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다시 쓰는 새로운 역사 (3)
어비스 그룹의 리더인 이종혁이 복도로 나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나오니 웬 남자가 무릎 꿇고 있는데 이상함을 못 느낀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이재현 실장이 클린힛 매니저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잠깐 기다려 달라 하고 그를 뺀 우리 헥사곤 매니저들은 어비스의 대기실에 들어와 있었다.
“굳이 우리가 거기 사정 봐줘 가면서 양보해줄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이게 12월 들어서부터 계속 요청했던 일이란 게 신기하네. 왜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
“너희가 알 필요는 없는 문제였으니까.”
어비스 멤버들이 하나둘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의견을 낸 사람은 그룹 내 리드보컬인 윤진혁이었고 이재현 실장에게 의아함을 제시한 사람은 메인 래퍼인 제이였다.
“와, 사람 일은 참 모르는 거구나. 특히 이 바닥은. 우리가 거대 기획사 누르고 이렇게까지 컸다는 게 참 감개무량하네.”
그룹의 막내인 박성운이 지금 상황이 몹시도 신기한 듯 이야기했다.
짝!
“일단 정리를 해볼게. 우리가 연말 무대 엔딩을 맡게 되었는데 하늘 회사와 우리 회사와 견해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가 엔딩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클린힛 선배님들 데뷔 때부터 따라다니던 매니저분이 엔딩 양보해 달라고 우리한테 요청한 상황이라는 거지?”
어수선한 분위기를 리더인 이종혁이 손뼉을 치며 환기했고 이내 상황을 요목조목 정리하기 시작했다.
“개요는 일단 그게 맞아.”
“하늘… 그러니까, 대형기획사 말고는 엔딩을 처음으로 빼앗기는 거라 의미가 남달라서 클린힛 선배님들이 하늘 대표님한테 눈 밖에 날 상황이란 거고.”
이재현 실장과 이종혁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확실히 리더란 자리는 티가 나는 것 같다.
특히 상황을 쉽게 정리하는 것은 이종혁이나 이나라나 다를 게 없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너희가 알게 됐으니까 너희 의견을 존중해야겠지. 너희가 이런 알력 관계까지는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이종혁이 자신의 멤버들을 바라보며 말했고 이재현 실장도 이어서 곤란한 얼굴로 멤버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섭한데. 형, 우리 얼굴에 내가 금칠하는 거지만 우리 회사 이렇게 크게 된 게 결국 우리 전부가 함께 다 잘해서 그런 거잖아. 알 건 알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미안하고. 괜히 신경 쓰일까 봐 그랬지.”
가만히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있던 메인 보컬 곽영현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난 양보해서 받아낼 수 있는 게 있으면 양보할래.”
“왜? 우리가 처음으로 대형기획사 누르고 엔딩 서는 건데. 아깝지 않나?”
제이가 곽영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상징적이긴 하지. 이런 말 하기 내 입으로 하기 좀 그렇긴 한데 그렇게 안 해도 우리가 지금 제일 잘 나가는 건 다 알잖아. 그거 줘버리고 실리적으로 얻어 올 수 있다면 그게 더 낫지.”
“나도 차라리 그게 나은 것 같은데. 언제까지고 우리가 잘 나가리라는 보장도 없고. 이거 양보해주고 회사끼리 치킨게임 좀 안 하면 안 되나? 우리야 상관없지만, 회사 후속 그룹들이 너무 치명타일 거 같던데.”
“이번에도 스타즈 데뷔하고 나서 하늘이랑 한울이랑 짜고 친 듯이 회사 주력 남돌 여돌 같이 컴백해서 스타즈 찍어 눌렀잖아.”
제이의 말에 곽영현이 제이를 바라보며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던 박성운도 곽영현의 말에 동의하는 모양새였다.
중간에 윤진혁이 스타즈 이야기하길래 내심 신기했다.
어비스 애들이 생각보다 회사 일에 깊은 관심이 있는 듯했다.
회사 매니저들도 가만히 어비스 멤버들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스타즈가 우리 회사로 데뷔하긴 했어도 나중에 가면 우리 식구도 아닌데 너무 한다는 생각은 들더라.”
