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배우 (2)
지금 촬영은 이종수와 송민희를 찍는 듯했다.
“레디!”
준비가 다 되었는지 조연출이 선창을 외쳤다.
“액션!”
이서진 감독의 말과 함께 백진하와 송민희 둘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이예진 옆에 있으니 현장이 전체적으로 잘 보였다. 여기가 감독 다음으로 잘 볼 수 있는 명당이 아닐까 싶다.
“PD님! 이 작가님 또 연락 안 되는데요!”
“하, 또 야? 이번엔 왜 그런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종수와 송민희가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대사를 주고받았다.
특히 송민희는 발랄하면서도 능글맞은 분위기로 이종수와 호흡했는데 너무 자연스러웠다.
저 사람이 예전에는 이해인 역을 맡았다는 건가?
이해인 역은 저 역과는 꽤 상반되는 캐릭터인데.
“신인 작가 주제에 뭘 믿고 저렇게 뻗댄 대냐?”
“PD님도 입봉작이니까요.”
“넌 누구 편이야?”
“저야 당연히 PD님 편이죠!”
“말이라도 못하면 내가 말이라도 안 하지.”
이종수는 10년이 넘는 베테랑 배우라 연기력이 이해가 갔지만 이에 맞춰주는 송민희의 합도 꽤 좋았다.
확실히 저 정도의 연기면 연기력 논란은 없지 싶다.
“다시 한번 전화해봐.”
“네!”
이종수가 답답한 표정으로 송민희에게 말했다.
송민희는 이종수의 표정을 읽고도 천진난만하게 이종수를 대하는 게 묘한 대치 감을 느끼게 했다.
이종수가 멀뚱멀뚱 송민희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모습이 5초 정도 흐르자 이서진 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컷! 킵하고 한 번만 더 갑시다.”
감독의 말에 다시 처음 위치로 돌아가는 배우였다.
이내 분장팀과 스크립터가 배우에게 달라붙어 세팅하는 모습에 드라마도 영화랑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싶었다.
“민희, 잘하죠?”
“네? 아, 네. 연기 잘하시네요.”
현장을 보고 있는데 이예진이 말을 걸어왔다.
“흐름만 잘 타면 쟤는 20대 여배우 라인에 한자리는 꿰찰 거예요.”
“그 정도인가요?”
“신인이라 떨 줄 알았는데 잘하더라고요. 연기도 오래 했고.”
“연극하다 온 친구인가 보네요.”
“연극하다 온 친구는 아니에요. 단편 찍으면서 탄탄하게 실력 쌓은 친구더라고요. 아쉽게도 작품 운은 없는지 연기력에 비해 상을 탄 영화는 없는 것 같던데….”
이예진은 송민희를 열심히 칭찬하다 말끝을 흐렸다.
이예진은 송민희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특히 상 운이 없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을 느낀 게 아닐까?
아마 본인과 비슷한 처지라 더 송민희에게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드라마 현장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빠르게 컷을 끊으시네요.”
“드라마는 영화랑 다르게 실시간이니까요. 지금이야 사전제작으로 들어가서 어느 정도 퀄리티 고민을 하지만 급하면 오늘 찍고 내일 방송에 내보내기도 하는 곳이니까요.”
다음 촬영 세팅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감독이 나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바로 찍지 않고 있었다.
“선배님은 드라마랑 영화 어떤 게 편하세요?”
“돈을 보면 드라마, 작품 욕심나는 건 영화?”
“그럼 이번에 마녀가 흥행하면 또 드라마 하실 생각이세요?”
“흥행하면 이걸로 열심히 우려먹고 작품 선정해야겠죠? 왜요? 옆에서 도와주게요?”
“거기까진 저도 잘… 하하하.”
갑자기 이예진이 훅 들어와 깜짝 놀랐다.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다니 반칙이다.
현장은 어느새 다시 세팅이 끝났는지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테이크 2.”
딱!
“레디!”
“액션!”
연출부의 슬레이트 소리와 감독의 구호에 맞춰 좀 전의 장면이 다시금 연출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송민희가 조금 더 차분해진 느낌으로 이종수와 호흡을 맞췄다.
“컷! 오케이! 다음 컷 뭐야?”
“다음 컷 송민희 배우님 단독 바스트 샷입니다.”
