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마녀의 먹잇감 (1)
무사히 태풍이 지나갔다.
그리고 불이 우리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우리는 진화했지만 다른 곳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아직도 타고 있었다.
“하루 만에 난리가 났네.”
“아무래도 인기 멤버 두 명이니까 더 그런 거 아닐까요?”
“이거 보면 진짜 아이돌 애들은 무슨 깡 가지고 연애하는지 모르겠어. 걸리면 바로 훅 가는데 말이야.”
남진수의 말처럼 훅 가기 직전이다. 게다가 그룹 팬덤 덩치가 큰 둘이라 쉽사리 진화되지 않는 듯했다.
뭐 상관없다. 내 일이 아니니까.
열심히 강 건너 불구경 중이다.
어제저녁부터 하루하루가 아주 신났다.
내가 저지른 도화선이 이렇게 커졌다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놔둬도 가까운 시일 내에 터졌을 테지만 직접 불을 붙인 건 나였다.
이런 사정을 회사나 애들이 알 리는 없겠지만 우리 애들이 잘 넘어갔으니 잘된 거다.
“애들 앨범 녹음 일정 나왔던데.”
“언제 하나요?”
“녹음은 다음 달. 4월 중순에 컴백 잡아뒀더라고.”
“이제 체중 관리 빡세게 하라고 해야겠네요.”
“지금까지 알아서 잘했으니까. 슬슬 관리하겠지.”
이제 벌써 두 번째 활동기인가.
이번 활동기가 끝나면 또 하나 더 내줄지 안 내줄지는 모르겠다. 시기상 하나 더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는 두 번째 앨범 이후로 앨범이 안 나왔다.
“저는 오늘 그럼 할 일 없나요?”
“할 일이 왜 없어. 밀린 업무 처리해야지.”
남진수가 법인카드로 결제한 영수증 명세를 한아름 들고 와서 말했다.
영수증 처리해야 할 게 이렇게 쌓였었나?
개인적으로는 업무 볼 때 이게 가장 힘든 것 같다.
일은 예전에 다 배웠지만, 하기 싫어서 어리바리한 티를 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실수할까 봐 지금까지는 남진수가 도와주면서 했는데 이번에는 혼자 할 팔자인 듯했다.
“오늘 이거 다하고 퇴근해.”
“오늘 다하려면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하면 되지.”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으나 남진수는 콧방귀 뀌며 무시했다.
좌절하고 있던 찰나에 남진수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아 그리고 현진아.”
“네, 팀장님.”
“다음 주에 ‘마녀’ 제작발표회 있는 거 알지?”
벌써 제작발표회인가 보다.
사전제작으로 몇 화 정도 찍고 발표회 한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그만큼 됐나 싶다.
“네, 그런데요?”
“너도 참석해.”
“저요?”
“3팀에서 콜 왔어. 아니지. 이예진 측에서 콜이 왔어. 너 보내 달라고.”
왜 또 나를 찾는 걸까. 단순한 호의인가?
“제가 거길 왜….”
“일단 가봐. 그건 나도 모르겠다. 저번 미팅도 같이 갔잖아.”
“알겠습니다.”
남진수는 자기 볼일이 끝난 듯 자리를 떠나려 하길래 나는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띠며 붙잡았다.
“근데 팀장님. 혹시 이거 같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 혼자 해야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들었는데 남진수는 너무 단호했다.
Shit!
오늘은 야근할 팔자였나 보다.
일찍 가나 싶었는데.
* * *
열애설은 하루 이틀 더 가다가 확 식었다. 식었다기보다 진압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오늘로 열애설이 터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열애설 이후로는 회사도 조용히 보냈다.
또 잘못 엮이면 곤혹이니까.
간만에 편하게 회사 다닌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잡힌 촬영 스케줄은 예정대로 진행했다.
그래봤자 잡힌 스케줄은 ‘지금 뭐 해?’의 스튜디오 촬영 하나뿐이었지만.
지금은 일주일 만에 내 개인 스케줄차 나왔다.
애들 스케줄이 아닌 내 스케줄이라는 게 신기했다.
그것도 일로 온 게 아닌 초청으로 제작발표회를 와서 더 그랬다.
이예진 측에서 일로 안 잡고 회사에 정식으로 요청해서 빼준 스케줄이라 오늘은 약간 놀러 온 기분이었다.
봄나들이 가는 듯한 기분으로 제작발표회 현장으로 가고 있는데 내 앞에서 걸어가던 두 명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죄다 못 보던 얼굴이네. 다 말진인가?”
“너랑 나는 일거리 없어서 나온 거지 빨아주는 기사만 쓰는데 막내만 보내지 우리 보내겠냐.”
“편하다고 올 수도 있지 뭘. 아니면 일이 없던가. 아, 어디 빨대 없냐? 우리도 미스매치 애들처럼 쪽쪽 빨면서 일하면 일하기 참 쉬울 거 같은데.”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보니 기자들인 것 같았다.
