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도 다시 매니저!-69화 (69/200)

제69화. 배우 (4)

“선배님!”

“오늘 촬영 다 끝나지 않았니?”

“그게….”

“안 가?”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당황한 김진형 곁으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이예진이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그리고 아직 정신 못 차린 거 같은데 말로만 그러는 건 너무 성의 없어 보이지 않니?”

“이건….”

“됐어. 가줄래?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지 말고.”

이예진은 뭐라도 변명하려던 김진형의 말을 내가 당했던 것처럼 끊어버렸다.

조금 통쾌한데.

“…그럼 가보겠습니다. 달라지는 모습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를 앙다물고 말하는 김진형의 모습에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지만.

그렇게 김진형이 떠나자 복도에는 이예진과 나만 남았다.

“선배님이 나오셨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시끄러워서 나와 보니까 재밌는 상황이 벌어졌길래 안 끼어들 수가 없더라. 내 밥은?”

“여기 있습니다.”

김진형이 떠나자 이예진의 관심은 본인의 밥보다 신경을 안 쓰는 모습을 보니 과연이었다.

김진형은 계속 불편하고 생각나겠지만 이예진에게 김진형은 그저 마음에 안 드는 후배 1인 것 같았다.

내가 가져온 샐러드를 건네주자 이번에는 다른 걸 물어왔다.

“촬영은 언제 시작한대?”

“그건 아직 못 물어봤는데요. 갔다 올까요?”

“됐어요. 스태프가 오겠지. 아니다. 식사 안 했죠?”

“네.”

“식사하고 와요. 난 대기실에 있을 테니.”

“어, 으음… 알겠습니다.”

이예진은 그렇게 말하고 본인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예진을 혼자 대기실에 두고 밥 먹으러 가자니 좀 걸렸다.

그렇다고 일 시작한 지 고작 1년도 안 된 내가 12년 차 배우에게 혼자 드시는 건 좀 그렇지 않냐며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기엔 벽이 너무 높다.

촬영 장소로 돌아가 보니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스태프에게 다가갔다.

“저녁 먹고 언제 촬영 들어가죠?”

“아홉 시부터 촬영 들어갈 거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스태프에게 촬영시간을 알아낸 뒤 준비된 도시락을 가지고 어디서 먹을지 고민했다.

혼밥이 익숙하긴 했으나 어디에서 먹어야 위화감이 없을까.

고민하는 와중에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예진 선배님 매니저님?”

“네?”

“혼자 계시길래 한번 불러봤어요. 같이 드실래요?”

뒤돌아보니 송민희 매니저 김명성이 방금 먹기 시작한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그럴까요? 민희 씨는요?”

“혼자 대본 본다고 내쫓던데요.”

“남은 씬이 민희 씨랑 선배님 두 분밖에 안 나오죠?”

“네, 같이 나오는 거 다 찍은 뒤에 선배님 단독씬 찍고 끝나는 거로 알고 있어요.”

송민희도 이예진과 같은 냄새가 났다.

“오늘 욕보셨네요.”

“아… 그래도 김진형 배우님 정도면 얌전한 축에 속하는데 이예진 선배님은 아니었나 봐요.”

“저도 선배님 담당은 아니어서… 그래도 얼핏 주워듣기로는 선배님이 연기에는 되게 까탈스럽다고 하시더라고요.”

“맞아요. 그래서 김진형 배우도 선배님이 있을 때는 오늘같이 행동 안 했는데 오늘은 스케줄 변동 때문에 몰랐나 봐요.”

김명성도 익히 들은 정보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공감해줬다.

“백진하 매니저가 말리러 가려고 했는데 이미 터진 직후더라고요.”

“그런 것 같았어요. 제가 먼저 이야기하려다가 타이밍을 못 쟀는데.”

“자기 팔자죠. 뭐.”

어색하게 웃는 김명성이었다.

서로 할 말이 없어져서인지 묵묵히 도시락만 먹다가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할 만하세요?”

“네. 아직까진 일이 재밌어요. 민희도 그렇고요.”

“회사가 어디셨죠?”

“라인 엔터라고 작은 회사예요. 민희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죽자고 해서 빛을 보나 싶은데….”

“잘될 거예요.”

“그래야죠.”

다시 또 김명성과 나 사이에 어색하게 침묵만 흘렀다.

“헥사곤도 요즘 배우 영입이 꽤 활발하던데, 배우 풀이 괜찮나요?”

“저도 그건 잘 모르겠어요. 투자받아서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은 하는 거로 알고 있긴 해요.”

“그런가요. 아무래도 여기는 너무 주먹구구식이라 작품 잘되고 좋은 회사로 갔으면 싶은데.”

“네?”

“아, 아니에요.”

뒷말에서 김명성은 송민희가 작은 엔터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보통 회사가 작으면 소속된 연예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던데 저쪽은 아닌가?

“촬영 10분 전입니다!”

“벌써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민희 보러 가볼게요.”

“네, 저도 알려 드리러 가야겠네요.”

“고생하세요.”