“맞아. 우리 회사 소속이긴 해도 어차피 다른 기획사로 흩어질 텐데 그것도 악착같이 성장 막는 거 보면 우리가 많이 위협적이긴 한가 봐. 4대 기획사끼리는 서로 맞불 잘 안 놓던데.”
“중간에 팬덤 이탈자 걱정해서 초기에 진압하려는 거겠지.”
“너희 매니지먼트 차릴 거냐? 왜 이렇게 시장 분석을 해.”
“오히려 이런 건 아이돌들이 더 민감하거든요? 우리 정말 힘들게 컸으니까. 솔직히 이렇게 큰 것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멤버들이 현 상황을 주제로 토론하기 시작하자 이재현 실장이 끼어들어 말했다.
대화하는 수준이 순간 회사 전략 회의실인 줄 알았다.
“뭐, 그리고 회사 키우는 맛이 재밌어서요. 처음에는 우리밖에 없던 회사가 이제는 여러 연예인이 소속된 회사가 됐으니까요. 근데 우리라고 언제까지 정상에 있을 수도 없고 언젠가는 내려가겠죠. 뒤를 받쳐줄 후속 그룹이 없으면 결국 하락세는 뻔하잖아요. 우리가 언제까지고 잘 나간다는 보장도 없고. 마음은 10년이고 20년이고 위에 있고 싶은데 말이야.”
“너희 여기 뼈 묻을 거야?”
이종혁이 이재현 실장의 말에 답변했다.
보통은 자기 앞길만 걱정하는 게 정상인데 신기했다.
회사를 걱정하는 아이돌이라.
“뭐야. 재계약 안 할 거였어요? 그때 되면 단물 다 빠지니까 팽하겠다?”
“아니 뭐….”
박성운도 말하는 걸 보면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굉장히 강한 것 같았다.
그만큼 정인수 대표가 애들에게 잘해줘서인지. 아니면 이렇게 키워준 회사에 대한 애사심인지는 모르겠다.
“삼촌한테 말해야겠네. 이거 실망인데요, 형.”
“양보할 테니 받을 건 받아와요. 회사에 이득 되는 거로. 이 정도 협상도 못 하면 딴 곳 가야지 뭐. 안 그러냐 애들아?”
곽영현이 웃으며 이재현 실장을 나무랐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처음엔 양보를 반대하는 멤버들도 있었으나, 점차 분위기가 양보하고 실리를 취하자는 의견으로 쏠리는 듯했다.
이종혁이 그렇게 주도하고 있었고.
회사에 이득이 되는 방향이면 오케이인 듯했다.
“맞아. 우리가 어디 가서 이런 푸대접을 받겠어.”
“여기 말곤 안 그럴 거 같은데.”
“대표님 들으면 좋아하시겠는데?”
이렇게 어비스 멤버들과 매니저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을 본 것은 처음이다.
이 장면을 보고 느껴지는 건 서로에게 믿음이 굳건하며 격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냥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팀들과 상반된 분위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괴리감이 컸다.
이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는 나와 남진수 그리고 넘버6 매니저 두 명은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병풍이었다.
“아, 취소. 취소.”
“이건 못 들은 거로.”
“어쨌든 실리적으로 취할 건 취했으면 좋겠어. 그것도 있지만 난 밖에 있는 분이 한 행동이 좀 더 와닿기도 했어. 클린힛 선배님들도 매니저 복이 있네.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그러게. 거기서 무릎 꿇을 정도면… 와, 아찔하네. 난 못해.”
“그 행동은 조금 감동인 듯.”
다시 화제를 전환해서 클린힛 매니저 이야기로 돌아왔다.
곽영현이 다시금 이야기를 꺼냈고 제이가 동조해줬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구나.
“예전에 PD 멱살 잡으러 갔던 삼촌 얼굴 떠오르네.”
“아, 그때 그거? 나 그때 연예계 생활 접을 줄 알았잖아. 아직도 기억나.”
“오히려 그게 전화위복이 된 계기가 됐긴 했는데… 누가 PD 멱살을 잡겠어?”
이종혁이 예전에 대표실에서 정인수 대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윤진혁도 그때 생각에 아찔했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이야기하고 매니지먼트끼리 조율할게. 미안하다.”
“미안할 게 뭐 있어. 됐어. 의미 부여하지 마.”
“쉬어. 우린 나갈게.”
