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조금씩 달라지는 (2)
스튜디오에 가서 촬영했을 때 내 인터뷰를 땄는데 그때 작가가 물어본 질문이었다.
- 누구 하나 선택하기 힘든데요. 각자 매력이 있어서요.
내가 말이 끝나자 화면이 넘어가고 자막이 떴다.
[Q. 그래도 한 명만 꼽는다면?]
- 그래도 한 명 꼽는다면…. 어려운데요. 하하하.
물론 나는 내 명을 짧게 하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네.”
“그래서 한 명 꼽으면 누군데요?”
“너네 다 매력적이라 꼽을 수가 없다니까. 아, 오늘은 혜연이가 최고.”
남진수가 실실 웃으며 이야기하자 근처에 있던 서지영이 다시 물어왔으나 나는 철벽 방어했다.
“캬, 현진이가 사회생활 만렙이네. 어쩐지 신입치고는 노련하게 한다더니 다 몸에 배어 있었구먼.”
“학창시절 때부터 단련되었습니다.”
“요즘 학교는 그런 것도 가르치냐?”
“살려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연극영화과가 워낙 빡세서요.”
“아, 맞다. 그랬지 참.”
군대와 학교생활 중 뭐가 더 힘들었냐고 하면 난 학교생활을 택할 것 같다.
지금이야 언론을 타면서 많이 사라졌지만, 연영과는 악폐습이 많은 유명한 학과 중 하나다.
애들이 방송을 보면서 치킨을 뜯다 말고 나에게 물어왔다.
“오빠 연영과 나왔어요?”
“말 안 했나?”
“네.”
박혜연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나한테 묻자 오히려 내가 의아했다.
“난. 알고 있었는데?”
“린이 넌 어떻게 알아?”
가만히 듣던 린이 자신은 알고 있었다고 말하자 신희진도 린에게 물어왔다.
“저번에. 화랑 찍을 때.”
“왜 말 안 해줬어?”
“아는 줄 알았지.”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일단 방송이나 보자.”
방송 보는 것보다 내가 연영과 나온 게 더 중요한 사안인 듯 애들의 관심이 쏠렸다.
내가 커트하지 않았다면 계속 말할 기세였다.
방송은 벌써 달리는 차 안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파티가 끝나고 다음 차례인 휴게소에서 애들의 시식 코너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거 진짜 마싯섰는데.”
“이상하게 서울에서 먹으면 또 저런 맛이 안 나더라.”
가만히 방송을 보던 유코가 어눌한 발음으로 한마디 내뱉자 음식에 관해서는 빠지지 않는 신희진도 한마디 보탰다.
“저 집이 맛있는 거 아닐까?”
“그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나도 다시 먹고 싶어지긴 했다.
애들이 휴게소에서 먹는 모습이 끝나고 차 안에서 박혜연을 찾는 화면이 나왔다.
저건 방송에 안 내보낼 것 같았는데 방송에 나온 걸 보니 제작진도 참 독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소스 자체는 예능으로 꽤 훌륭하기도 했지만 걸그룹 이미지가 있는데 신경 안 쓰고 재미만 뽑아낸 것 같았다.
- 휴지 주러 가니까 냄새가 조금 독하기는 했어요.
“야! 서지영!”
“뭐 어때. 방송이잖아, 킥킥.”
방송에서 서지영이 휴게소 썰을 풀자 박혜연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분노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서지영이 정말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무난하게 행사장에 도착하는 그림이 그려졌고, 행사장 안에서 노닥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이어지다가 스태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기점으로 급변했다.
나와 스태프가 상세하게 대화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 나눈 대화는 비즈니스니까.
“저때 생각보다 재밌었는데.”
“콘서트 하는 느낌도 나지 않았어?”
“응, 그래서 더 재밌었던 듯?”
“무대 체질인가 봐.”
애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나는 꽤 당황했었다.
뭐든지 예정에 없던 돌발 상황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나중에 현진이 통해 듣긴 했는데 꽤 급박했네.”
