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돌아온 새해, 쉬어가기 아니 일하기 (1)
“이제 졸업한 학생이여? 여기 정말 싸게 나온 거야. 잘 선택한겨.”
왜 부동산에서 하는 말들은 항상 똑같은지 모르겠다.
1월 1일은 정말 집에만 있었다.
왜 괜히 나가기 싫고 집에만 있고 싶은 날. 그런 날이 바로 어제였던 것 같다.
오늘은 바빠서 못 구했던 방도 구하고 조만간 아이돌 체육 대회 관련해서 나올 도시락 건도 해결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회귀 전에는 정말 혼자의 힘으로 구해보자 해서 고시텔 수준의 방으로 얻었는데, 이번에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을 구했다. 원룸보다 컸지만 재개발지역에 노후 된 집이라 싸게 나온 전세였다.
예전에 살던 고시텔 정도의 집보다 회사와 거리가 조금 더 멀어졌지만 그래도 한두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고 20분 거리면 충분하다.
“언제 들어오실 건가요?”
“어차피 방이 비어 있으니까 들어가는 날짜는 여유 있게 잡아도 상관없죠?”
“그렇긴 한데. 빨리 들어오시는 게 좋죠.”
느릿한 말투로 기품 있게 이야기하는 집주인이었다.
“지금 당장 정하긴 힘들고 좀 나중에 알려드려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럼.”
“고생하세요.”
집주인이랑 대략 이야기를 끝냈다.
오늘 바로 계약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들어가는 집이 아무래도 재개발지역이다 보니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사둔 사람 같았다.
비어 있는 집보단 그래도 사람이 사는 게 낫지.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일 중 하나를 처리했으니 이제는 아육대에서 팬들 먹일 도시락을 해결해야 할 때다.
아이돌 체육 대회. 통칭 아육대.
언제부턴가 명절 고유 프로그램이 되었다.
팬들은 정말 싫어하는 프로그램이지만 방송사나 아이돌이나 굳이 안 할 필요는 없는 프로그램이다.
시청률이 보장되는데 안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여기서 아이돌끼리 눈맞는 경우나 다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팬들이 싫어한다.
그리고 방송사들이 여기에 할당하는 팬석 수로 우리 애들이 얼마나 잘나가는지 확인도 가능하다.
방송사 자체 통계로 응원해주는 팬석을 나누기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회사에서 나가는 그룹은 스타즈 애들밖에 없다. 나머지 그룹들은 콘서트 투어 준비로 바빠서 다 빠졌다.
예전에 나갈 때는 논란이 터진 박혜연과 유코 빼고 다 나갔었는데 회사 단독으로 나가서 그런지 푸시는 그럭저럭 받았다.
단지 도시락이 문제였지만.
도시락도 생각해보면 그 자체로는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다만 배달할 때 조금 격하게 왔는지 도착할 때 너무 개밥처럼 보였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지잉. 지잉. 지잉. 지잉.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길래 확인해 보니 애들이 내일 만나서 뭐할지 정하고 있었다.
나만 일할 수 없지. 내일 너희도 일할 것이다.
[나라나라 : 내일 양궁카페랑 볼링장이랑 또 어디?]
[^-^ : 놀이공원은 안 되겠지?]
[临 : 심심해.]
[댕댕 : 유코 언니는?]
[临 : 자.]
[희지니 : 사진]
너무 핸드폰이 울려 들어가서 알림을 꺼놓을 목적으로 앱을 확인했는데 깜짝 놀랐다.
안 읽은 메시지가 벌써 300개가 넘어 300+로 되어 있었다.
다 읽기엔 무리니 그냥 알림만 꺼야겠다.
알림을 꺼놓고 나서 아육대에 필요한 도시락을 생각해 봤다.
예전에 도시락을 나름 준비한다고 해서 했는데 팬들에게는 성에 안 찼는지 이슈가 됐었다.
팬들끼리 특히나 도시락 가지고 비교를 자주 한다.
어디 그룹은 도시락이 어땠고 여기는 어떻고…. 이게 생각보다 스트레스다.
도시락은 사실 내가 업체를 구하지 않아도 회사에서 구할 때 다른 업체를 건의하면 되지만, 놓치기 아까운 소스라 이렇게 인연을 맺어두면 좋을 것 같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도시락을 주문하려는 곳은 한국에서는 그렇게까지 뜨거운 곳이 아니었다.
나중에 미국 가서 터진 제품이었다.
* * *
딸랑-
“사장님 계세요?”
