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7자매 육아일기 (3)
“작가님이 생각해도 여기에 20명 다 들어오는 건 무리 같죠?”
“그러네요.”
작가가 방을 쓱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회귀 전에 살았던 고시텔급의 방은 아니지만, 촬영팀과 우리 애들이 전부 들어오기엔 한없이 공간이 모자랐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투 베이의 빌라였다.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 부엌과 거실, 현관 그리고 화장실이 같이 있는 빌라.
오피스텔이었으면 내가 전세를 꿈꿀 수 없었겠지만, 재개발지역의 낡은 빌라라 부모님 손도 좀 벌리고 해서 싸게 구했다.
“그냥 청소만 하고 집 탐방하는 거만 하고 자리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럼 너무 그림이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림도 도화지에 그릴 수 있어야 그리죠. 여기선 그리지도 못해요.”
“그럼 현진 씨 말대로 해요.”
리얼리티팀의 계획은 애들이 내가 사는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 구경도 좀 하고 요리도 좀 간단히 해 먹는 취지였는데 그렇게 컨텐츠를 짜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이 집에 10명 이상 들어오면 움직일 공간도 없다.
“현진 씨 일단 저희는 몇 명만 남기고 철수할게요. 곧 스타즈 인원들 오죠?”
“네. 아까 연락했을 때가 30분 전이니까 이제 올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자리가 비좁으니까 설치형으로 몇 대 더 설치하는 방향으로 하고 전담 카메라를 조금 줄여야겠네요.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방은 촬영 시작하기 전날에 어느 정도 치워놨고 여기서 더 치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었다.
그러나 컨셉이 우렁각시인데 더 치우면 촬영에 쓸 그림이 아예 안 나올 듯싶어 손을 놔버렸다.
할 게 마땅히 없어 부스스한 상태로 누워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똑똑.
“여기 초인종도 없네?”
“도어락도 아니야.”
문을 열기도 전에 애들 목소리가 들려 따로 확인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재개발 예정지역이라 좀 낙후된 것뿐이지 싸고 좋아.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애들을 맞이했다.
“생각보다 넓네요.”
“우리 다 들어오니까 좁은데?”
“여긴 뭐하는 곳인고.”
애들은 집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다 들어오니 좁은 집이 더 좁아 보였다.
애들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움직이고 있으니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저희가 일일 우렁각시입니다!”
“와아!”
“제발 사고만 치지 말아줄래?”
“사고라뇨. 깔끔하게 정리해드립죠.”
“정리하는 게 아니라 해체하는 거겠지.”
좁은 집을 다 둘러보았는지 애들이 내 곁으로 우르르 몰려와 말했다.
“너네 숙소부터 정리하는 게 어때?”
“숙소는 당근 정리 잘하죠.”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응?”
내가 말하자 유미소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으나 옆에 있던 이나라가 사실 확인을 해주었다.
카메라가 돌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말도 많고 더 활발한 것 같다.
간만의 방송인데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주도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고는 깨끗하네요?”
“우리 온다니까 급하게 정리한 거 아냐?”
“난 원래 정리하면서 산다. 얘들아. 너희들이랑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줘.”
예전에 이 시기에는 애들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많이 친해졌다.
지금 나에게 열심히 태클 걸고 있는 서지영과 유미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스타즈의 일일 우렁각시! 시작하겠습니다!”
서지영이 오늘 우리 집에서 할 컨텐츠를 카메라 앞에서 소개하자 스타즈 인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은 집 사이에 촬영 사각지대를 찾아 촬영하고 있는 촬영 감독님들이 왠지 모르게 짠해 보였다.
“주방은 깨끗하고….”
“요리 안 하고. 사는 것 같아.”
오면서 역할 군을 따로 정했는지 서지영과 린은 주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자취하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요리할 바엔 배달시켜 먹는다.
요리할 땐 좋은데 치우는 게 너무 귀찮거든.
“어? 근데 이건 뭐지?”
“뭔데?”
옆방에서 무언가 발견하고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은 컴퓨터가 있는 작업실이고 소리가 난 곳은 침대와 TV가 있는 큰 방이었다.
“어! 이거 봐!”
뭘 발견하고 저렇게 놀란 건지 모르겠다.
“배우들 사인을 모아두셨네.”
귀를 쫑긋 세워 들어보니 현장 나갔을 때 틈틈이 사인 받아둔 사인 모음집을 발견한 듯싶었다.
“근데 왜 우리 건 없는 것 같지?”
어?
“여기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박혜연이 내 앞에서 킥킥 웃으며 맹랑하게 말했다.
같은 방에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박혜연과 린을 데리고 소리가 난 곳으로 이동했다.
“빠른 해명. 안 하면. 목숨 위험.”
“최후의 변론을 드리겠어요.”
