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다시 쓰는 새로운 역사 (2)
“야! 서지영! 가만히 안 있을래?”
“나라 언니는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너한테만 뭐라 하는 게 아니라 너만 튀어서 그러는 거야. 바보야.”
“오호, 혜연이가 많이 컸네.”
우리 애들은 오늘도 아주 평범하게 대기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애들이 눈앞에서 활동적으로 놀고 있는데 내 관심은 오로지 주차장에서의 일이 아른거렸다.
하늘은 우리나라에서 항상 한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기획사다. 하늘, PM, 한울. 맥시멈 이렇게 4대 기획사라고 부른다.
우리 헥사곤의 경우 어비스 단일 그룹으로 단기간에 확 큰 회사기 때문에 4대 기획사에 비하면 아직은 성장 중인 중형 기획사다.
물론 성장에는 담연의 힘도 컸다.
그렇지만 지금 하락세를 타고 있는 하늘, PM은 아마 금방 따라잡을 거로 생각한다.
나도 연예계의 기획사 역학 구도를 처음 알았을 때는 4대 기획사가 위에서 안 내려오고 계속 해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후속 그룹들이 족족 망하다 보니 휘청거리고 있는 게 이제 눈에 보였다.
한울의 경우 일본 시장과 아시아권 시장을 너무나도 잘 공략해서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했다.
맥시멈은 꾸준히 평균은 했다.
하늘 기획사가 엔딩 무대에 집착하는 게 이해가 안 갔지만 남진수가 예전에 했던 말처럼 자존심일까.
앞에서 한껏 화려하게 입은 스타즈 애들이 자기 모습에 놀라면서 놀고 있는 걸 보다가 남진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팀장님. 우리 회사는 사람들이 언제쯤 대형기획사라고 이야기할까요?”
“4대 기획사가 너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아직 사람들은 끼우지는 않았지만 조만간인 것 같은데. 우리 회사도 전투적으로 투자하고 영입하고 있으니까.”
“영원할 줄 알았던 4대 기획사들도 무너지네요.”
“신선함이 없으면 귀신같이 도태되거든, 여기는. 사람들은 항상 신선함에 목말라하니까.”
남진수도 업계 연차가 좀 된다.
평소에는 잔망스럽고 말 많은 사람인 줄 알았으나 지금 진지한 얼굴로 시장 분석을 하는 모습을 보니 짬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니 왠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남진수의 말처럼 생각보다 냉정한 시장이 연예계 시장이다.
단지 대형기획사는 월등히 넓은 풀로 인해 조금 더 쉽게 연예인을 포장하고 상품화할 뿐.
“그렇게 보면 정인수 대표님이 참 대단하네요.”
“그렇지. 나도 참 본받고 싶은 분이야. 일각에서는 어비스 애들이 워낙 재능이 출중해서 떴다고 그러지만 사실 그걸 기획하고 키운 게 난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아무리 속이 좋아도 겉을 까봐야 하는데 대표님은 어비스라는 그룹을 대중들이 겉 포장지를 까서 볼 수 있게 만들었잖아. 그리고 그걸로 번 돈으로 투자한 영화나 드라마도 꽤 재미 봤고. 담연이랑 연계도 그렇고.”
이게 참 어려운 문제다.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봐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봐주게끔 만드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걸 위해 매니지먼트가 있는 거고.
“오빠! 저희 이거 단체 사진 좀 찍어 주세요.”
이나라가 나를 부르며 손짓했다. 이미 벌써 다 같이 모여서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키가 작은 유코에게 머리를 올려둔 유미소.
좌 박혜연 우 서지영의 팔짱을 끼고 있는 신희진.
뾰로통한 표정의 린. 그리고 자신감 있게 상체를 한껏 치켜세운 이나라.
의상 자체도 화려해서 그런지 확실히 포즈만 취해도 태가 났다.
연말이나 시상식 아니면 보기 힘든 의상들이니까.
“찍을게. 하나. 둘. 셋.”
찰-칵.
지-잉.
폴라로이드 사진은 즉석에서 바로 나오는 게 참 좋다.
필름이 비싸서 흠이지.
“하나 더요. 하나 더.”
“우리 엽사 하나 찍자. 얼굴 구겨서.”
“그럴까?”
신희진이 엽기사진을 찍자고 이야기했는데 애들도 한껏 동조해서 각자 어떻게 할지 정하고 있었다.
“준비 끝났어요. 다시 찍어 주세요!”
“알았어. 찍을게.”
말을 하자 애들이 한껏 포즈를 취했는데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광경인지.
꼴뚜기와 오징어 그리고 문어. 이렇게 세 종류의 어패류가 일곱 마리 있었다.
얼굴을 막 쓰면 아이돌도 역시 무너지긴 하는구나.
“크흡.”
“아, 웃지 말고요!”
“웃긴 걸 어떻게 안 웃어? 찍는다. 하나. 둘. 셋!”
유미소가 웃지 말라고 미간을 찡그리며 이야기하는데 왜 이렇게 귀여운지.