제작진은 두 테이크 만에 오케이 사인이 나서 바로 다음 컷을 위해 분주하게 준비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을 구경하는 와중에 이종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왔어?”
“어, 오빠. 좀 일찍 왔나 봐. 아직 안 끝났네.”
“부지런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옆에 분은 누구야? 차 실장은 어디 가고?”
이종수가 이예진 옆에 있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길래 냉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차 실장님 대신해서 일일 매니저로 온 김현진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근데 낯이 익는 거 같은데….”
“2주 전에 매니저 관찰 프로그램에 얼굴 한번 비췄습니다. 원래는 걸그룹 스타즈 매니접니다.”
“아아! 그거! 시간 나면 종종 보는 프로그램인데. 반갑습니다.”
이종수의 미소 띤 얼굴이 사람 좋아 보였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전 다른 곳에 있다가 오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오빠는 왜 사람을 쫓아내고 그래?”
“그렇게 되나? 하하.”
배우 둘 사이에 껴 있는 모양새가 좀 이상해서 빠져나오려고 말을 했는데 이예진도 별 상관없다는 듯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상관없을 듯했다.
저번에 회식 자리에서 봤던 송민희, 이종수의 매니저가 같이 있는 게 보여 그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번에 제작발표회 때 회식 자리에 있었던 김현진입니다. 기억하세요?”
“네. 방송 잘 봤습니다. 하하.”
“아….”
이종수 매니저인 백진하가 내가 나온 방송을 본 듯 아는 척했다.
“딸 일곱 명 키우려니 힘드시죠?”
“네, 좀 벅차네요.”
“오늘은 어쩐 일로…?”
백진하의 말에 나도 웃으며 대답해주었고 이내 백진하는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차 실장님 땜빵이에요. 애들 휴식기라 공백이 좀 있어서 시간 남는 제가 오게 됐어요.”
“아하.”
“저는 잠시 민희 좀 보고 오겠습니다.”
“네.”
송민희 매니저인 김명성이 송민희가 단독 샷을 찍으려 하자 가까이서 보려고 하는 듯 송민희 곁으로 갔다.
“배우나 매니저나 참 열심이에요. 신인일 땐 뭐든 열심히 한다지만.”
“그런가요?”
“송민희 배우가 연기도 좋고 매니저 케어도 좋고, 언제고 뜨긴 뜰 거 같아요. 이번 작품 잘되면 더 잘되겠죠.”
김명성을 보며 말하는 백진하의 목소리에는 신뢰가 꽤 가득했다.
송민희나 김명성이나 현장에서 평판은 좋은 듯했다.
“저는 현장에서는 모두 처음 뵙는 거라….”
“아, 맞네요. 그러셨지. 그럼 오늘 한번 잘 봐보세요.”
“이예진 선배님도 송민희 배우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요? 별다른 티는 안 내셨던 것 같은데. 그러셨구나….”
이예진이 나한테만 넌지시 말해준 정보였나 보다.
이래서 입조심해야 한다니까.
송민희의 촬영이 시작되자 나와 백진하도 굳게 입을 다물고 현장을 살펴봤다.
송민희의 단독 샷 또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케이 사인이 났고 이종수의 단독 샷으로 넘어갔다.
현장 한쪽에서 쉬고 있는 송민희와 대화하는 김명성을 보니 묘한 느낌을 받았다.
둘의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했는데 백진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종수의 단독 샷은 앞서 찍은 송민희보다 더욱 빨리 끝났다.
이제 이예진이 나오는 씬이 촬영하는 듯했다.
씬이 마무리되자 이서진 감독과 이예진 이종수 셋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음 장면에 관해 이야기하러 간 듯했다.
“근데 왜 아직도 안 오지?”
“네?”
“아, 아니에요. 지금 찍는 장면은 이예진 선배님 종수 형이랑 진형 씨 셋이 나오는 장면인데 이상하게 아직 김진형 배우가 안 보이네요.”
백진하가 내가 의아해하자 자세하게 상황을 풀어줬다.
“음, 일정 바뀌었다고 전달 못 받았나?”
“오늘 일정이 바뀐 건가요?”
“제가 알기로는 이예진 선배님 스케줄에 맞춰서 재조정했다고 들었어요.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안 왔을 리가 없겠죠.”