“네. 갑니다!”
“안녕하세요.”
“네. 뭐로 드릴까요?”
안에 들어가자 느낀 것은 인테리어가 깔끔한 가게라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크게 목소리 내어 이야기하자 안에서 의욕적인 사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단체 주문을 할 예정인데요.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몇 개나 주문하시는데요?”
“한… 100개? 110개 정도요.”
내가 생각보다 많은 수의 도시락을 이야기하자 사장님이 눈이 동그래졌다.
예전에는 80석을 확보받았는데 이번에도 똑같이 줄지는 모르겠다.
출연과 나갈 종목만 확정 지었지 구체적인 건 아직 회사로 넘어오지 않았다.
“하하하, 양이 상당히 많으시네요. 어디 워크샵 하시나 봐요?”
“워크샵이라면 워크샵이긴 한데요. 점심, 저녁으로 둘 다 가능할까요?”
“그 정도 양이면 안 되도 된다고 해야죠. 날짜가 언제죠?”
게다가 저녁까지 물어보자 사장님이 이게 웬 봉이지 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날짜는 일주일 뒤 수요일이요. 가능할까요?”
“아유, 아까부터 가능하시냐고 물으시는데 불가능해도 된다고 해야 한다니까요.”
“일단 제가 확정적으로 오더를 넣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고 조금 더 거쳐봐야 하는데 지금은 사전 조사라고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희는 일단 무조건 가능합니다. 전날에만 알려주시는 게 아니면 됩니다.”
바로 주문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자 사장님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노쇼로 생각보다 고통을 많이 받으신 것 같다.
이 가게는 생각보다 가격이 센 컵밥 집이다.
보통 컵밥이라고 하면 싼 컵밥을 생각하는데 이 집은 프리미엄 컵밥 집으로 자기 노하우를 섞은 가게다.
이 가게를 알게 된 건 예전에 TV로 인터뷰 영상을 우연히 봐서 알게 됐다.
원래는 장사를 접을 생각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미국 가서 장사를 해보자 하고 시도한 게 바로 대박이 났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맛과 신속함을 좌우명으로 해 품질은 상당히 괜찮다는 평이 많았다.
“일단 맥스 컵밥 하나만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나도 보고 듣기만 했지 먹어보질 못했으니 나도 일단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주문했다.
사장님은 내가 주문을 미루자 풀 죽어 있던 모습과 대조적으로 다시 활기차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만들었다.
“사장님. 장사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한 1년 조금 안 됐네요. 패기 있게 도전한 분야지만 호기롭게 말아 먹고 있죠. 컵밥치고는 조금 고가죠?”
“그래도 맛만 좋으면 됐죠.”
“맛은 보장합니다! 하하. 자, 다됐습니다!”
컵밥을 건네받으면서 그때 보았던 인터뷰가 오버랩되었다. 자신의 성공 비결은 빠르고 맛있는 컵밥이라는 인터뷰.
정말 빨리 나왔다.
그리고 컵밥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것이 군침이 일었다.
내가 여기를 생각해낸 것은 아육대에서 항상 나오는 말인 찬밥과 패스트푸드는 이제 질린다는 이야기를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뉴는 거의 바꾸지 않고 현지화 재료로 승부해 첫 월 매출 6천만 원 가까이 났다고 하니 맛은 보장되었다고 생각한다.
컵밥을 받아 한 숟가락 떠서 먹어보니 생각보다 확실히 맛있었다.
학생 단편 영화 촬영장에 가서 흔히 먹는 치킨 마요 도시락보다는 확실히 좋았다.
먹으면서 기회를 보고 사장님에게 말을 걸었다.
“확실히 맛있네요. 저도 추천받고 왔거든요.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비싸다고 안 먹을 것 같기도 하네요. 오히려 미국이나 유럽 같은 곳 가면 신선해서 괜찮을 것 같은데.”
“미국이요? 미국이라….”
“그냥 하는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하하.”
내가 이런 말 한마디 한다고 바로 가지는 않겠지만 나중에 제가 미국 가보라고 했었죠? 라며 다시 만날 때 생색은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사장님도 지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느끼고 있는지 다른 나라도 괜찮지 않겠냐. 라는 내 말에 고민하는 눈치였다.
내 말에 조금 더 시장 진입이 빨라질 수는 있겠다 싶었다.
고민하는 사장님을 놔두고 컵밥을 먹다 보니 배가 고팠는지 어느새 받은 컵밥을 홀라당 다 비워버렸다.
