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나는 배가 고프다 (3)
“저는 조건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경청하겠습니다.”
제작사 측은 갑자기 이예진이 조건을 걸자 당황한 듯했다.
그 증거로 손이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이예진이 어떤 말을 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화제성을 위해서 연기 못 하는 친구들은 캐스팅 안 했으면 해요. 특히 아이돌 출신 애들이요. 아이돌 애들은 이미 이미지 소비가 될 대로 된 채로 넘어오는 애들이라 연기력이 좋다 하더라도 소화 못할 거예요. 이 드라마.”
이예진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녀가 이번에도 다시 흥행하려면 필수 조건은 연기력이 되는 배우들이어야 한다. 연기력과 작품성으로 히트 친 작품인데 연기력이 엉망이면 폭삭이다.
“그 정도만 지켜주신다면 계약서에 사인하죠.”
“물론입니다. 이 작품 맡기로 하신 감독님이랑 작가님 두 분 모두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연기에 관해서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좋아요. 그럼.”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작사도 만족스러웠고 도전을 하는 이예진도 썩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이예진 씨가 합류하게 되어 이렇게 빨리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에요. 저보다는 여기 김현진 매니저한테 감사하다고 하세요. 제가 이 드라마를 하게 된 계기가 여기 있는 김현진 매니저 덕분이어서요.”
“그때 제가 대본을 드린 게 정말 신의 한 수가 되었군요.”
“아닙니다. 저보다는 가을동화 식구들의 입김이 컸습니다.”
이예진이 공을 나에게 떠넘기자 제작사 PD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만난 듯 표정이 변화했다. 그런 PD의 눈초리에 부담스러워 나는 재빨리 공을 돌렸다.
그 이후로도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이내 서로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제작사 PD는 큰 건을 성사시켰다고 생각했는지 입가에 미소가 그치질 않았다.
“실례지만 저희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한시라도 빠르게 더 일을 진행하고 싶어서요.”
“네.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회사로 이야기해 주시거나 여기 제 개인 명함입니다.”
“아! 네. 저도 여기 명함입니다.”
제작사 PD는 계약에 성공하자 몸이 달아오른 눈치였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차태수 팀장과 제작사 PD가 서로 명함을 교환했다. 명함을 교환하자마자 빠르게 나가는 제작사 PD였다.
“근데… 김현진 매니저. 예전부터 말하려고 했던 건데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제작사 측 인물들이 다 빠져나가자 이예진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
나는 이예진을 가을동화 촬영장에서 처음 봤다.
아니면 예전에 스타즈 애들이 Y앱 처음 촬영할 때인데… 그때에는 이예진이 지나가고 난 뒤라 내 모습은 못 봤을 거다.
“네? 저는 가을동화 촬영장에서 선배님 뵌 게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선배님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같은 직업군이라 더 조심해야죠. 배우면 또 몰라도.”
이예진은 조금 독특했다.
보통은 그냥 쉽게 말을 편하게 하는데 이상하게 벽을 뒀다.
그리고 이예진을 몇 번 보다 보니 홍승기가 말했던 주의하라는 정보는 이제는 내 생각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근데 왜 계속 낯이 익죠?”
“제가 좀 특색 있게 생겨서 그런가 봐요. 하하하.”
“그래. 너 정말 특색 있지. 애들이 푸우라고 부른다며?”
“아, 그건 좀…. 하하하.”
내가 머쓱하게 웃자 이예진과 차태수 팀장도 웃었다.
저 별명은 또 언제 퍼졌는지 모르겠다.
저번 런닝맨 건도 금방 퍼지더니만.
“풋, 닮긴 했네요. 팀장님. 오늘 그러면 일정은 끝이죠?”
“네. 예진 씨는 가서 쉬시면 됩니다.”
“쉬긴요. 계약했으니 이제 관리하고 캐릭터 분석해야죠.”
이예진이 생각보다 더 의욕적이었다. 표정도 되게 다채로웠다.
이번이 연기적으로 큰 전환점이 될 거로 생각하는 듯했다. 청순가련한 이미지에서 악녀면 확실히 백팔십도 반전이긴 했다.
“하하, 예진 씨야 뭐 작품 들어가실 때 유명하죠. 입금 전과 입금 후로.”
“아직 돈은 안 받았는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자기관리의 여왕이시잖아요.”
“돈 받은 값은 해야 하니까요.”
