 것도 우습지 않을까.
“그래. 그런 말도 있지. 좋아, 나도 너의 감에 배팅해보지.”
“…….”
웃으며 말하는 정인수 대표의 말에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뭘 배팅해 이 사람아.
이게 무슨 갬블도 아니고.
내가 조용히 있자 정인수 대표는 턱짓하며 말했다.
“그럼 가봐.”
“네?”
“할 일 없어? 왜 여기라도 앉고 싶나?”
“아닙니다. 가보겠습니다.”
내가 어벙하게 있자 정인수 대표는 자신의 대표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나를 내쫓고 싶어 하는 정인수 대표의 의지가 느껴졌다.
대표실을 나오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벌써 하루가 다 지난 거 같은데 아직 해도 안 떨어진 시간인 게 신기했다.
정신을 차리고 이내 A&R팀으로 갔다.
A&R팀에 오니 나를 마중해준 건 민서희 팀장이었다.
“결국, 포기하신 거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뇨. 애들 설득했는데요.”
“네? 하하하.”
나를 보자마자 톡 쏘며 한마디 하는 민서희 팀장에게 으스대며 결과를 말하니 그녀가 크게 웃었다.
“CD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녹음할 때 오시나요?”
“하하하.”
이 여자도 성격이 참 나쁘네.
말하는 건 엘리트 같은데 성격이 별로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웃겨서….”
“너무 맹신하시는 거 아닙니까?”
“맹신이요? 아니죠. 김현진 매니저님은 공부를 왜 하셨습니까?”
면전에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이 사람이 처음이다.
“전 공부 안 했습니다.”
“뭐라고요?”
“그 시간에 저는 다른 걸 했죠. 저는 제 선택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모든 게 뜻대로 할 수 있다면 민서희 팀장님도 저도 여기에 있지 않았겠죠?”
내 말에 민서희 팀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그리고 난 생각했다.
저 표정, 저 얼굴이 놀람으로 가득 차는 얼굴이 보고 싶다고.
“좋아요. 결과로 봅시다.”
“네, 저는 자신합니다.”
“자신하셔야죠. 실패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애들도 상처가 클 텐데.”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민서희 팀장은 끝까지 안 지려고 했다.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도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예전에는 A&R팀이랑 접점은 코빼기도 없어서 못 봤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많은 인물과의 접점이 생기는구나.
뒤돌아서자마자 헛웃음 짓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 * *
“애들은 뭐래? A&R팀이 정해준 곡으로 하겠다지?”
“아니요. 제가 미는 곡으로 하겠다는데요.”
“미쳤다, 미쳤어.”
이진성 실장이 내 말에 머리를 감싸 쥐는 게 보였다.
좀 전에는 잘 해보라던 이진성 실장은 어디 갔을까.
이진성 실장은 말은 그렇게 해도 애들이 나를 깔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실장님, 그래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뭘 몰라? A&R팀이 바보야? 그런 거 분석도 안 하게?”
그렇게도 잘난 분석해서 히트곡을 놓치나.
모든 게 분석하고 계산한 대로 흘러가면 이미 인간이 우주 최강 먹었겠지.
그래도 이진성 실장은 민서희 팀장처럼 극명하지는 않았다.
“야. 이제 네 업무 네가 해.”
“네?”
“빨리 처리하고 왔으니까 네 일은 네가 해야지.”
남진수가 본인의 업무를 나에게 넘기려 하길래 살짝 발을 빼니 더욱 으르렁거렸다.
“아니 그건….”
“싫어?”
“아닙니다. 해야죠.”
한번 가져갔으면 좀 해주면 덧나나.
터덜터덜 내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했다.
뭐야, 이거?
나에게 온 업무 메일을 살펴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진수 이 양반은 내 업무 하나도 안 했잖아? 왜 투덜거린 거야?
* * *
“간다. 애들 데려다주고. 고생해.”
“네. 들어가세요.”
결국, 시간 안에 다 끝내지 못하고 야근이 시작되었다.
