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제비가 물어온 뜻밖의 수확 (3)
“낭자! 잠깐만 서보시오! 낭자!”
모니터 화면에 린의 어깨를 붙잡는 박재영이 보였다.
“你是谁啊?(누구세요?)”
이내 화면에 새초롬한 표정으로 린이 대사를 하는 게 보였다.
리허설 때보다 더 좋아진 표정이었다.
모니터로 꿀꺽 침을 삼키는 박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무언가 홀린 표정으로 박재영이 바로 대사를 하지 않고 잠깐 멈칫하다 대사를 했다.
“어, 나는… 왕호. 我是王虎.(나는 왕호입니다.) 당 여인이오?”
“哎?(네?) 我是恩绣临.(나는 얜 시우 린입니다.)”
린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박재영을 쳐다본 후, 뒤돌아갔다.
뚜벅뚜벅 가는 린과 그 모습을 허망하게 보는 박재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활기가 가득 찬 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컷! 오케이!”
“오케이입니다!”
“오케이야? 이 감독님 이거 어디 쓰실 거예요?”
이충재 감독이 단번에 오케이라고 크게 외쳤다. 따라서 조연출도 오케이라고 밝게 말했다.
그러나 음향 감독이 이충재 감독에게 의문을 던졌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 여배우가 돌아볼 때 첫 대사 할 때 대사가 물렸어요.”
“소리 난 게 없었는데?”
이충재 감독이 의아한 눈빛과 말투로 음향감독에게 물었다.
“외부 소리 말고 저기 배우 반사판 대주는 막내의 침 넘기는 소리가 물려버렸어요. 작으면 상관없겠는데 생각보다 크던데?”
“막내야! 아~ 이거 좋았는데.”
“죄송합니다!”
하하하
“배우의 분위기에 압살당했나 보네.”
촬영장에 활력이 다시금 샘솟았다.
다시 촬영을 한 번 더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매우 훈훈했다.
연기자가 문제 있는 게 아니라 다 좋았는데 그 외적인 게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린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활짝 웃으면서 상황을 지켜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런 린에게 엄지를 들며 입 모양으로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린도 나에게 화답하며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고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는데 아마도 ‘고마워요.’인 것 같았다.
“자, 빠르게 다시 가봅시다!”
“다시 가겠습니다!”
이충재 감독이 의욕적으로 이야기했고 스태프들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롤.”
“스피드.”
“테이크 6!”
딱!
“레디!”
“액션!”
이번에는 정말 끝내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호흡이었다.
물 흐르듯이 카메라 감독부터 이충재 감독까지 빠르게 진행했다.
“낭자! 잠깐 서보시오! 낭자!”
박재영이 다시 붙잡았고.
“你是谁啊?(누구세요?)”
린이 고개를 돌리며 예의 아까 그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했다.
“어, 나는… 왕호. 我是王虎.(나는 왕호입니다.) 당 여인이오?”
“哎?(네?) 我是恩绣临.(나는 얜 시우 린입니다.)”
의뭉스럽게 이야기하며 고개를 갸웃하며 마지막 대사까지 깔끔하게 하고 프레임 바깥으로 린이 나갔다.
“컷! 오케이! 또 이상 있어요? 빨리 말해요.”
“영상 죽이네. 캬, 이거 이야기 많이 나오겠는데?”
이충재 감독이 다급하게 또 문제 있냐고 묻자 김진석 촬영감독이 영상 좋게 나왔다며 좋아했다.
“아무렴. 누가 찍는데 영상이 안 이쁘게 나오겠습니까?”
“음향 오케이입니다!”
“오케이입니다! 다음 컷 가겠습니다!”
이제 드디어 다음 컷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린 단독 바스트 샷 하나 남았다.
단독 바스트 샷은 정말 금방 끝났다. 그리고 이 과정 중에 나만 아는 해프닝이 있었다.
단독 바스트 샷이라 화면에 조금 타이트하게 린의 모습이 잡혔다.
근데 조명의 힘을 입어 카메라에 비춘 화면이 린을 묘한 분위기의 여인으로 만들어줬는데 이 화면을 보던 이충재 감독도 넋을 잃다가 컷을 2초 뒤에 외치기도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린의 화랑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가 될 것 같다.
맡은 배역이 카메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잠깐 나오지만, 어찌 되었건 스크린 데뷔는 데뷔였다.