들어가자마자 린이 조용히 이야기했고 이어 이나라가 눈을 빛내며 나에게 말했다.
요즘 애들이 법정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 갑작스레 취조하는 분위기가 갖춰졌다.
“현장 나갔을 때 틈틈이 사인받은 거 모아둔 건데?”
“좋아요. 근데 우리 건 왜 없어요?”
내가 왜 애들 건 안 받아뒀을까?
이전에는 받아뒀는데 그게 헷갈려서 착각했던 듯싶다.
나는 지금까지 있는 줄 알았다.
“너네가 안 줬잖아….”
“우리가 줘야 있어야 하는 걸까요? 없어도 있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사인 CD를 몇 개를 만들었을까요?”
내가 궁색한 변명을 하자 애들이 코웃음 쳤다.
이 건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게다가 순딩이로만 보이던 이나라가 맹렬히 타오르면서 물어 오는 게 제법 낯설었다.
“그래도 여기 앨범은 있네.”
“그러네. 앨범만 있네.”
애들의 칼날 같은 이야기에 한겨울인데도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그럼, 거기에다 사인해줘.”
“싫은데요.”
“저희가 왜요.”
“필요 없으시잖아요.”
“왜요? 왜요?”
내가 기회를 봐서 말하자 애들이 경멸 어린 눈초리로 싸늘하게 대했다.
물론 진심은 아닐 거고 방송이다 보니 이런 소스를 놓치기 아까워 더 과장되게 하는 것일 테지만….
현재 상황이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내 잘못이 맞으니까.
애들이 섭섭해한다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제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이번만 봐 드리는 거예요.”
눈물 나게 고마운 유미소의 한마디였다.
애들에게 펜을 찾아 가져다주니 애들이 조심조심 돌아가면서 사인을 해줬다.
팬들이 보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을 정도로 부러운 광경이겠지만 나에게는 조금 호러틱했다.
꾹꾹 눌러 쓰는 본인들 사인 외에 적어둔 한마디가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았기 때문이었다.
[항상 고생하는 우리 푸우♡-유미소]
[고마워요. S2-린]
[오빠 실망이에요!-혜연]
[먹을 거 주면 용서해 줄게요-희진]
[묵묵히 지켜봐 주는 우리 현진 오빠. 감사합니다–나라]
[바보-서지영]
[압으로도 파이팅이에요.-유코]
“음, 고맙다.”
“갑자기 분위기 어쩔.”
그냥 자신들 사인만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고픈 말도 같이 적어서 주었다.
애들의 마음을 보니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서지영이 분위기를 잡았다.
“우리 이제 뭐 하지?”
“근데 생각보다 집이 깔끔해서 손댈 게 없어.”
“일단 점심이니까 여기에서 뭐 먹기엔 좀 그렇고 나가서 먹자.”
얼추 우리 집 탐방은 끝난 듯싶으니 동네 탐방하면서 점심 먹이고 장 보러 가면 될 듯싶었다.
“어디 먹을 곳 있어요?”
“나도 여기 피플은 아니긴 한데 괜찮은 곳이 있다고 해서.”
“좋아요. 그럼, 거기로 렛츠고!”
‘지금 뭐 해’ 팀이랑도 이야기했던 내용이고 가는 곳은 어제 이야기를 해놨기 때문에 몸만 가면 됐다.
결제도 방송이니까 법인카드로 쓱싹 긁으면 된다.
“고기도 있어요?”
“스테이크 집이야.”
“야호!”
“고기다! 고기!”
먹을 생각에 애들 텐션이 확 올라갔다.
아이돌들이 방송할 때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니다.
평소에도 그럭저럭 먹기는 하지만 식단관리를 하면서 먹기 때문에 방송에서 먹을 게 나오면 전투적으로 먹는다.
게다가 활동기에 접어들면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음식이 많다.
그래서 방송 핑계를 대고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는 거다.
지금이 활동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편하게 먹지는 못하기에 이 기회에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자 계획을 짰다.
“근데 저희 올 때 대중교통으로 왔는데 어떻게 가요?”
“이제 계속 움직여야 해서 차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잠깐 회사 들렀다 올 테니 내가 알려준 위치로 가 있을래?”
“그냥 여기 있다가 같이 움직이면 안 돼요?”
“그래도 되긴 하는데….”
이나라가 이동수단을 어떻게 하는지 물어왔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차를 미리 회사에서 가져왔어야 했는데.
“저희는 여기 있을 테니 갔다 오세요.”
“너희만 여기 두고 가는 게 좀 걸려서 그래.”
“조금 둘러보고 청소라도 더 해보죠, 뭐.”
서지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게 조금 수상했다.
뭔가 불안한데.
