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도 다시 매니저!-33화 (33/200)

제33화. 나는 배가 고프다 (2)

술이 좀 들어간 모양인지 이예진의 뺨이 불그스름해서 묘하게 퇴폐적이었다.

“어? 선배님. 언제 오셨어요?”

“그냥 지나가다 재밌는 이야기가 들려서.”

이진철이 벌떡 일어나 이예진을 맞이했다.

나도 앉아서 맞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서 이예진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 반가워요. 근데 드라마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 무슨 이야기죠?”

“제가 오늘 방송국 갔다가 제작사 측 인물이랑 엮여서 어쩌다 보니 대본을 받아서요. 헥사곤에도 대본 보냈다고 하던데요.”

드라마 이야기가 나오자 이예진이 급격하게 관심을 보였다.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마녀의 이야기다.

마녀의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바꾼 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악독하면서도 가련하고 불쌍한 마녀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인데 예상외로 성적이 좋았다.

여기에 주연 롤이었던 2년 차 배우 이진아가 확 떴었다. 배역을 소화한 이진아가 연기를 잘한 것도 있었다.

이예진도 생각보다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타이틀이 뭐죠?”

“마녀입니다.”

“마녀, 마녀라… 본 것도 같은데. 잠깐 앉아도 되죠?”

“네. 당연하죠.”

이예진은 우리가 불편하지 않은 듯 바로 테이블에 앉았다.

이예진이 합석하자 느낌이 싸했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단 사람들치고 술 못 먹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못 먹는 사람은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다.

예전에 홍승기한테 듣기로는 이예진도 주당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거 잘못 걸린 건가?

내 느낌은 정확했다.

“예진이 어디 갔어?”

멀리서 유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와 이진철은 동시에 서로를 봤다. 이심전심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대충 이야기하고 튀자.

“아, 오빠. 저 잠깐 여기로 옮겼어요.”

“뭐야. 노인네들 놔두고 이번엔 거기야? 어? 아는 얼굴들이 보이네. 안녕들 하신가?”

유상우가 이예진의 목소리에 끌려 우리 자리로 왔다.

“지혜는?”

“방금 매니저가 데리고 갔어. 생각보다 술 약하드라.”

“그러게. 우리 합쳐서 아직 스무 병도 못 마셨는데.”

세 명이 스무 병은 아니겠지?

“네 명이 스무 병이면 적당하지. 이제 좀 알싸해졌는데. 진철이가 여기 있었네? 오랜만에 달려볼까? 이제 촬영한다는 핑계는 안 통한다.”

유상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에 있는 소주병을 매끄럽게 흔들었다.

한 명은 또 누굴까.

예상가는 인물은 있었다.

옆에 있는 이진철의 눈빛을 보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거 망한 거 같은데.

나랑 이진철은 술자리의 분위기가 좋은 거지 술이 좋은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와 합석한 두 명은 술이 좋은 사람들이다.

“아니이. 이것들이 다 어디로 내빼고 나만 냅두고 딴 곳으로 갔어?”

“형님. 여깁니다. 안 그래도 모시러 가려고 했는데.”

유상우가 손을 흔들어 이신형 감독에게 위치를 알려줬다.

이신형 감독까지 왔다.

네 명 중 한 명이 이신형 감독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뭐어야? 이진철이. 왜 여기 있어? 그러고 보니 잠깐 일 좀 보러 간다더니 두 시간 동안 안 왔네?”

이진철이 나한테 온 건 아무래도 도망쳐 나온 듯싶었다.

상황을 보니 배우들이랑 합석하기 전에 빠져나와 나랑 술을 먹은 듯했다.

이신형 감독이 다가오자 이진철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에요. 금방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으음방? 니가 말한 금방이 두 시간이냐?”

“진철이가 너무했네.”

이신형 감독이 이진철을 웃으면서 타박했다. 한두 번 도망간 솜씨가 아닌 듯했다.

이상우도 지금 상황을 하루 이틀 본 상황이 아닌지 노련하게 웃으며 이진철을 타박했다.

“상우 형. 아시잖아요.”

“알긴 뭘 알어. 앉어.”

“넵.”