“네, 고생하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김명성과의 어색한 식사 자리가 끝이 났다.

밥도 다 먹었고 나도 촬영 시간을 알리러 이예진에게 갔다.

“선배님 촬영 10분 전이라고 합니다.”

“진형이는 갔어요?”

“네, 간 것 같아요. 안 보이던데요.”

“다음에 봤을 때도 그따위면… 오늘은 너무 착했던 것 같아. 옛날 생각나서 너무 불쾌하네.”

별로 착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이게 착한 거였나.

그것보다 나는 이예진이 마지막에 한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예전에 연기할 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듯했다.

“김진형 배우도 잘 알았을 거예요.”

“그럼 다행인데. 흐음, 가볼까요?”

“네, 선배님.”

이예진이 나가기 전에 대기실에 놓고 온 물건이나 쓰레기를 정리하고 급히 따라갔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송민희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이예진을 맞이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

선망 가득한 눈망울로 말하는 송민희가 제법 귀여웠는지 이예진이 웃으며 말했다.

“둘이 찍는 씬은 내가 걱정이 없어. 걱정이.”

이전과는 다르게 이서진 감독도 웃으며 이들과 어울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밥을 먹어서 그런가?

아까와의 온도 차에 적응이 안 됐다.

“자! 조금 딜레이 됐지만 힘내서 찍어 봅시다. 그래도 NG 거의 없는 두 명이니까 힘들 내요.”

“오늘 NG 엄청 냈는데요?”

“에이, 예진 씨도 참.”

하하하.

확실히 촬영장은 이예진의 편이었던 듯했다.

김진형 하나 빠진 거로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다니.

“분위기가 좋네요.”

“원래 이런 분위기였어요.”

“그럼 선배님 없을 때는…?”

“그때는… 민희가 그냥 좀 상대해주기만 하면 분위기가 그렇게 크게 망가지지는 않았거든요.”

“배우들도 고충이 많네요.”

“신인은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죠. 남배우들은 텃세와 괜한 자격지심에 휘둘리고, 여배우들은 여배우끼리만의 불꽃 튀는 신경전이 있다고 할까요. 솔직히 김진형 배우 정도는 뭐….”

김명성이 몸서리쳤다.

좀 궁금하긴 하네.

“아직 여배우들의 불꽃 튀는 장면을 못 봐서 아쉽네요.”

“그거 보시면 정신 못 차려요. 깜짝 놀란다니까요.”

“그래요?”

김명성이 조금 호들갑 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봐온 지망생이나 배우들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너무 무감각한 건가?

“네, 저도 듣고 어찌나 살벌한지 놀랐어요. 아직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저는 지금도 못 느끼겠던데….”

“에이, 비교하시는 둘은 갭이 너무 크고요. 비슷한 배우끼리면 장난 아니에요.”

확실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학생일 때 영화를 해서 못 느낀 걸 수도 있지 싶다.

“조명팀! 아직 덜 끝났어?”

“이 감독님! 5분만 더 줘요! 곧 끝나요!”

“알겠습니다!”

모든 촬영의 딜레이는 조명이다.

카메라 구도 잡고 연기 디렉팅은 조명 세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다시 이예진을 보니 촬영 시작 전에 감정을 다듬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준비가 끝난 듯 조연출의 말이 들려왔다.

“시작하겠습니다!”

“45-1-1”

“롤.”

“스피드.”

“레디!”

조연출의 준비 신호에 맞춰 모두가 숨죽였다.

“액션!”

이서진 감독의 콜과 함께 이예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렇게 하고…. 또 뭐가 필요했지? 넌 아니?”

CG 처리를 하기 위한 크로마키 배경만 있는 세트장에서 이예진은 정말 누가 있는 듯 이야기했다.

본 방송에는 이예진의 시선 처리의 대화 상대는 아마도 마녀의 상징인 빗자루일 것이다.

“모른다고? 그럼 안 되는데….”

이예진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이내 이예진이 연구에 몰두했다.

“자꾸 치근덕댈래?”

이예진이 움찔거리면서 디테일하게 상황을 풀어나갔다.

그리고 이내 송민희가 등장했다. 지금 찍는 장면은 설정 상 이예진이 마녀인 것을 들키게 되는 장면인 것 같았다.

“왜 또!”

이예진이 대사와 함께 고개를 돌리자 당황하는 송민희의 모습이 보였다.

“하, 하, 하… 안녕…하세요?”

“앗!”

놀란 얼굴로 어색하게 대사하는 송민희와 같이 놀라는 이예진이었다.

“컷! 좋은데?”

이서진 감독이 마무리를 지으며 좋다고 이야기하자 현장 분위기는 더 부드러워졌다.

촬영 시작 전에 감독이 말한 것처럼 NG 없이 쭉쭉 컷을 쳐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시죠?”

“살려만 주세요! 못 본 척할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민지 씨 왜 오셨어요?”

조금 전의 이예진이 마녀 이해인이었다면, 지금 이예진은 작가 이해인이 되었다.