그리고 내가 찍자마자 우르르 와서 나한테서 사진을 빠르게 강탈해갔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고 서지영이랑 박혜연한테 타박도 들었다.
아니 그럼 나한테 찍어달라고 하지 말던가.
“네, 네. 아 거기로 오라고요? 알겠습니다. 네.”
남진수는 내가 사진 찍을 동안 전화를 받고 있었던 듯했는데 누가 부른 듯한 전화였다.
지금 여기에서 남진수를 부를 사람은 같은 소속 어비스팀이거나 넘버6팀밖에 없었다.
“현진아. 잠깐 나가자.”
“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나요?”
“최종 리허설 들어가기 전에 우리 회사 매니저 모임 잠깐 갖자는데? 이렇게 한곳에 모일 때 말고는 회사에서 서로 얼굴 보기 힘드니까 한번 보재.”
남진수가 평탄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같은 회사 소속이지만 다른 팀 매니저들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각자 스케줄이 다 다르기 때문에 볼일이 거의 없다.
“아, 네. 알겠습니다.”
“얘들아. 적당히 놀고 있어. 나랑 현진이는 잠깐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네~”
애들은 우리가 나가는 게 별로 신경 쓰이는 일도 아닌지 자기 할 일을 했다.
자기 할 일이라고 해봐야 서로 사진 찍어 주면서 노는 것뿐이었지만.
그렇게 애들을 내버려 두고 남진수를 따라갔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곳에 도착해보니 어비스팀 실장인 이재현과 팀장인 이서인.
그리고 모르는 사람 두 명이 있었다.
아마도 넘버6 쪽 매니저팀인 것 같다.
“어. 왔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이야, 진짜 얼굴 보기 힘드네. 저번 음악 방송 때 보고 두 달 만이냐?”
“네. 그 정도 된 것 같아요.”
남진수가 먼저 어비스 실장 이재현에게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이재현도 반가운지 남진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반가워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요즘 우리 회사에서 제일 핫한 막둥이 아니냐.”
“쟤가 걔야? 매니저 처음인데 처음 같지 않고 노련하다는 걔? 저번에 차태수 팀장 만났을 때 쟤 이야기 나왔는데 쟤 매니저 3년 차는 될 거라고 하던데?”
이재현이 나를 아는 척하면서 반갑게 웃어주었고 옆에 있던 모르는 얼굴의 사람이 나를 아는 척했다.
이재현 실장은 얼굴을 몇 번 봐서 아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영업하냐? 우리가 배워야겠는데. 난 넘버6 맡고 있는 김병수 팀장이야. 여기 옆은 로드 김우진. 우리 서로 처음 보지?”
“아닙니다. 다 운이 좋았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스타즈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병수 팀장과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 내 얼굴에 금칠하기 시작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 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되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 같았다.
옆에 있던 김우진 매니저는 담담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운도 계속되면 실력인데. 어디 정보처 있냐? 좀 알려주라. 나도 좀 써먹게.”
“너는 콘서트 마무리나 잘 지어야지 뭔 영업을 생각하고 있냐?”
“콘서트 끝나면 이제 런칭 할 걸그룹 맡을 거 같은데 저도 배워놔야죠. 참, 이 실장님은 잘 계시냐?”
이재현 실장이 어이없다는 듯 김병수 팀장을 바라보며 나무랐다.
그 모습을 보니 이재현 실장과 김병수 팀장은 서로 꽤 친근해 보였다.
말도 편하게 하는 거 보니 교류가 잦았던 듯했다.
나는 새로운 분위기가 적응이 안 돼서 뻘쭘하게 이 상황을 지켜봤다.
“네, 잘 계세요. 근데 현장 쪽은 손 떼시고 다른 업무 보시는 것 같은데 아시는 거 있으세요?”
“아마 기획부로 넘어갈 거 같던데. 이 실장.”
“아하.”
남진수가 김병수 팀장의 말을 대답하며 이재현 실장에게 평소 궁금했던 이진성 실장의 행방을 물었다.
“지금 업무는 너랑 쟤랑 같이 두 명이 스타즈 보는 거지?”
“네.”
“스타즈 졸업시키고 나면 진수도 실장 달겠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남진수가 실장으로 올라갈 것 같았다.
회사가 공격적으로 연예인들을 영입하면서 매니저팀 덩치도 같이 커지는 중이었다.
“진수도 이제 실장 달 때 됐지.”
“막내는 애들 졸업하면 어디 가냐?”
“아마 배우 맡지 않을까요? 연영과 출신이지 너?”
곁에 있던 어비스팀 팀장인 이서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승기가 얘 달라고 한다던데?”
“근데 배우는 작품 들어갈 때 빼곤 여유 있잖아. 바로 팀장 달고 여럿 맡으려나? 지금까지 하는 거 봐선 로드로만 돌리기엔 아까운데.”
“팀장 달면 고속 승진이긴 하겠네. 근데 영업을 생각보다 잘해 와서 올라갈 거 같기도? 실적 좋은 편 아닌가?”