이예진 다음으로는 김진형이 제일 인지도가 높은 배우였다.
이종수가 업계 짬은 꽤 높지만, 인지도 면에서는 김진형보다 낮은 배우였다.
이 바닥이 연차로 선후배를 구분한다지만 인지도도 무시할 수가 없다.
인지도가 없는 배우는 연차가 높아도 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편이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진형도 양반은 못 되는지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모습을 비췄다.
지금도 딜레이 걸린 시간인데 원래 콜타임이 몇 시였길래 지금 온 거지?
능글맞게 말하는 말투를 보아하니 늦은 거에 대해 큰 자각이 없는 듯했다.
“곧 촬영하니 스탠바이 해주세요.”
“네, 네. 금방 하죠.”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지 조연출은 달관한 표정으로 김진형에게 가서 형식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저러면 안 될 낀데….”
옆에 있던 백진하가 걱정된다는 듯 혼잣말하는 게 들렸다.
오늘은? 무슨 의미일까.
“오! 민희 오늘 이쁜데? 오늘 찍을 거 지금 합이나 맞춰 볼까?”
“…….”
“응? 오늘 스케줄 없지 않아?”
김진형은 준비하라던 스태프의 말은 귓등으로 들은 채 송민희에게 가서 추근덕거렸다.
파트너가 송민희인가?
송민희와 김명성은 난처한 얼굴로 김진형을 대하고 있었는데 김진형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민희야. 오늘 끝나고 일 있어? 술 한잔할까?”
김진형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거리가 제법 되는 것 같았는데도 잘 들렸다.
송민희와 같이 있던 김명성의 표정은 꽤 창백해 보였다.
내 옆에 있던 백진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김진형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도 홀린 듯 백진하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백진하보다 김진형에게 더 빠르게 다가간 인물이 있었다.
“우리 후배님. 연기에 자신 있나 봐. 지각에, 상대 배우 꼬실 시간도 남고 말이야. 놀러 왔니?”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게 아닙니다.”
대기실에서 소란을 들었는지 이예진이 대기실에서 나와 김진형에게 다가가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이종수와 이서진 감독이 대기실에서 나왔다.
김진형의 표정은 못 봤지만, 목소리가 떨린 것을 보니 이예진이 현장에 나와 있는지 몰랐던 듯했다.
“그게 아니면 뭐? 조금 인기 얻으니 눈에 뵈는 게 없어? 여기가 어디라고 수작질이야!”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백진하의 뒤를 따라오다 보니 어느새 지금 사건의 현장에 가까이 와 있었다.
이예진은 싸늘하게 말하고 있었고 김진형은 매우 당황한 표정에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오해? 보면 알겠지. 기대할게.”
이예진이 한마디 툭 던지고 세팅되어 있는 현장으로 들어갔다.
김진형은 어찌할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이예진을 따라갔다.
그러자 이서진 감독과 이종수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나머지 인물들이 떠나자 김명성은 송민희를 데리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이럴까 봐 먼저 말하려고 왔는데….”
“선배님 계실 때는 저렇게 행동 안 했나요?”
“이예진 선배님 아니면 터치할 사람이 없어서 조금 안하무인이었거든요. 배우들 일이라 감독님도 크게 터치는 안 하셨고.”
“아….”
아무래도 김진형이라는 배우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그런 전형적인 강약약강인 듯했다.
“선배님이랑 촬영할 때는 항상 깍듯하고 별 탈 없었거든요. 선배님도 지금 모습은 처음 보는 걸 거예요. 선배님 성격 아는 배우들은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까.”
아무래도 김진형이 오늘은 잘못 걸린 듯싶었다.
이예진이 싸늘한 것 보니 이예진이 별로 좋아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 결과는 촬영이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컷!”
이서진 감독의 컷 소리가 힘차게 현장에 울려 퍼졌다.
“그 감정이 맞아?”
“네?”
그러나 이예진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김진형을 다그치고 있었다.
“그 실력으로 누가 여기 꼽아 줬어?”
김진형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예진이 날카롭게 말했다.
김진형은 이예진의 말에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창백해졌다.
또한, 이예진의 말에 현장이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저렇게 가시를 세운 이예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다시 가도 될까요? 감독님?”
웃으며 말하는 이예진의 표정이 한겨울에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워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