무언가 더 들을 정보가 있을까 싶어 거리를 유지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잠 안 자고 했겠냐. 난 그렇게 잠복 수사 못 해. 그 짓은 수습 때만으로도 족하다.”
“수습 때 하리꼬미 교육받은 거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없어져야 해, 진짜. 연예부 기자가 경찰서 드나들면서 잠 안 자고 취재할 일이 뭐가 있다고.”
“니가 없애 보던가.”
어쩐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여유롭더라니.
말하는 걸 들어보니 연차가 좀 되는 기자들인 것 같았다.
“이번에 터진 한명수랑 소진이 둘은 조만간 깨지겠고.”
“한두 달 안에 깨지겠지. 그대로 놔두면 치명타인데.”
내 앞에 걸어가고 있는 두 명은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기자들인 것 같았다. 기자들의 이야기가 꽤 신선했다.
기자 두 명과 같이 제작발표회 내부로 진입했다.
기자는 기자석으로 이동했고 나는 따로 마련된 곳으로 가서 제작발표회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오셨나요? 곧 시작하겠습니다.”
마침 시작하려고 하는지 제작발표회 MC인 아나운서 차배진이 마이크를 들어 현장주의를 환기했다.
인사는 제작발표회 끝나고 해야 할 듯싶다.
“안녕하세요. 이번 마녀 제작발표회 MC를 맡게 된 아나운서 차배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차배진의 인사가 끝나자 잠시간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먼저 간단하게 마녀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소개하고 가겠습니다.”
“마녀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마녀의 이야기입니다. 극 중 마녀는 겉으로는 방송 작가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본연의 모습인 마녀로 돌아가 생활하며 이 마녀와 함께 방송가의 모습을 그리는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입니다.”
차배진이 간략하게 드라마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빛내줄 마녀 이해인 역의 이예진 씨. 이번 역할은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른 배역이라 도전이라고 많은 관심을 주고 계시죠.”
이예진의 간략한 소개가 제일 먼저 나왔다.
이예진의 합류로 인해 예전의 마녀보다 화제성은 더욱더 높아졌다.
예전의 마녀는 화제성 높은 인물은 딱히 없었으니까.
그 이후의 출연진들 또한 예전보다 급이 조금 올라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연기력이 좋다는 평을 듣는 배우들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과 똑같은 배우 한 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녀를 통해 데뷔하는 신인배우 송민희 씨.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연기를 아주 잘한다는 평이 많다고 하네요.”
송민희.
원래라면 이예진이 맡은 마녀 이해인 역할을 송민희가 맡았어야 했다.
얄궂게도 주연 배역은 아니지만, 배역을 따낸 듯했다.
애초에 여기서 언급되는 수준이면 주 조연급은 된다.
내가 마녀를 보지는 않아서 정확히 어떤 역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예진이 주연 자리를 빼앗은 느낌이기도 해서 찝찝했는데 튀는 인물은 어떻게든 튀는 것 같다.
하긴 운만으로 되는 바닥이 아니긴 했다.
“그럼 다음 순서로는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을 소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차배진 아나운서가 내빈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빈에 내 이름은 안 나와서 다행이었다.
드라마국장, 책임 프로듀서, 이사, 제작사 대표 등 쟁쟁한 인물들이 거론되는데 초청자라고 불릴까 내심 조마조마했다.
너무 자의식 과잉이었던 듯싶다.
“이제 드라마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3월 우리들의 수목 저녁을 책임져줄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마녀. 하이라이트 영상을 지금 함께 보시죠!”
차배진의 말에 영상이 바로 시작되었다.
드라마 시작 전 흔히 말하는 오프닝 영상이 시작되었는데 로맨스 드라마답게 발랄하고 화사한 느낌의 화면이었다.
- 빗자루야. 그만 나대줄래? 정신 사나우니까.
- 싫은데요. 제 작품 왜 제가 양보해야 하죠?
마녀 모습의 이예진과 방송 작가의 이예진이 나왔다.
마녀의 모습은 발랄했다면 방송 작가의 모습은 까칠하고 신랄했다.
- 그 여자. 너무 독해.
이예진과 같이 극을 이끌어가는 남자 배우 이종수였다.
그 외에도 앞서 소개한 배우 순서에 맞춰서 인물들의 대사와 함께 캐릭터를 보여주는 영상들이 나왔다.
- PD님! 이해인 작가님! 그만 하세요!
그리고 그에 따라 마지막에 나온 인물은 송민희였다.
- 당신이 책임질 거야?
- 내 새끼 내가 책임지죠. 누가 책임지나요? 아, 당신은 아닌가?
배우들의 간략한 캐릭터 소개가 끝나자 드라마 내용이 간략하게 흘러갔다.
- 내가 왜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데?
- 김신효 배우님! 스탠바이 하실 게요!
- 얄궂다. 정말.