나오면서 스타즈 애들을 보았을 때는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나는 근처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고 헥사곤으로 출발했다.
* * *
“갔어?”
“갔지?”
“일단 켜봐.”
김현진을 배웅한 애들이 작업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우리 매니저님은 평소에 컴퓨터로 무얼 하고 사시나~?”
“우리 오빠는 꼭꼭 숨겨두던데.”
서지영이 다소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박혜연도 컴퓨터 안에 있는 내용이 궁금한지 서지영의 말에 동조하면서 서지영 옆으로 왔다.
“이러다 방송 못 나가는 거 아냐?”
신희진이 카메라 감독을 보고 물어보았다.
이내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를 좌우로 흔드는 거로 대답을 대신 해줬다.
“이거 비밀번호 걸려 있어.”
“일단 다 해봐.”
“현진 오빠 생일 아는 사람?”
“그러고 보니 우리가 생일을 알던가?”
“그러네…?”
스타즈의 은밀한 검색은 손쉽게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야호!”
그러나 환호성을 지르는 신희진의 말에 애들이 컴퓨터 앞으로 다가왔다.
“뚫었어?”
“비밀번호 뭐였어요? 언니?”
“1234567890이던데? 왤케 단순해?”
“일단 야한 거부터 있나 찾아봐.”
호기심 가득한 일곱 명의 아이들은 김현진의 컴퓨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 안녕하세요! 반짝반짝 빛나는 무지갯빛 스타즈입니다!
“우리 데뷔 영상이네?”
컴퓨터를 잡은 신희진이 무언가를 찾아낸 듯 들어가서 열어 본 파일은 본인들의 데뷔 쇼케이스였다.
“이것저것 모아둔 거 같은데? 매니저들은 다 이렇게 모니터링 하는구나….”
“사인 없다고 섭섭했는데 조금은 감동?”
모니터를 보던 유미소와 서지영이 나직이 이야기했다.
“이거 봐봐. 미소 언니 눈 돌아간 거 겁나 웃겨.”
“야! 서지영! 넌 또 어떻고!”
애들은 그렇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현관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얘들아 나와. 갔다 왔어.”
“네!”
김현진의 말에 애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어나 나왔다.
* * *
“와 개맛!”
“표준어. 표준어 써.”
“아, 맞네. 미안 미안.”
“언니. 너무 그러면 더 이상해.”
“모르겠다. 맘대로 해.”
서지영이 비방용 언어를 쓰는 걸 이나라가 잡아주었다.
그러나 서지영은 개의치 않아 했고 오히려 유미소는 이나라한테 항의했다.
애들은 전체적으로 식사를 만족스럽게 끝낸 모습이었다.
우리끼리 식사하거나 이동하면 팬들의 눈도 있고 해서 조금 까다로운데 방송 카메라가 있으면 생각보다 더 자유롭다.
뭘 하든, ‘방송이니까’로 용서가 된다.
“이제 뭐 해요?”
“장 보러 가야지.”
“필요한 거 다 사도 되죠?”
만족스럽게 배를 만지던 신희진이 다음 일정을 물어왔다.
장 보러 간다고 하니 신희진이 또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일단은? 근데 너희끼리 장 보지 않아?”
“잘 안 봐요.”
“마트는 안 가고 편의점은 자주 가죠.”
보통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요청하면 사주는 편이니까 사실 애들이 장 보러 나갈 필요는 없다.
“근데 내가 꼭 저녁을 해줘야 할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만고불변의 진리라구요!”
그렇지만 내가 요리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어서 빠져나갈 궁리로 애들에게 이야기하니 박혜연과 유미소의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다른 애들도 이에 동조했고.
“너희 우리 집 와서 해준 거 없잖아.”
“사인해 드렸잖아요. 얼마나 큰데요?”
“제가 바로 요리해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이나라의 논리정연한 말에 백기를 들었다.
사인 이야기 한 방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애들한테 끌려다닐 팔자인 것 같다.
* * *
마트에서 우리가 장을 보고 있어서 다소 소란이 있었지만, 마트 측에 양해를 구한 것도 있고 방송용 카메라가 몇 대 돌아다니다 보니 일반 사람들도 구경만 할 뿐 큰 소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계산이었다.
“네? 얼마요?”
“52만 7천 500원이에요. 봉투는 별도로 50원 추가되는데 봉투 드릴까요?”
“네, 주세요.”
많이 담은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 많이 나왔나?
“예상보다 적게 나왔는데?”
“난 저거 두 배는 나올 줄 알았어.”
백만 원을 점치는 애들을 보고 소름 돋았다.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게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집어야 이런 금액이 나온 걸까.
항상 어머니들이 마트에 올 때마다 곡소리 내시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물건 몇 개 안 집은 것 같은데 이런 금액이면 곡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잖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