모임이 왜 내 청문회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무 뻘쭘했다.
물론 내 능력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거니 그렇게 기분 상할 일은 없었지만 묘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회자되지도 않았고 일상이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타듯 흘러갔으니까.
그렇게 우리 회사 소속 매니저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낯이 익은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주차장에서 뺨을 맞은 그 매니저였다.
결연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오더니 이재현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너무나도 결연한 표정인지라 인사를 받은 이재현 실장이 조금 당황한 듯했다.
“이번에 엔딩 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이야기 끝난 거로 알고 있는데요?”
“다시 한번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곤란한데요….”
이재현 실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철-퍽
“제발 부탁드립니다. 회사 간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애들의 미래가 걸려 있어서 그렇습니다.”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거의 울듯이 부탁하는 하늘 매니저의 난데없는 행동에 모두 당황했다.
“엔딩 하나 못 했다고 미래까지 걸릴 거 있습니까? 국내에서 클린힛이 상승세라는 거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제가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이번에 대형기획사들이 엔딩을 못 잡은 게 처음일 겁니다. 이번에 어비스 그룹이 너무 잘 됐으니까요.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못 잡은 엔딩 무대로 인해 대표님 화를 다 감당해야 할 우리 애들 때문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하늘 기획사가 군대식 문화가 꽤 강한 회사라고는 알고는 있었지만….
구구절절하게 늘여놓는 하늘 매니저의 말에 본인보다는 맡은 애들을 위한다는 게 조금 느껴졌다.
그래서 경쟁 기획사지만 하늘 매니저에게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자신이 맡은 애들을 위해 자기 자존심을 다 내놓은 거니까.
누구든 무릎을 꿇어서까지 부탁을 하고 싶을까.
그것도 이런 탁 트인 공간에서.
이내 이재현 실장은 곤란한 말투로 무릎 꿇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게, 이렇게 이야기하셔도… 사정은 알겠는데요. 저희도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올해만 넘기면 애들도 이제 슬슬 자기 갈 길 갈 겁니다. 이제 막 정산받고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을 보상받기 시작했는데 대표님이 어떻게 나오실지 상상이 안 됩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으로 보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방송사 측에서 대기실을 넓은 곳으로 줘서 생각보다 구석진 곳에 있고, 우리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이 상황 자체가 다른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게 없긴 했다.
“제가 애들을 4년 동안 맡아서 키워왔습니다. 아이돌이란 직업이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다는 거 압니다. 클린힛 애들은 이제 상승세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번 무대로 인해 눈 밖에 나 소모품처럼 버려질까 두려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구구절절한 남자의 말에 우리는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남자는 목이 타는지 입술에 침을 바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은 상품성이 떨어졌다고 하면 칼같이 버리시거든요. 이미 전례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항상 대형 기획사끼리 했던 엔딩무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우리 애들한테 뭐라 할 것 같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쉴 틈 없이 이야기하는 하늘 소속 매니저였다. 이야기가 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템포 쉬고 다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왔습니다. 우리보다 더 힘든 중소기획사 그룹도 많겠지만 대형기획사 그룹치고는 정말 힘들게 커온 아이들입니다. 어비스도 밑바닥부터 시작했으니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가 깔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의 일은 단순히 회사만의 일이 아니었던 걸까?
간곡하게 비는 남자에게 이목이 쏠린 틈을 타 나는 슬그머니 어비스 대기실 문을 살짝 열었다.
내 위치가 어비스 대기실 뒤였다.
문을 연 이유는 정말 충동적이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지어낸 말인지 아닌지는 나는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이 진실이라고 믿게끔 해주었다.
저게 연기라면 매니저 말고 연기자를 해야 했다.
남자의 하는 말이 마치 돌아오기 전 우리 애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가치가 없어지면 버린다.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그리고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어비스 애들이 엔딩을 맡기로 한 상황에서 그걸 바꾸겠나.
그냥 정말 충동적이었다.
또 어비스 애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가 궁금했다.
국내 남자 아이돌 시장에서 유례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이제는 서양권을 넘보고 있는 아이돌이다.
양보를 해줄까? 아니면 그냥 자기들이 맡을까?
이제 안에 있는 어비스 애들이 소란을 듣고 어떻게 대처할지는, 무릎을 꿇으며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는 저 매니저의 운에 달렸다.
상황을 보니 지금까지는 다 회사 차원에서 커팅한 듯싶었다.
연예인이 굳이 이런 걸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셔도 저희는 권한이 없어요. 방송국에서도 뭐라 하지 않나요?”
“방송국에서는 협의만 되면 상관없다고 본부장님에게까지 허가를 받았습니다.”
“일단 일어나세요.”
“부탁 들어주시기 전까지는 안 일어날 겁니다.”
“허….”
남자는 뒤가 없다는 듯이 계속 이야기를 했고 이재현 실장은 곤란한 듯 혀를 찼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내 뒤에 있던 어비스의 대기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 있어요?”
모두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가 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