남진수도 내 생각에 공감해줬다.
역시 고충을 알아주는 건 같은 직업군이라니까.
지잉. 지잉. 지잉.
방송을 보는 도중 핸드폰이 울려 확인해보니 연락이 끊겼던 선배의 전화번호였다.
받기에는 뭐해서 거절하고 나중에 연락 준다고 하고 연락을 끝냈다.
그러나 방송의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를 찾는 연락이 꽤 오기 시작했다.
“연락 계속 오는 거 같은데 잠깐 핸드폰 꺼놔.”
“그럴까요?”
“원래 방송이 파급효과가 좀 커.”
“네, 알겠습니다.”
이진성 실장의 말에 나도 그냥 핸드폰을 꺼버렸다.
방송은 이미 어느덧 애들이 밥을 배부르게 먹고 그날 하루가 끝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때 돌아가는 길에는 애들이 다 뻗어 있어서 참 조용했다.
- 스타즈 매니저가 참 고생이 많네요.
- 그래서 참 고마워요. 저희를 많이 배려해 주시거든요.
MC의 말에 유미소가 말하는 장면은 나를 흐뭇하게 했다.
현장에서도 봤지만, 다시 봐도 좋았다.
“립서비스니까 웃지 마요.”
“그래그래. 너 맘 다 안다.”
“립서비스래도요.”
유미소는 괜히 부끄러운지 더 까칠하게 반응했다.
이렇게 애들과 웃고 떠들면서 모니터링하는 게 즐겁다.
이슈가 많이 터졌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까지는 순풍이었다.
스타즈는 조금씩 조금씩 예전과는 달라져갔다.
“지영이가 확실히 예능감이 좋네.”
“헤헤.”
“저는요?”
이진성 실장이 자신을 칭찬하자 서지영이 헤벌쭉 웃었다.
그걸 가만히 듣던 이나라가 이진성 실장에게 물어왔다.
“나라는 진행 병이 심해. 맏언니이기도 하고 리더 포지션이라 애들 챙기느라 그런가?”
“네,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니들 때문이야.”
이진성 실장의 분석은 꽤 정확했다.
“언니, 솔직히 우리가 그러는 거에 감사해야 해. 우리 아니었으면 노-잼 버전 2였어.”
“어쭈 까분다? 한따까리 할까?”
“사실만 말하면 저런다니까.”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다. 애들이 의도치 않게 이나라의 캐릭터 컨셉을 확실히 잡아줘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린 버전 2일 게 분명했다.
“희진이 너까지…. 다 죽었어. 숙소 들어가서 보자.”
“나는 언니 편.”
“나도.”
그래도 숙소에서 실세는 이나라가 맞는 듯했다. 이나라가 분노하는 게 보이자 린과 유코는 잽싸게 이나라 쪽으로 붙었다.
“린이랑 유코밖에 없다. 진짜.”
“배신자들!”
방송은 어느새 2일 차에 있었던 그 사건을 보여주고 있었다.
- 아~ 이게 말이 되나요. 담당 그룹사인 CD도 없다니요?
“그러게요. 말이 되나요? 김현진 매니저님?”
“된다고 생각합니다.”
방송에서 흘러나온 말에 애들의 눈이 찌릿해지는 게 느껴져 위기감이 다시 생겼지만 부드럽게 넘겼다.
“내일 오빠 집 가서 우리 사인 CD 빼고 다 버려야겠다. 진짜루.”
“그거 모으느라 힘들었으니까 참아줘….”
“최애 연예인은 누굽니까?”
“스타즈입니다.”
그래도 애들 입장에서는 섭섭할 만했기에 낼름 엎드렸다.
“현진이가 고생이 많아.”
“팀장님. 말만 그러지 마시고 도와주세요.”
“얘들아, 더 물어뜯어라.”
내가 도와달라고 요청하자 남진수는 한술 더 떴다.
