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조금씩 달라지는 (3)
“니들은 설날 당일에도 안 내려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냐?”
“너나 나나 똑같은 이유 아닐까?”
“내 이유가 뭔데?”
현재 제작사에 들어가서 촬영을 하는 김동석과 간간이 아르바이트하면서 연기를 하는 연재훈이었다.
둘 다 나이는 나랑 같았고 꽤 친한 대학교 동기이다.
친해도 예전에는 만나자고 먼저 연락 온 적이 없었는데 방송에 출연한 게 크긴 컸나 보다.
“내려가 봤자 돌아오는 건 취업 걱정과 언제 때려치우냐는 무언의 눈초리 아니냐?”
“정확하네. 낄낄. 너도? 나도!”
김동석의 말에 연재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김현진이~ 저번에 불렀을 때는 바쁘다고 안 나오더니 바쁜 게 어린 애들이랑 노느라 바쁜 거였어?”
“놀다니 무슨 개소리야.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이번에는 타깃을 나로 바꿔서 갈구기 시작했다.
“양심이란 게 없냐 넌? 찾아보니까 너 막내랑 열한 살 차이라며?”
“내가 지원해서 맡았겠냐? 어쩌다 보니 얻어걸린 거지. 그리고 방송 보면 알겠지만 애들 성격이 방송 그대로라 진짜 힘들어.”
“복에 겨운 소리 하고 있네.”
김동석이 비아냥거리며 말했지만 큰 타격은 없었다.
말투가 비꼬는 어조였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악의는 없는 장난인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 올 사람은 다 온 건가?”
“아영이 누나 온다던데?”
“맨날 바쁘다고 안 오더니 웬일이래.”
내가 화제를 돌려 또 올 사람이 있는가 해서 묻자 연재훈이 정아영을 언급했다.
이런 모임에 자주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 김동석의 놀람도 이해가 갔다.
나 또한 그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저번에 내가 전화 한번 했었거든.”
“네가? 뭔 일로?”
“그… 내가 맡은 애 중에 생일인 애가 있어서 뭘 줘야 할지 몰라서 연락했었어.”
“생일? 그래서 뭐 줬냐?”
연재훈이 먹이를 물은 듯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죽부인.”
“죽부인? 누가 그런 걸 줘?”
“좋아하던데? 그리고 죽부인이라고 니들이 생각하는 대나무 죽부인 말고 숙면 베개용 있어.”
둘의 표정이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하는 표정이었다.
저 표정도 익숙했다.
“학교 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너도 참 특이해. 매니저 하는 것도 그렇고.”
“놔둬라. 하루 이틀이냐.”
동기들은 다른 의미로 성격이 드셌다.
만나면 정말 기가 쏙 빨렸다.
셋이서 오랜만이라 근황 토크를 하고 있는데 낯익은 여자가 와서 인사를 했다.
“야! 김현진! 진짜 오랜만이네.”
“어, 왔어?”
동기인 정아영이 오자 정아영을 부른 연재훈이 능숙하게 정아영을 맞이했다.
“2학년 때 봤으니까… 군대 갔다 오고 한 4년 만인가? 통화는 그래도 종종 했잖아.”
“전화로만 안부 묻는 거랑 직접 얼굴 보고 만나는 거랑 같냐?”
나 또한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신선했다.
정아영도 나랑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난 저번에 현장에서 한번 봤어.”
“포동포동하게 찐 게 잘 살고 있었나 보네.”
“야, 예뻐졌다. 화색이 좋아졌다. 이런 말은 할 줄 모르냐?”
나 빼고는 다 한 번씩은 본 듯했다. 내가 실없게 이야기하자 정아영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건 당연한 거고. 졸업하면 남녀 구분 없이 다 좋아졌던데?”
“그건 그래.”
김동석과 연재훈도 나랑 별반 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이제 더 올 사람 없는 건가?”
“그럴걸?”
“다들 바쁜가 보네.”
“누가 설날 당일에 모여? 이렇게 몇 명 있는 것도 신기한 거지.”
정아영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모인 것도 신기한 거다.
“누나는 집에서 뭐라 안 해?”
“친척들 만나면 결혼 언제 하냐. 밥 벌어먹고 살 만하냐. 계속 잔소리 어택하는데 그냥 안 가고 말지. 빈 잔 없어?”
“여기.”
“누나는 더 심하긴 하겠네.”