“이야,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처음에 재성이랑 둘이 찍을 때 시간 걸릴 것 같아서 조금 아찔했는데.”
“이 감독 오늘 촬영 끝나고 한잔?”
“감독님 오늘 상황 봐서요.”
연출감독과 촬영감독 둘은 만족스러운지 벌써 끝나고 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훈훈한 분위기 그대로 끝났다.
“감독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촬영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사실 아이돌이기도 하고 한국 배우도 아니어서 걱정했는데 괜히 내가 편견과 색안경을 낀 것 같아서 미안했어.”
린과 같이 이충재 감독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우리의 인사를 받은 이충재 감독이 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멋쩍게 이야기했다.
린은 이해를 못 했는지 머리를 갸우뚱했다.
“음. 너 연기 못할 거 같아서 걱정하셨대.”
이충재 감독이 멋쩍어하자 내가 농담 삼아 우스갯소리로 직역했다.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 연기 좋더라. 분위기는 더 좋고.”
이충재 감독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린을 칭찬했다.
“감사합니다!”
린은 멀뚱멀뚱 상황을 지켜보다 이충재 감독이 칭찬을 해주니 그 이야기는 알아듣고 허리를 깊이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아직 의상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배역에 충실하게 매혹적이었다.
“아니야. 내가 더 고맙지, 뭘. 나중에 시사회도 VIP로 보낼 테니 꼭 와주고.”
“네!”
홀린 듯이 린을 바라보던 이충재 감독이 시사회도 오라며 린을 다독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남은 촬영 파이팅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들어가.”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시 한번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현장을 빠져나가려는데 저 멀리 홍승기가 뛰어와서 말을 걸었다.
“가냐?”
“네. 이제 촬영 들어가시죠?”
“어. 그래도 실내촬영이라 다행이다. 오늘 꽤 춥네. 그리고 린아. 잘했어. 꽤 소질 있어 보이던데?”
“감사합니다!”
홍승기가 웃으며 린을 칭찬하자 린도 웃으며 화답했다.
린의 미소를 보자 홍승기가 헤실헤실 웃었다.
녹네. 녹아.
“재성이가 녹은 이유가 있었네. 왠지 이번 영화 느낌이 좋다.”
“영화 잘되면 린 덕분입니다.”
“정말 그럴 수도?”
“아니에요. 전. 한 거 없어요.”
홍승기도 린을 연신 띄워줬다.
다행히 나도 홍승기도 린도 영화 관계자도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촬영이 되었다.
“아냐. 진짜 잘했어. 현진이가 봐주기 전에는 조금 아슬아슬했는데 봐주니까 확실히 더 좋더라.”
린은 홍승기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나도 이충재 감독처럼 머쓱해져 머리를 긁었다.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연기는 린이 했는데. 아무튼. 촬영 열심히 하시고요. 다음엔 시사회 때 보겠죠?”
“아무래도 그때나 보려나? 끝나고 나중에 전화할게. 너 이번 신년회 나오냐?”
“음, 잘 모르겠어요. 갈지 말지. 고민 좀 하고요.”
“그래, 알았다. 들어가라. 린이도 들어가. 오늘 진짜 잘했어! 빈말 아니야! 간다~”
홍승기가 졸업생들이 다 모이는 신년회 이야기를 꺼냈는데 사실 썩 내키지는 않았다.
이내 홍승기가 할 말만 하고 뒤돌면서 손을 위로 흔들며 촬영하러 갔다.
나와 린은 그런 홍승기에게 인사하고 차로 향했다.
“으, 춥다. 어떻게 차 안이 더 추운 거 같네.”
“히터요!”
“바로 눌렀지. 조금만 기다려.”
“네.”
앙증맞은 표정으로 몸을 떨던 린이 이제야 긴장이 풀린 듯 표정이 밝아졌다.
히터를 틀고 몸을 좀 녹이고 있자 차 안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어땠어? 연기해 보니까?”
“계속 NG 낼 때는. 너무 무서웠는데. 삼촌이 알려준 요령으로 하니까. 이렇게 해도 되나? 이런 느낌이었어요. 근데 또. 감독님이 바로 오케이 해주시니까….”
“재밌었어?”
린은 아까 했던 자신의 연기를 떠올리는지 방긋방긋 웃었다.