영상은 내가 없는 나의 집을 비춰주고 있었다.
- 비밀번호가 1234567890래. 풉!
내가 없는 내 집에서 저런 짓을 하다니. 앙큼한 것들.
귀찮아서 간단한 비밀번호로 설정해놨는데 쉽게 뚫었네.
- 야한 거 없어? 남자들은 보통 그런 거 숨겨두잖아.
서지영의 말에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몰라서 전날에 정리해둔 게 신의 한 수였구나.
그날의 나를 매우 칭찬해.
- 우리 무대 영상이네.
내가 틈틈이 모아둔 애들 영상을 자기들끼리 보는 모습을 보니 묘했다.
“오~ 김현진. 애들 신경 쓰고 있네?”
“그냥 시간 날 때 모았어요. 하하.”
남진수가 나를 보고 의외라는 듯 말하길래 대꾸해줬다.
애들도 잠깐 나를 바라봤다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에는 내가 들어와서 애들을 데리고 식사하러 이동하는 장면이 나왔다.
식사는 빠르게 넘어갔고 프로그램 시간 관계 때문인지 장 보는 장면은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장면만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요리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 매니저님이 요리는 잘하시던가요?
- 그건 계속 한번 보시죠!
- 의미심장한데요. 맛이 없었나?
“오, 지영이가 센스가 있네. 안 알려주고 기대감 유도하네.”
남진수가 서지영의 진행 솜씨에 다시금 감탄했다.
확실히 노련했다.
“저거 보니까 지금 또 먹고 싶다.”
“언니, 지금 분쇄한 치킨을 생각해.”
“숙소 가서 푸딩 먹어야지.”
신희진이 또 먹고 싶다고 말하자 유미소가 경악했다.
“푸딩 남은 거 내 거 아냐?”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야.”
“언니 거는 저번에 언니가 먹었잖아!”
어느새 치킨을 다 먹은 서지영과 신희진이 푸딩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반응을 봐서는 신희진이 숙소에 있는 음식들을 약탈해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사줄게.”
“싫어, 그거 잘 안 나온단 말이야.”
- 오! 매니저가 요리 솜씨가 능숙하네요. 맛있던가요?
- 네, 맛 괜찮았어요.
어느새 애들과 밥 먹고 헤어지는 장면까지 왔다.
촬영이 아마 저기서 끝났지.
“이제 끝이네. 알찼다.”
“끝이 아닌 거 같은데?”
“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이진성 실장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 더 남았나? 끝난 거 아니었어요?
방송을 보니 아직 우리 편이 끝난 게 아니었다.
날 보내 놓고 정리가 되지 않은 테이블에서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 앞으로도 우리 열심히 하자.
- 유심히 푸 삼촌 봤는데 정말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더라.
- 다른 분들도 그렇고.
이나라가 분위기 잡으며 말하자 애들도 동조했다.
- 항상 우리를 서포트 해주는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잊지 말자.
- 마자요. 진짜루 고생마나.
이나라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유코가 끄덕이면서 말하는 게 웃겨서 자못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손 모아봐.
2일간의 애들의 매니저 간략 평이었던 듯싶다.
아니면 방송을 통해서 스태프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말하는 건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이상했으니까.
- 둘, 셋!
-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스타즈 애들이 사전에 짜놨는지 파이팅 넘치게 같이 구호를 외쳤다.
- 그럼 설거지 담당을 정해볼까?
- 가위, 바위, 보!
설거지 담당을 정하는 것을 끝으로 나와 스타즈의 예능이 종료되었다.
이후로는 MC의 시답잖은 멘트와 함께 다른 패널의 매니저 관찰로 넘어갔다.
“더 볼 필요는 없지?”
“궁금하긴 한데 나중에 찾아볼게요!”
“정리하고 퇴근하자.”
이진성 실장의 말에 핸드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열한 시가 다 되어갔다.
핸드폰에는 수많은 연락이 와 있었지만, 일단은 무시했다.