유상우가 목소리 톤을 낮추면서 이진철에게 이야기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괜히 마녀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다. 그랬다면 이예진의 관심도 안 쏠렸을 텐데.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어?”

“아, 다른 건 아니고 여기 후배들이 드라마 이야기를 하길래요.”

“예진이 아직도 드라마 관심 있어?”

이신형 감독도 테이블에 합석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감독님. 저도 흥행작 하나는 해야죠. 억울해서라도 하나는 꼭 남기려고요.”

“그래. 예진이 너도 하나 나올 때 됐지.”

“감독님이 아까부터 술안주로 그렇게 애정을 쏟으시던 이진철 조감독이랑 그리고 그 친구 매니저가 괜찮다고 하는 작품이 있길래 궁금해서요.”

이예진이 이진철을 언급하자 이신형 감독이 헛기침했다.

이진철은 이예진의 말을 듣고 묘한 눈으로 이신형 감독을 바라봤다.

“큼, 큼. 뭔데? 대본 있어?”

“네. 여기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받아온 건데요. 괜찮은 것 같아서 진철이랑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모든 궁금증이 내가 가져온 마녀의 대본으로 쏠렸다.

이내 나한테 대본을 건네받아 읽는 이신형 감독이었다.

술에 만땅 취한 줄 알았는데 막상 대본을 쥐고 읽기 시작하자 흐릿했던 눈이 또렷해졌다.

역시 감독은 감독이다.

“흠…. 괜찮은 거 같은데? 드라마는 잘은 모르지만 신선해. 일단 영화쟁이 말은 알아서 걸러 듣고.”

“감독님 저도 한번 봐도 될까요?”

유상우도 자기도 궁금하다며 대본을 건네어 받고 읽기 시작했다.

이내 다 읽은 후 이예진에게 건네줬다.

“이건 저도 한번 읽긴 했는데요. 저랑 이미지가 안 맞아서 고사했어요. 회사에서도 크게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이 제작사… 아직 투자자나 편성 잡힌 것도 없다고 했던 거 같아요.”

“네. 이예진 선배님 말처럼 오늘 SWS에서 편성 까였습니다. 뭐 확정된 게 없다고요. 어쩌다가 마주쳐서 대본을 받게 됐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대본 같아서요.”

이예진한테도 갔던 대본인 듯했다.

악녀 이미지랑 이예진이 그렇게 어울리는 이미지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이미지로만 본다면 말이다.

“근데 예진아. 너도 이제 슬슬 이미지 변신 한번 해볼 때도 되지 않았냐? 여기 나와 있는 마녀 이해인 역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요? 음….”

“나도 신형이 형 의견에 동의해. 그동안 청순가련 이미지 너무 많이 썼어. 이제 너 나오면 사람들이 슬슬 패턴을 읽잖아. 이거 내가 봐도 괜찮은 거 같은데 이거로 한번 이미지 바꿔 보는 게 어때?”

이거 예상치 못하게 주위 사람들이 마녀 대본을 이예진에게 추천해 주고 있었다.

역사는 술자리에서 이뤄진다더니.

과연 이예진이 이걸 물까? 물면 계 탄 건데. 흥행 보증 수표다.

물론 그 사실은 나만 알고 있지만.

“사실 저도 요즘 고민이 많긴 했어요. 언제까지 제가 이 이미지로 연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막상 이미지 변신하려고 생각하니 과연 괜찮을까? 라는 물음이 계속 붙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또 똑같은 배역만 하고 있고….”

“이번에 어때? 이거 해보는 게.”

“괜찮지 않아? 너 연기력이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신형 감독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고 유상우도 똑같이 이야기했다.

배우들은 항상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모험의 결과가 좋은 건 몇 사례가 없으니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혹시 이걸 하고 이미지가 더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하지. 지금 챙기고 있는 이미지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걸로도 충분히 먹고살 거 같은데. 하고 항상 걱정한다.

그래서 TV나 영화에서 똑같은 느낌의 배역을 또 똑같이 쓰는 것이다.

경영자는 그 배우. 찌질한 연기는 그 배우 등.

제작사나 투자자도 안정적인 것을 원하니까 더욱더 굳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겁먹지 말고 한번 해볼까요?”