나는 남았지만 남진수와 이진성 실장은 칼퇴근했다.
말로는 업무 차 접대가 있다고는 했지만….
난 모르지.
애들은 곡이 나와서 그런지 연습한다고 회사에 남아서 연습 중이었다.
곡이 나오자 신난 것 같았다.
나는 애들과 별개로 아직도 오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일을 벌인 걸까.
일차적으로 회의 때 내가 무슨 깡으로 그런 발언을 했는지 모르겠고, 대표가 뭘 보고 나를 밀어주는지 모르겠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대로 회의가 진행되었으면 아마 Love Up&Down은 놓쳤겠지.
이게 맞다.
미래를 아는 나야 어떤 게 더 좋은지 알아서 충동적으로 저질렀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래를 모르니까.
다만, 내가 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땐 다소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보통 이진성 실장 정도의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민서희 팀장은 조금 극렬한 수준이고.
이런 잡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업무에 집중 못 하고 결국은 야근을 하게 된 거지 싶다.
정신 차리고 일단 일을 끝내자.
집중해서 업무를 보기 시작하자 빠르게 업무가 사라졌다.
업무를 다 끝내고 보니 벌써 아홉 시가 다 되어갔다.
애들은 아직도 연습실에 남아서 연습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내가 올 때까지 연습하려고 했나?
내 자리를 정리하고 애들이 있는 연습실로 내려갔다.
* * *
“뭐야. 연습하는 줄 알았는데 놀고 있었네.”
“5분 전까지만 해도 연습하고 있었거든요!”
내려가자마자 잔소리를 했더니 서지영이 반발했다.
“있었거든요!”
“언제 갈 거야?”
“일 다 끝났어요?”
서지영의 말을 따라 말하는 신희진을 무시하고 이나라와 대화를 시작했다.
“응. 그러니까 내려왔지.”
“퇴근하자, 얘들아.”
“이예!”
이나라가 퇴근을 선포하자 애들이 환호했다.
“더 안 해?”
“그냥 각자 연습한 거였어요. 저는 안무 보고 있었고 다른 애들은 노래 연습하거나 몸이 뻣뻣한 친구들은 기본기부터 다시 하고….”
“그래?”
“네, 어차피 연습생 때부터 쭉 해온 거니까요.”
어디든 스타즈의 중심은 이나라가 지키고 있었다.
이나라가 아니었으면 정말 애들 다루기가 끔찍했을 것 같다.
“저희 노래 언제 녹음하러 가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마 조만간일걸?”
“컴백 날짜도 아직이죠?”
“응.”
잠깐, 컴백 날짜도 조금 꼬아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도 컴백 날짜가 애매하기도 했고, 다른 대형 그룹도 우리랑 맞춰서 컴백했었다.
그러니 원래 날짜보다 1주 정도만 빠르게 하면 1주는 확실히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안전하게 1주는 1위 할 가능성이 대폭 올라간다.
지금 추이로도 될 것 같기도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내가 너무 많이 관여하는 것 같다.
그래도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이미 기호지세다.
흐름을 타는 수밖에.
“와, 신기해. 벌서 우리 컴백해?”
“유코 발음도 많이 좋아졌네.”
“연습하고 잇서요.”
“린이처럼 하려면 멀었는데?”
“린이가 너무 빠른 거예요.”
유코가 기분이 좋은지 말이 많아졌다.
유코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킁킁. 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무슨 냄새긴요. 땀 냄새지.”
“환기도 좀 시키고 방향제 같은 거 좀 놔.”
“왜 그걸 저희한테 말씀하시는 거죠? 매니저가 할 일 아닙니까!?”
내가 냄새를 맡고 이야기하자 신희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고 오히려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어?”
“맞아. 매니저가 챙겨줘야죠!”
“어?”
“업무 태만이네. 월급 삭감해야 해.”
“내일 당장 가져다 놓겠습니다.”
근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라 일단 애들의 장단에 맞춰줬다.
내일 방향제랑 이것저것 좀 사와야겠다.
근데 연습실은 공용 아닌가?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인가?