송민희는 시종일관 발랄한 캐릭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캐릭터에 잘 스며든 것 같았다.

둘의 연기가 꽤 훌륭해 어색함이 없어 눈앞에서 일어난 듯한 느낌도 받았다.

김명성도 내 옆에서 흐뭇하게 웃으면서 같이 보고 있었다.

“저는 작가님이 계속 연락을 안 받으시길래 무슨 일이 있으신 줄 알고… 문도 열려 있길래….”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전 아무것도 못 봤슴다!”

서로 발뺌하는 모습이 제법 웃겼다.

무겁지도 않고 적당히 가벼운 그런 드라마다.

“끙, 그냥 약을 먹일까?”

“히익!”

“비밀 지켜줄 수 있죠?”

“네! 물론이죠!”

“우린 한배를 탄 거예요?”

“네!”

이예진은 예전에 가을동화 할 때도 느꼈던 거지만 연기는 정말 기깔나게 잘했다.

송민희도 기죽지 않고 정말 잘 받아주고 있었다.

연기는 호흡이기 때문에 본인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 배우도 매우 중요하다.

“악수.”

“네?”

“악수하자고요.”

“악수하면 개구리가 된다든지 그러는 거… 아니죠?”

무심하게 이야기하는 이예진과 대조되는 송민희였다.

둘 다 캐릭터를 정말 잘 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고 있는 스태프들도 나랑 같은 생각인지 숨죽여 웃으면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옆에 있는 빗자루가 끄덕끄덕하는데요?”

“쟤가 장난이 좀 심해요. 이해해 주세요. 너, 저기로 들어가 있어.”

“컷! 좋아! 아주 좋아!”

이서진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박수를 치자 스태프들도 박수를 쳐줬다.

그만큼 이번 장면은 둘의 호흡이 완벽했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분위기에 촬영도 급물살을 탔다.

* * *

송민희의 촬영분이 다 끝나고 다시 세팅이 한창일 때 나와 이예진 곁으로 송민희와 김명성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선배님 기다렸다가 갈까요?”

“체력 아깝게 그럴 필요가 있니? 먼저 가.”

“네, 선배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송민희가 오늘 있었던 일에 이야기하자 이예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과연, 관록이 느껴졌다.

“난 한 게 없는데?”

“언제고 제가 선배님 위치가 되면 저도 똑같이 할게요! 선배님 위치까지 꼭 가고 싶어요!”

“그래? 내 자리까지 올라오는 건 쉬운데.”

“네?”

송민희가 자신의 포부를 이예진에게 말하자 이예진이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꿈으로 봐주는 게 어렵지. 그렇지 않니?”

“제 꿈이 선배님이었어요! 제 말이 조금 이상했나 봐요.”

“그래? 왜 하필 많고 많은 배우 중에 나야? 립서비스인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좋네? 아무튼 오늘 고생했어. 들어가.”

“네? 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이예진이 덤덤하게 아리송한 말을 했다.

무슨 뜻일까?

자리를 본받기보다는 선망 받는 사람이 되라는 걸까.

아리송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송민희와 김명성이 보였는데 아마 나도 똑같은 얼굴일 것 같다.

그런 우리 곁으로 조연출이 다가왔다.

“선배님. 세팅 곧 끝나가는데 바로 촬영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요.”

조연출의 말에 이예진이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나는 스케줄이 남았구나.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벌써 열두 시가 조금 넘어간 시간이었다.

그리고 남진수의 연락이 와 있길래 확인해봤다.

[내일 오전 10시 스타즈 미니 앨범 회의. 늦지 않을 것.]

오전 열 시라.

그래도 조금은 잘 수 있겠지?

* * *

“오늘 고생했어요.”

“제가 고생하긴 뭘요. 고생하셨습니다.”

“퇴근 시간 늦어져서 어떻게 해요?”

“원래 일상입니다. 하하하.”

“알아요. 해본 말이에요.”

이예진의 말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타즈 애들이 저런 말을 했다면 맞받아쳐 줬을 텐데.

얄밉네.

“언제 또 뵙게 될지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차 실장님보다 더 편한데?”

“하하하. 감사합니다.”

“난 빈말 아닌데?”

“크흠.”

저번부터 이예진이 자신의 매니저를 하겠냐는 제의 이후 이예진의 말이 조금 불편했다.

어찌 됐건 지금은 스타즈 매니저를 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나를 원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래봤자 지금은 둘인가? 홍승기와 이예진.

그래도 나를 원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장족의 발전 같다.

“들어가요.”

“네. 고생하셨어요.”

이예진을 보내고 난 뒤 시간을 보니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오늘은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어서 조금 힘든 하루였다.

내일은 이제 본 업무인 스타즈 매니저로 돌아가는 건가.

예전과는 다르게 내가 스타즈 매니저인지 배우 매니저인지 헷갈리는 상황이 자주 오는 것 같다.

미니 앨범 회의라….

예전에는 불러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참석하게 됐다.

거기서 내가 또 뭔가 할 수 있으려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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