차태수 팀장의 말에 이예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둘 다 업계에서는 베테랑이라 그런지 여유로움이 한결 묻어났다.
이내 차태수 팀장은 나를 보고 이야기했다.
“현진이는 그럼 회사 가냐?”
“네.”
“스케줄?”
“아니요. 스타즈 애들 프로그램이 잡혔는데 그거 컨텐츠 회의하러 가야 합니다.”
오늘 내 일정은 컨텐츠 기획 회의가 끝이다. 기존 회의와 다른 점이라면 오늘 회의는 스타즈 애들과 같이한다는 점이었다.
“아아, 그 뭐였지? 방구석 Live인가?”
“집구석 Live입니다. 팀장님.”
“어쨌든. 그거, 그거도 네가 물어왔다며?”
“운이 좋았습니다.”
어느새 차태수 팀장도 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내 이야기가 다른 팀까지 들어가나?
“운도 실력이지. 이 실장이 섭외 요청 건으로 온 프로그램이 다 별로라 간 엄청나게 재고 있다고 들었는데…. 계 탄 거지 뭐, 알겠다. 따로 안 데려다줘도 되지?”
“네. 따로 가겠습니다.”
차태수 팀장은 옆에 있는 이예진의 눈치를 살피면서 내게 말했다.
은근히 사람을 잘 챙기는 듯했다.
좋은 사람이다.
나중에 내가 배우팀으로 넘어가면 내 상사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래, 알았다. 예진 씨 갈까요?”
“네. 김현진 매니저도 고생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고생하십쇼! 실장님!”
그렇게 둘이 떠나고 나니 회의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바로 전에만 해도 왁자지껄한 회의실이었는데 갑자기 조용해지니 기분이 묘했다.
돌아오기 전과 다르게 이예진과 나의 접점이 너무 뚜렷해졌다. 정인수 대표와 접점도 생기고 내 행보도 확실히 확연히 달라졌다.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내 노트를 꺼내서 체크를 했다. 내가 적어둔 회귀 노트였다.
12월 초. 김민재 표절사건.
12월 중순. 유코 마녀사냥 사건.
노트를 보며 오늘 이 시간까지 일어났던 사건이나 일어날 일을 지우고 나니 다음에 터졌던 사건은 2월이었다.
이다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큰 이슈는 2월에 터졌었던 신희진의 왕따설이다.
그렇지만 그룹 내 분위기가 좋은데 왕따설이 과연 또 터질까?
예전에는 표절이 터지고 바로 몰이 당해 마녀사냥당하고 그룹 분위기 자체가 다운되어서 트집 잡혔다지만.
의문이었다.
어쨌건 당분간은 일에 집중하고 애들 케어를 집중해야겠다.
나는 회의실에서 빠져나와 오늘의 내 마지막 할 일인 기획 회의를 하러 갔다.
* * *
애들과 회사 내에 있는 회의실에 왔다.
남진수도 같이 와서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 회의에 돌입했다.
그러나 회의는 딱 5분 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개판 5분 전이다.
“뭐해야 할까?”
“언니 우리 차력할까?”
“미쳤어? 우리 걸그룹이야.”
“숙소에서 언니가 자주 하는 거 있잖아.”
“너 진짜… 어후.”
신희진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걸그룹이 차력이라니. 신선하긴 할 것 같다.
한숨을 내쉬던 이나라가 손뼉을 쳤다.
짝!
“애들아! 집중! 집중! 거기! 서지영! 혜연이 그만 괴롭히고 너도 의견 좀 내! 린이도 말 좀 하고.”
이나라가 훌륭하게 애들을 휘어잡으면서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나라맘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면. 재미없다면서. 그래서 말 안 해.”
“사실이자나~ 우리 귀염둥이 망내.”
서지영이 박혜연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칠 때 이나라가 콕 집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서지영이 움찔하고 그만뒀다.
그 와중에 유코는 뭐가 좋은지 이나라의 말을 듣고서는 옆에 있는 린의 볼을 콕콕 찌르면서 놀고 있었다.
“애들아. 얼른 끝내고 쉬자. 우리 벌써 30분 지난 거 알고 있어?”
“네!”
남진수도 지쳤는지 피곤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역시 대답은 잘하는 우리 스타즈 애들이었다.
처음 5분 정도는 의견을 내놓다가 결국 제대로 된 아이템이 나오지 않자 점차 딴짓하다 이렇게 되었다.