- 내가 오해했나?
- 술 한잔할래요?
수목 드라마 ‘마녀’.
영상이 끝나고 타이틀 롤이 올라가면서 하이라이트 영상이 끝났다.
마지막에 대사하는 이예진이 압권이었다.
아릿한 표정으로 말하는 이예진의 모습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확실히 배우는 배우다.
“하하하, 이거 엄청 기대되네요. 느낌이 아주 좋네요! 방영하는 날이 기다려지는데요?”
차배진도 처음 봤는데 재밌어 보였는지 목소리가 아까와 사뭇 달랐다. 기대감이 깃든 목소리로 열띤 설명을 하고 있었다.
아까는 설명하는 톤이었는데 지금은 팬 같은 분위기다.
맡은 MC에 충실하게 해서 홍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잘 모를 정도다.
프로페셔널 하네.
“배우분들 포토타임 갖겠습니다.”
차배진이 이제 배우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포토타임을 가졌다. 기자들도 앞에 나와서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포즈 하나 취해 주시죠. 쑥스러워하지 마시고. 오른쪽도 봐주세요. 기자님들 좋은 사진 부탁드립니다.”
차배진 아나운서가 능수능란하게 발표회를 진행했다.
“자, 마지막으로 마녀의 감독. 이서진 감독님 모시고 단체 사진 찍겠습니다.”
이서진 감독이 쑥스럽게 나와 포토타임을 가졌다.
“감독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더 자신 있게 하셔야죠. 이번에는 파이팅 포즈 취하고 찍어볼까요?”
아나운서 MC는 정말 진행이 탁월한 듯했다.
이래서 아나운서 MC를 쓰나 보다.
“자! 정면 보시고. 마녀 파이팅!”
“이번엔 오른쪽 보시고. 마녀 파이팅!”
“마지막으로 왼쪽 보시고. 마녀 파이팅!”
포토타임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나와 테이블과 의자를 무대에 깔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흘러 배치가 끝나고 배우들이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
이서진 감독이 맨 처음 마이크를 잡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녀는 앞서 차배진 아나운서님이 설명하신 대로 대한민국에 하나 남은 마녀가 방송가에서 일을 진행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이야기고요. 이 과정에서 여러 인물의 군상을 그리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계획입니다.”
이서진 감독의 말에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후로 배우들의 소개와 캐릭터 소개가 이어졌고 기자들의 질문들도 같이 이루어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TV 섹션의 이수지 기자라고 합니다. 이예진 배우님한테 질문이 있습니다. 이번 배역의 경우 평소 청순가련한 이미지만 맡아 오시다가 이미지 변신을 꾀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계기가 있으신가요?”
나올 만한 질문이었다.
“이예진 씨.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질문을 기다렸는데 이야기해 주셨네요. 일단 평소에 항상 제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저번 가을동화하면서 이신형 감독님 식구들과 회식 자리에서 마녀 대본 이야기가 나와 그때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내 이예진이 나와 눈을 맞추더니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 참석해주신 김현진 매니저님의 도움이 컸는데요. 그때 회식 자리에 마녀 대본을 가져오신 게 김현진 매니저님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원래는 할 생각이 없으셨나요?”
이예진이 잠깐 멈칫하자 질문했던 기자가 재차 질문했다.
“네, 맞아요. 원래 저는 이미지에 맞지 않아 드라마를 고사했었어요. 그런데 김현진 매니저가 방송국에서 마녀 제작 PD님과 만나 대본을 받았다가 회식 자리에 가지고 오셔서 얼결에 이야기가 나왔어요. 가을동화 식구들도 보고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기도 했고 이미지 변신을 한번 해보고자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야기 감사합니다.”
기자들이 이예진의 시선을 따라와 나도 같이 사진을 찍어갔다.
초상권 있다고 찍지 말라고 해야 하나?
이 이후로도 기자들의 여러 질문 사항이 이어졌고 제작발표회가 진행되었다.
* * *
“감사합니다.”
짝짝짝.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의 제작발표회가 끝이 났다.
이제 회사로 돌아가면 되나.
돌아가기 전에 차태수 팀장에게 인사하러 갔다.
“고생 많으셨겠어요. 드라마 기대되네요.”
“괜찮게 나올 것 같더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어딜 가?”
나가려는 찰나에 차태수 팀장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네? 끝났으니 이예진 선배님에게 인사드리고 전 돌아가야죠.”
“너도 와.”
“관계자도 아닌 제가 회식 자리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거 말 많네. 나랑 술 마시기 싫어?”
차태수 팀장은 술을 좋아하는 듯했다.
벌써 술 마실 생각하시네.
대리 부르려고 하시나?
“그건 아닌데요. 참여할 명목이 없어서 눈치 보일 것 같아서요.”
“아, 괜찮다니까.”
“괜찮아요. 같이 가요. 제 매니저라고 하면 되죠.”
데자뷰를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