명절 이야기를 하자 정아영이 스트레스가 장난 아닌 듯 얼굴을 구기며 빈 잔에 술을 따라 바로 마셨다.
“후, 말도 마라. 그래서 작년부터 안 가고 있어. 현진이 넌 요즘 어때? 방송 볼 때는 살맛나겠던데?”
“왜 다들 하나같이 팔자 폈다고 말하네. 매니저 힘들고 박봉인 거 몰라?”
정아영도 앞선 두 명의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뭘 보고 팔자 폈대.
“야, 나도 잘생긴 남자 아이돌 매니저였으면 넙죽 엎드려서 했어.”
“그래서 매니저 해볼래?”
“응, 안 해~ 난 지금 위치에 만족해~”
“그럴 거면서 괜한 말은.”
업계 돌아가는 게 어떤지 대충 아는 사람들이 저렇게 말하니 갑자기 열이 확 올라왔다.
“야, 그러고 보니 진철이는 뭐하냐?”
“진철이 지금 가을동화 편집하고 있을걸? 이신형 감독이랑 같이 열나게 편집 중.”
“아, 그거 크랭크인 했지. 후반도 같이 들어가냐?”
“그런 거 같더라.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네.”
정아영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보통 이진철의 근황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다른 동기들이랑은 친해지기도 전에 현장에 싸돌아다녔으니까.
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친했기 때문에 동기들 중 누구보다도 진철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우리 기수 중에서는 진철이가 제일 짬밥이 높네.”
“걔는 바로 현장 뛰었으니까.”
“연차로 따지면 꽤 됐지. 걔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윤진수 PD님이랑 만났을 때 이진철 이야기 한번 나왔는데.”
하나둘 이진철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정아영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해왔다.
“윤 PD님?”
“알아?”
“예전에 이진철 때문에 현장 갔는데 그때 만났어. 땜빵 뛰러 갔었거든.”
내가 아는 이름이 나와서 아는 척을 하자 정아영이 물어왔다.
“그래? 윤 PD님이 가을동화 후반 작업 끝나면 이진철이 독립 도와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데…. 너 아는 거 없어? 진철이랑 친하잖아.”
“편집실 들어가고 나서는 나도 연락이 잘 안 돼서…. 그래? 벌어둔 돈이 많나?”
나도 정확하게 아는 게 없었다. 찍었다는 것만 알지 그 과정은 많이 생략돼서 들었으니까.
“자기 돈 들여 찍겠냐? 공모전 넣어서 지원받거나 투자자 있나 알아보는 것 같던데….”
“잘되면 좋겠네.”
“그러게.”
내가 잘 모르는 것 같자 정아영도 말끝을 흐렸다.
가만히 듣던 김동석과 연재훈도 딱히 할 말은 없는 듯했다.
“술이나 채워. 짠이나 하자.”
이내 김동석의 말에 서로의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김현진의 한마디가 있겠습니다.”
연재훈이 나서서 나에게 건배사 제의를 했다.
이런 거 잘 못해서 안 하는데.
“왜 또 나야? 자리 만든 건 너잖아.”
“어찌 됐든 너 방송 타서 이 자리 만든 건 맞으니까.”
포장하는 건 수준급이다.
“야, 팔 아파. 대충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치얼스.”
“아, 노잼.”
“시끄러.”
“변한 게 없네.”
멍석을 깔아줘도 별다른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뭔가를 위해서 만난 게 아니라 그냥 번개 만남이었으니까.
“왜 한결같아서 좋은데.”
“누나는 그만 한결같았으면 좋겠어.”
연재훈의 갈굼에 정아영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연재훈이 꼬리를 내렸다.
“요새는 뭐 하고 지내?”
“다음 차기 작품 준비하고 있지.”
“거기 아직도 다녀? 아직도 백 교수님 제작사야?”
“조만간 쨀 거야. 각 잡는 중. 오라는 곳은 많은데 튀는 게 힘드네.”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니 정아영이 취직한 곳은 아무래도 추천으로 들어간 제작사인 듯했다.
지인 추천이 좋은 점도 있으나 나쁜 점은 빠져나오기도 힘들고 목소리 내기도 생각보다 힘들다는 점이다.
이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나도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추천해서 들어갈 바엔 무조건 따로 면접 봐서 들어가라고.
“그러게 누가 덥석 물래?”
“그래도 사람은 많이 만났다.”
“넌 연기 안 해?”
“안 그래도 그 이야기도 하고 있었는데.”