첫 연기가 좋은 기억으로 끝나 연기에 재미를 붙일 수 있을 듯싶었다.
“네.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스타즈 졸업하고 나면. 다시 걸그룹을 도전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중국 가서 연기하는 것도. 괜찮다고 느꼈어요.”
“중국 좋지. 일단 돈 많이 벌잖아.”
“그래도. 제약이 심해요. 근데 연기하려면. 제가 한국말로 영화나 드라마는. 찍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아무리 발음이 좋아도….”
린은…. 예전에 하도 그룹이 안 좋아지고 그러자 중국기획사에서 린을 빼갔다.
중국 가서 예능 활동을 한다는 것만 들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히 다른 길을 걷게 해야 한다.
중간에 중국으로 도망가면 안 되지. 안 돼.
다시 또 그런 일을 겪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 아파요?”
린의 말에 여기가 나 혼자 있는 장소가 아니란 걸 망각했다.
“아냐. 갑자기 잡생각이 들어서 떨쳐내느라.”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푸 삼촌.”
내가 조금 이상해 보였는지 린이 연신 같은 말만 했다.
“아! 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야 해요?”
그러더니 무언가 떠올린 듯 린이 갑자기 뜬금없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했다.
넌센스 퀴즈인가?
“글쎄. 잘 모르겠는데? 거기가 어디야?”
“이상한 사람들이. 가는 곳은 치과예요. 바보.”
린이 혼자서 킥킥 웃었다.
이런 걸 알려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유코야. 이상한 거 알려 주지 마.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출발할게.”
내가 정색하는 것과는 별개로 혼자 킥킥 웃는 린이었다.
* * *
린의 화랑 촬영 이후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순항했다.
나름 이미지 소모를 최소화하고 괜찮은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생각보다 12월은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네, 좋아요. 포즈 그렇게. 네.”
찰칵. 찰칵. 찰칵.
대세 아이돌 그룹이라면 한 번쯤은 찍는다는 교복광고도 찍었고.
“조금 더 입술을 살짝 깨물어 볼까요? 네. 좋아요.”
찰칵. 찰칵. 찰칵.
화보 촬영도 각양각색의 매력을 보여주며 찍었다.
“안녕하세요! 반짝반짝 빛나는 무지갯빛 스타즈입니다! 광고주님들!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광고도… 아시죠?”
하하하
광고를 위한 기업 행사도 뛰었다.
그렇게 연말 준비와 소소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벌써 연말이 다가왔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는 무사히 넘기는 듯했다.
이렇게 삐걱거리지만 않으면 탄탄대로인데 어쩌다 태풍의 눈이 되어 모든 걸 휩쓸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태풍의 핵이 될 거다.
그리고 아이들의 오랜 앙금으로 남았던 시상식.
신인 시상식이 걸린 시상식 날짜가 다가왔고 나도 처음 겪어보는 K.NET의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이때 논란이 겹치고 겹쳐 결국 참석을 못 하고 다른 그룹이 받았었다. 애들도 이게 상처로 남아 더욱더 그룹 내 불화가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신인상은 스타즈가 받게 될 거다.
올해에 활동을 10월부터 고작 3개월 했을 뿐이지만 스타즈보다 성적이 좋은 걸그룹은 없었다.
그리고 상을 주는 곳이 K.NET인 것도 주효했다.
아무리 돌려먹기라는 평가도 많은 시상식이지만 받는 거랑 못 받는 거랑은 차이가 크다.
“빨리 와!”
“너희 조심해. 그 옷 다 비싼 거야. 대여료만 토탈 천이라고.”
남진수가 호들갑 떠는 아이들에게 핀잔을 줬다.
회사도 시상식이라고 힘 좀 주려고 비싼 옷들을 대여해 왔다.
기본적으로 아이돌 그룹들 무대의상은 조금 비싼 축에 속한데 시상식처럼 화려하게 꾸며지는 의상은 정말 억 소리 난다.
화려하긴 확실히 화려했다.
그렇지만 남진수의 잔소리는 딱히 효과가 없었다.
지금의 스타즈는 서지영이 일곱 명이나 다름없었다.
“자, 가자. 상 받으러.”
“이예!”
애들도 바보는 아닌지 자기들이 상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렴. 모르면 바보지. 경쟁자가 없는데.
당당한 발걸음으로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