“알면 됐어~ 김 기사~ 차에 가서 히터 좀 틀어놔~”
유미소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건 아니지 미소야.
“미소야, 많이 까분다?”
“죄송합니다.”
내가 정색하면서 말하자 유미소가 쭈그러들었다.
“농담이야. 정리하고 나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네!”
여동생들이 있으면 딱 이런 느낌일까.
예전보다 인간적인 지금의 관계가 난 너무 좋다.
그땐 너무 비즈니스였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20살밖에 안 되는 애들이었는데 말이다.
차에 먼저 들어가 시동을 켜고 기다리니 애들이 하나둘 차에 타기 시작했다.
차에 타고나서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한껏 신나 엄청나게 떠들 거라 예상했는데 조금 지친 모양인지 조용했다.
“오늘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봬요!”
“어, 들어가.”
그렇게 숙소에 도착해서 애들을 바래다주고 나도 집으로 왔다.
본래라면 회사에 차를 가져다 놔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남진수가 차를 몰 일이 적어서 내가 애들을 회사에 출퇴근시킨 뒤, 퇴근을 하다 보니 내 차처럼 끌고 다니게 되었다.
집에 오니 머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내가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 이런 스트레스는 안 받을 텐데.
그렇지만 이런 정보를 말하는 것도 우습고 남들이 믿어주지도 않겠지.
설령 내 말을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굳이 이런 정보를 나눠 먹을 필요가 있나 싶다.
그래도 답답해서 조금은 털어놔야겠다.
이 답답함을 혼자 가지고 있는 거보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나마 막힌 가슴이 조금 뚫리는 느낌이라도 받으니까.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 왜.
“넌 정이란 게 없다?”
- 끊는다.
“잠깐만, 잠깐.”
- 뭐.
“아니, 그냥. 좀 답답해서 전화했다.”
- 끊을게.
사무적인 이진철의 말투가 이어졌다.
나는 서론을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좀 들으라고.”
- 바빠 죽겠는데 스트레스 받게 할래?
“야, 하나만 묻자. 너라면 성공이 보장된 길이 있어. 근데 그 길의 주인은 너가 아니야. 근데 그 길로 갈 수가 있어. 너라면 어떻게 할래?
- 너 바보야? 그걸 왜 물어? 당연히 가야지.
“그치? 그게 맞지?”
- 당연한 거 아니냐. 야, 누가 나보고 1억 투자 한다고 하면 냉큼 받고 바로 영화 찍으러 간다. 일단 저질러야지. 뒷일을 왜 벌써 걱정하냐?
“그래. 그게 맞는 거 같다.”
이진철과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그런지 사고방식도 나랑 비슷했다.
왜 친구는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 왜? 뭐 보장된 길이라도 보이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넌 요즘 어떠냐?”
- 가을동화 편집 도와드리면서 내 시나리오 어떻게 비벼볼까 노력하고 있지. 다른 건 얼추 될 거 같은데 돈이 문제네, 돈이.
“그래? 프리 프로덕션을 했어? 돈만 있으면 된다고?”
- 말 안 했나? 프리 진행도 조금씩 했지. 도와주는 사람들도 조금 있었고. 근데 역시 돈이 문제네.
가을동화를 진행하면서 틈틈이 본인 영화도 신경 쓰고 있던 듯했다.
돈이라… 영화 찍으려면 확실히 돈이 필요하지.
모든 건 다 돈으로 귀결된다.
“잘 될 거야. 아마도? 알았다. 고생해라.”
- 그래. 가을동화도 편집 거의 다 끝났으니까 조만간 보자.
“그래. 쉬어라.”
그래도 이진철에게 조금이나마 털어놓으니 기분이 한결 괜찮아지는 것 같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미래의 정보를 적어둔 노트를 펴고 오늘까지의 정보를 지웠다.
2월, 3월. 한동안은 별다른 건 없구나.
한동안은 애들 컴백에만 신경을 쓰면 될 것 같다.
전과는 많이 달라질 애들의 컴백을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두근두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