“네!”
“진수는 뭐 더 할 말 없지?”
회의실이 정리되어가자 이진성 실장이 남진수에게 말을 걸었다.
“아, 내일은 오전에 잡지 인터뷰 있으니까 알아둬.”
“네!”
“현진이가 애들 바래다주고 퇴근해.”
“네.”
남진수가 내일 일정을 알려주자 이진성 실장은 애들의 뒷바라지를 나에게 맡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현진아 나도 먼저 간다. 고생해. 오늘 재밌더라. 현진이는 한동안은 고생할 거야. 너네도 방송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남진수가 나가자 나와 애들만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정리 다 했어요.”
“가자.”
“네.”
애들과 함께 쓰레기를 버리고 밴으로 왔다.
“혜연이 선물은 뭐예요?”
서지영의 말에 아차 했다.
맞다, 그게 남았지.
“선물? 아 별거 아니야.”
“혜연아! 선물 기대해도 된대!”
틈만 나면 물어뜯는 서지영이었다.
기운도 좋네.
“그래서 뭔데요?”
“차 뒷좌석에 있어.”
내 말에 서지영이 바로 벤에 탑승했다.
그리고 나도 운전석 쪽으로 가 차에 탑승했다.
“뭐가 이렇게 길쭉해요?”
“숙소 가면 풀어봐.”
“이거 만져보니까 뭔지 알 거 같은데?”
선물의 주인공인 박혜연은 뭔지 모르는 눈치였고 이나라는 눈치 빠르게 알아챈 것 같다.
“푹씬푹씬 한대?”
“이거. 죽부인?”
유코도 선물을 콕콕 찔러보면서 선물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린이가 한번 만져보고 길이를 보더니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일반 죽부인이 아니라 숙면 베개용 죽부인이다.
“아!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무슨 여자 생일 선물로 죽부인을 줘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어.”
이나라가 아쉽다는 듯 말하자 유미소가 나를 타박했다.
나로서는 머리 많이 굴린 결과가 저거다.
“저거 끼고 자면 좀 시원한가?”
“한번 껴안고 자보면 알겠지.”
“근데 이건 대나무 같은 게 아니잖아. 시원한가?”
“혜연아, 저거 나도 써볼래.”
이내 애들의 관심은 선물로 갔다.
“잘 때 뭐 껴안고 자는 혜연이한테는 괜찮을지도? 삼촌 알고 사온 거예요?”
여기서 안다고 해야 하나 얻어걸렸다고 해야 하나.
“응? 그냥 베개가 무난할 것 같았는데 일반 베개보다는 이게 낫지 싶어서 샀어.”
“잘 쓸게요. 오빠!”
알고 사온 물건이긴 했지만, 알고 사왔다고 하면 조금 이상할 것 같아서 둘러댔다.
다행히 선물을 받는 당사자인 박혜연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이번엔 어찌어찌 잘 넘겼는데 애들 생일이 이제 시작이라 여섯 번을 더 넘겨야 한다.
좀 늦게 친해질 걸 그랬나.
* * *
내 모습이 방송에 나가고 나서 며칠 지났지만, 여전히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저번에 찍은 집구석 Live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잠깐 비쳤지만, 이번 프로그램은 거의 메인이 되어 나왔기 때문인지 화제성이 장난 아니었다.
“그래서 애들은 어때?”
“방송에 나온 거랑 똑같아. 다른 거 없어.”
“부러운 새끼.”
“너도 매니저 한번 해볼래?”
“그럴까? 솔깃한데?”
내가 실없는 소리를 하자 긍정적인 반응이 왔다.
“미친놈인가. 너 연기 안 할 거야?”
“지금은 잘 모르겠어.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언제까지 연기한다고 연기만 붙잡을 수도 없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런데 이렇게 설 연휴 쉬는 날에 모임을 하게 된 것도 프로그램의 화제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이렇게 연락이 먼저 온 적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