정아영이 연재훈에게 묻자 김동석이 입맛을 다시며 받아줬다.
“잘 모르겠어. 계속 해야 하는지 다른 거로 먹고 살아야 하는지.”
“다 그렇지 뭐. 연영과 나왔다고 다 배우 하는 건 아니니까. 스태프로도 많이 빠지기도 하고. 준성이는 제작 뛰잖아.”
“모르겠다. 증말.”
사실이 그렇다.
연영과 나온다고 연출하거나 배우 하는 사람은 꽤 드물다.
졸업하면 열에 예닐곱은 딴 길로 간다.
“그래서 일곱 명 중에 맘에 드는 애는 누구야?”
“뭔 소리야. 다 똑같지 뭐.”
현실적인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는지 화제는 다시금 나에게로 왔다.
“에이, 그래도 눈길 가는 애는 있을 거 아냐?”
“아니 진짜 다 그냥 동생 같아서 아무 생각 없다니까.”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을 뿐인데 너무 억울했다.
알면서도 저러는 거 같은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꼭 그렇게 말하는 애들이 사고 치더라.”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럴 일 없을 거 같은데.”
정아영의 말에 나는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대체적으로는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다른 애들은?”
“저번 달에 연락되는 애들끼리 만났는데 그럭저럭 잘살고 있더라.”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뭐하나 싶어 물어보니 알아서들 잘살고 있는 것 같았다.
“소라는 연기 그만두고 어디 회사 들어갔다며?”
“소라 이야기 꺼내는 거 보니 아직도 못 잊었구만.”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진짜? 리얼리? 단순히 근황이 궁금한 거야?”
한소라는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선후배, 교수 전부 칭찬했던 동기였다.
그리고 김동석과 사귀었던 학과 CC였다.
아무래도 정아영이 마당발이다 보니 뭐 하고 사는지 알 거라 생각했던 듯싶다.
김동석을 놀릴 때 자주 써먹는 소재가 한소라다.
“아, 그렇다니까!”
“화내는 거 보니 아닌 거 같은데?”
“그만하시죠? 아무튼, 뭐 하는지는 알아?”
정아영도 연재훈이랑 같이 김동석을 골려주다가, 김동석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자신이 아는 정보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 저번에 연락했을 때는 경리로 일한다고 들었어.”
“연기 안 하고?”
다른 사람의 근황 이야기에 김동석이 말을 내뱉자 정아영이 대답해줬다.
“못하겠대. 더 이상.”
“연기 참 좋았는데. 아쉽네.”
정아영의 말에 제일 표정이 안 좋아진 것은 연재훈이었다.
아무래도 연재훈은 아직도 연기를 안 놓고 있었으니까 더 씁쓸한 것 같았다.
“뭐 어쩔 수 없지. 나이는 서서히 차는데 벽은 굳건하니까. 하나둘 포기하는 거지.”
현실의 벽에 하나둘 포기하는 친구들을 보니 참 안타까웠다.
그런다고 당장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열심히 각자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하기를 기도해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에이, 술이나 마시자.”
분위기가 암울해지고 조용해지자 연재훈이 분위기를 풀고자 술잔을 들며 말했다.
“정아영의 결혼을 위하여!”
“이 새끼가 정신 못 차리네?”
연재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정아영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동기 중 성격은 정아영이 가장 셌다.
* * *
내가 돌아온 지 4개월 정도 되었나.
내 일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과는 달리 많은 사람을 만났고 관계의 변화폭도 넓어졌다.
행동과 마음가짐이 바뀐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이 바뀐 게 신기했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적극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그 근간에는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거라 생각한다.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싶다.
내 행동에 미래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짜릿했다.
그러나 그 달라지는 혜택은 내 사람만 받고 있다는 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이점은 항상 나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그렇다면 차라리 원래 그 위치에 있는 사람도 최대한 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자.
“…그래서 컨셉을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다들 동의하십니까?”
“이렇게 가죠.”
어느새 스타즈 컨셉회의가 끝이 나고 있었다.
내가 의견을 낼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인지 너무 상념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런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가 회사에서 내 위치가 많이 올라간 반증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런 회의 참석 자체를 못 했으니까.
“그럼 이걸로 회의 마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하나둘 회의실에서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현진이는 2팀으로 가봐. 차 실장님이 찾더라.”
“저요?”
“어.”
남진수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2팀에 차태수 팀장이 찾는 거면 생각나는 게 하나밖에 없는데.
설마 담당이 바뀌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