이재현 실장이 멋쩍게 이야기하자 이종혁이 손을 내저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결국 양보는 하되 회사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된 것 같다.
엔딩에 대해서는 어비스 멤버들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고.
그래도 명예욕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릇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상에 있어서 여유로운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던 걸까.
내 생각에는 둘 다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르게 의견이 종합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헥사곤이 아무 소리 못 할 정도로 커져 있다면 하늘 대표도 뭐라 하지 못할 텐데 아직은 대형기획사의 그림자 뿌리가 깊은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견제를 일방적으로 받는 느낌이랄까.
예전에 내가 생각했던 게 틀렸던 건 아닌 것 같다.
어비스 애들도 느끼고 있는 문제였으니까.
우리 애들이 급격하고 빠르게 망가진 건 어느 정도 견제의 일환이 맞는 듯했다.
어비스 애들을 제외하고 모두 우르르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이재현 실장은 밖에서 기다리던 매니저에게 다가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며 숨 가쁘게 지켜보기만 했던 광경에 대해 의견을 하나둘 내놓기 시작했다.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달라.”
“스태프나 아티스트나 신뢰가 굳건하네요.”
“저게 좋은 현상이지. 우리는 너무 때 묻었어.”
남진수와 김병수 팀장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전 처음 맡았던 애들한테 데이고 나니까 이제는 쉽게 정을 못 주겠더라고요.”
“그런 경험 없는 매니저 있겠어? 다 한 번씩은 겪고 나면 사무적으로 변하는 거지. 상처가 크니까.”
이야기하고 있던 남진수와 김병수 팀장은 한 번씩 겪어본 듯했다.
둘 다 씁쓸하게 웃으며 아련한 눈을 하고 있었다.
“너도 임마. 운 좋게 첫 담당에 애들이 괜찮아서 그렇지. 아니, 같이 있는 기간이 짧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네. 너도 나중에 네 팀이나 담당 꾸릴 때 잘 생각해야 해. 과연 이 사람은 끝까지 나와 함께할까?”
남진수가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나로 바꾸어 말했다.
“먼저 마음을 열면 상대도 같이 열지 않을까요?”
“여기서 먼저 마음 여는 것만큼 미련한 게 없어. 언제까지고 같이 갈 것 같지? 한순간이다.”
“운이 좋아서 몇 년이고 같이할 수도 있겠지. 근데 생각보다 몇 없다.”
내가 말을 하자 김병수 팀장은 여전히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진수도 김병수 팀장의 말에 동조했다.
이 이야기는 이진성 실장에게도 들었던 소리 같다.
팀장급 정도 되면 정말 다 한결같이 하는 소리인 듯했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 같다.
김병수 팀장의 말을 끝으로 모두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우리는 우리가 맡은 팀으로 이동하자고. 이제.”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김병수 팀장의 말에 나와 남진수는 인사를 하고 스타즈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희진 언니. 저리 가줄래?”
“왜. 심심하단 말이야.”
대기실에 와서 애들을 보면서 생각의 정리를 끝냈다.
항상 내가 맡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러면 알아줄 것이다.
여기의 전제 조건은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올 사람인가 아닌가를 내가 판단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판단해서 데이면 그건 내 역량 부족인 거고. 난 내가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에 썼던 역사는 아무것도 안 해서 후회했으니 이번에는 모든 걸 던져보고 후회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즈만 다시 쓰는 역사가 아니라 나 또한 다시 새롭게 쓰는 역사다.
지금도 아주 새롭게 또 더 좋게 쓰이고 있었고.
똑. 똑.
“스타즈 최종 리허설 스탠바이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얘들아, 준비하자.”
“네.”
방송국 스태프가 와서 준비해 달라며 일렀다.
이내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핸드폰을 하면서 기다리던 애들이 기지개를 켜며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도 양손으로 뺨을 두어 번 가볍게 치고 일어났다.
일단 무거운 생각은 접어두고 당장 할 일에 집중해야겠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눈앞에 보고 겪어서 그런지 잡생각이 많아졌지만, 요지는 하나다.
내가 잘하면 되는 것. 그뿐이다.
올해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러 나도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현진아! 안 오냐?”
“네. 갑니다!”
남진수가 나를 독촉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 빼고 다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이내 나는 발을 빠르게 놀려 따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