다시금 집중해서 저마다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저번엔 뭐 했는지 기억나는 사람?”
“저번에는 토크쇼 형식으로 했던 적도 있고. 개랑 놀아주기. 암벽 등반하기. 뭐 다양하던데? 그냥 출연자가 하고 싶은 거 해서 진행하는 것 같더라.”
이나라가 의견을 취합하려고 하길래 내가 의견을 보태줬다.
“앗, 오빠. 고마워요. 그럼 우리 하고 싶은 거 말해볼까?”
“나! 수영! 수영!”
“유코 기각. 다음.”
“아이돌 춤 강연!”
“음… 아니야. 그것도 별로 같아. 우리만 신날 듯.”
이나라가 별로일 거 같은 건 칼같이 패스하고 있었다.
역시 리더다.
“요즘은 힐링이 대세니까….”
힐링이라는 단어에 근처에 있던 신희진의 눈이 번쩍였다.
“먹방!”
“먹방…은 좋긴 한데. 먹는 거만 보면 별로일 것 같은데….”
이번 의견은 괜찮았는지 이나라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어? 그럼 요리해서 먹는 거 보여주면 어때요?”
“오, 괜찮은데?”
“나도 찬성!”
박혜연이 의견을 토스 받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는데 반응이 좋았다. 다른 멤버들도 긍정적이었다.
요리하고 요리한 걸 먹는다….
괜찮은 것 같았다.
“팀장님, 요리도 돼요?”
“제한은 없다던데?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래. 그게 제일 좋고 자연스럽다면서.”
내가 남진수에게 물어보니 배 PD는 모든 게 오케이인 듯했다.
프로그램이 망해서 시청률이 안 나올까 봐 요구가 까다로운 PD들도 많은데 인기 프로그램인데도 불구하고 걱정이 없는 듯했다.
자기들끼리 의견이 통일됐는지 점차 요리로 가려고 하는 추세였다.
“그럼 우리 요리 & 먹방으로 하자.”
“근데 우리 요리할 줄 아는 사람?”
“항상 배달 음식 아니야 우리?”
이나라가 테마를 요리로 잡은 듯했다.
그러나 뒤이어 말한 유미소와 서지영의 말에 갑자기 느낌이 싸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어릴 때부터 감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얘들아. 처음에 요리하는 걸 보여주면 사람들이 별로 재미없어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예요. 처음 요리하는 거니까 사람들이 더 재미있게 보죠. 푸 삼촌은 잘하는 거 보는 게 재밌어요? 못하는 거 보는 게 재밌어요?”
서지영이 깐족대면서 내 말을 받아쳤다.
“당연히 잘하는 거 보는 게 재밌지!”
나는 서지영의 말에 급히 대답했다. 알싸했다.
요리를 손도 안 대본 애들 일곱 명이 요리를 한다?
그 요리한 결과물을 맛볼 희생자가 필요했다.
컨셉 자체도 요리 & 먹방이니 누군가는 먹어야 한다.
아마도 일곱 명이 다 요리하지는 않고 인원을 나눠서 팀 배틀식으로 진행하게 된다면….
심사위원은 높은 확률로 내가 될 것이다. 아니면 PD던가.
나는 살고 싶었다.
첫 요리를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요리를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옆에 있는 남진수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니면 자기는 빠지고 나보고 나가라고 하면 되니까 느긋한 걸까. 그냥 묵묵히 말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래, 그럼 요리는 일곱 명이 다 할 거야? 나라가 요리 좀 할 줄 알지?”
“네.”
“그럼 나라가 심사위원으로 빠져서 해설하고. 세 명씩 두 팀으로 나눈 다음에 배틀 형식으로 두 팀 왔다 갔다 하면서 보여주면 될 것 같은데.”
“오! 좋아요!”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의견을 냈다.
좋아. 이럴 땐 빠르게 선수 쳐서 먹는 걸 나라한테 넘기고.
“근데 심사위원이 나라 언니 혼자면 좀 그렇지 않아? 공평성에 안 맞잖아.”
“어? 그러네.”
“그럼, 현진 오빠도 하는 게 어때요?”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유미소가 매섭게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박혜연이 이를 받아서 나를 거론했다.
그 뒤로는 30분 동안 다른 짓 한 게 무색하게 정말 완벽하게도 빠르게 회의가 끝났다.
체념했다.
어찌 됐든 먹어야 할 팔자인가 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집구석 Live 촬영 날이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