“우리야 익숙한 문화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또 다르잖아요. 배달 문화가 한국의 특징인 것처럼. 근데 그냥 하는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아뇨. 괜찮은 것 같기도 해요. 좋은 말 감사합니다.”
가게 사장님이 너무 깊게 고민하는 눈치길래 다시 한번 그 생각을 끊으려고 말을 걸었다.
“일단 정확한 주문은 조금 나중에 여기 적혀 있는 곳으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네. 거기로 연락 주십쇼!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고생하세요.”
사장님이 의욕적으로 밝게 웃었다.
역시 사람은 열정과 목적의식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것 같다.
기회를 잡냐 못 잡냐는 개인의 판단이고.
밥도 솔직히 정말 괜찮았다.
어차피 회사에서 도시락 업체 배정에 크게 관여하지는 않으니 건의해서 이쪽으로 따와야겠다.
예전에 겪었던 도시락의 난은 미리 알고 있으니 제압해야 하지 않겠나.
밖으로 나오니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이놈의 추위는 정말 적응을 못 하겠다.
* * *
애들이 좋은 취지로 휴가 중 하루를 다 같이 친목 도모로 쓰겠다고 회사에 말해왔다.
좋은 취지다. 나만 여기 없으면.
왜 난 여기에 있지.
“와! 신난다! 이렇게 맘 편하게 노는 게 얼마만이야.”
“응. 너희만.”
“이렇게 이쁘고 깜찍하고 귀여운 여자가 일곱 명이나 있는데 너무 냉철하시네요.”
차 안에서 방방 뛰는 서지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신희진이 퉁명스러운 내 대답을 듣고 포즈를 취해가면서 이야기했다.
“음, 뭔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착각이지?”
“아뇨.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부정하지 마세요.”
“진짜 팬들이 이런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애들이 점점 뻔뻔해졌다.
특히 나랑 있을 때는 그 정도가 심했다.
갑자기 3개월 전의 순수한 애들이 그리워졌다.
“팬분들은 당연히 희진 언니 말에 동의하죠. 그치, 린아?”
“나는. 노코멘트 할래.”
서지영이 잠자코 듣다가 앞에 있던 린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린에게 동의를 구하려 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막내가 최고다. 막내 만세.
“근데 팀장님은요?”
“안 오셔.”
이나라가 오늘 남진수도 오는 것 아니냐면서 물었지만 남진수가 여길 왜 오겠는가.
“와, 너무해.”
“너… 아니다.”
너희 같으면 얼마 없는 휴가 중의 하루를 일하는 데 쓰고 싶겠니.
나도 마음 같아서는 탈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들을 봐줄 사람은 한 명은 무조건 필요했기 때문에 내가 됐다.
어딜 가든 짬이 안 되면 짬 처리는 역시 막내다.
“어디부터 가요?”
“일단 밥부터 먹어야지. 너희 뭐 짜온 거 있다면서.”
“음, 그러니까… 여기요! 여기 갔다가… 다음 코스는 여기!”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모르지. 주소 톡방에 올려봐.”
유미소가 의욕적으로 알려주려고 했으나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기에 확인할 수 없었다.
톡방에 올라온 주소를 보니 무한뷔페 초밥집이었다.
“초밥집이네? 유코는 괜찮겠어? 일본이랑 비교하면 되게 별로일 것 같은데.”
“후후후, 거긴 유코가 추천한 집입니다!”
내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자 신희진이 바로 반박했다.
초밥의 본고장인 유코가 추천한 곳이면 뭐 괜찮지 싶었다.
“언제 갔었대?”
“연습생 때 애드리랑 가치 갓어요! 거기 괜차나요.”
유코도 나름 괜찮았던지 입맛을 다시면서 이야기했다.
옆에 있는 신희진은 백미러로 보니 그새 먹을 걸 상상하는 듯 눈이 풀려있었다.
“스타즈의 신년맞이 추억 쌓기 렛츠 고우!”
“고우!”
애들이 정말 의욕적이었다.
자기들끼리는 스케줄 외에 같이 놀러 가서 추억 쌓기는 힘드니까.
오죽하면 이 날씨에 돗자리 펴고 소풍을 가자고 할까.
뜯어말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애들은 놀러 가는 거지만, 나는 일하러 가는 거다.
그래서 나만 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억울해서 회사에 건의했다.
애들이랑 같이 죽자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조금 억울하지 않은가.
너희도 곧 일하게 될 것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