“그래. 뭐 요즘 드라마는 한두 개 망하냐? 열 개 중에 한두 개 뜨잖아. 케이블로 드라마 퍼지면서 우후죽순 나오는 게 드라마인데. 옛날처럼 신중하게 할 필요는 없어.”

유상우가 웃으면서 다시 거들었다.

그렇지만 유상우의 말을 들은 이예진은 얼굴을 팍 구겼다.

“오빠는 이제 영화만 찍으니까 그런 속 편한 소리 하는 거지.”

“야. 나도 드라마 찍고 싶은데 안 불러주는 걸 어떻게 하냐? 그리고 사실 드라마 너무 힘들어. 난 영화가 좋다.”

유상우도 어느 순간부터 영화에만 얼굴을 비췄다. 안 불러줘서 TV에 안 나왔던 듯싶다.

그래도 나름 아쉬웠는지 연거푸 술을 혼자 들이켰다.

“예진아, 늦기 전에 선택해.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거일 수도 있다.”

“좋아요. 내일 회사로 가서 이야기해 볼게요. 저 망하면 이신형 감독님이랑 상우 오빠 그리고 여기 두 후배 님 덕이라는 거 똑똑히 기억해 둘 거예요. 저 오래 가는 거 아시죠?”

“아이고, 이거 코 꿰였네. 괜한 소리였나?”

이신형 감독도 적극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푸시 했다.

역사는 술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 마녀를 꿰차는 건 이예진이 될 것 같다. 투자나 편성도 이예진이 한다고 하면 바로 잡힐 거다.

이예진은 흥행 보증 수표까지는 아니지만 어디서 말아먹었다는 소리는 안 들었었다.

지금 보니 본인은 그게 더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긴 했다.

“자, 그럼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제 치우고 술이나 마시자.”

“진철아, 여기 인원이 다섯 명이니까 일단 다섯 병 먼저 갖고 와라.”

“네.”

이신형 감독이 이진철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하자 이진철이 냉큼 일어났다.

“이모! 여기 계란말이랑 알탕 좀 주세요.”

“계란말이랑 알탕이유? 알겠어유. 여기 3번 테이블 계란말이랑 알탕 추가!”

유상우가 빠르게 안주를 추가했고 멀리서 소주를 가지러 간 이진철이 소주 다섯 병을 가지고 오는 게 보였다.

네 발로 집에 가는 건 확정이고 필름만 안 끊겼으면 좋겠다.

이진철이 문제야. 이진철이.

* * *

마녀 드라마를 이예진에게 넘긴 후 2주가 지나 벌써 12월이 되었다.

스타즈 애들은 활동을 접고 휴식기에 들어갔고 연말 준비와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올해 첫눈이 내려서 나는 거기에 소원을 빌었다.

내년에는 제가 다 먹게 해주세요. 아니 앞으로도요.

지금까지 먹은 것들은 약과다. 내년부터는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 치울 거다.

우리 애들도 배불리 먹여야 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래도 미래의 정보를 안다는 것은 정말 사기적인 능력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예전과 다르게 팬덤의 충성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이미지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 하는 일은 없어졌다.

이게 마음에 걸린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알던 미래가 아닌 다른 미래가 펼쳐져서인데 그래도 좋았다.

예전에는 표절이 터지고 나서 바로 유코에게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을 돌입했었는데, 이번에는 표절 논란이 아예 일어나지 않다 보니 이것도 사라진 듯했다.

좋은 나비효과였다.

또 그사이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면 내가 김민재를 들이박은 지 얼마 있지 않아 김민재의 표절이 터졌다.

김민재는 꼴좋게도 회귀 전처럼 빠르게 바로 몰락했다.

한두 곡을 표절한 게 아니라 표절한 거로 앨범을 내도 될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내가 표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게 문제가 될까 싶었으나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좋은 소식은 내가 뿌려둔 떡밥이 슬슬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입질이 온 것은 집구석 Live였다.

런칭은 1월이지만 촬영을 이번 주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리고 회사 내부에서 나의 평가도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단순히 또라이였다면 이제는 능력 있는 또라이로 올라갔다.

그리고 또 다른 수확은 이예진의 마녀 캐스팅이 긍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예진이 회사에 내 이야기를 했는지 공로를 인정받아 제작사와의 미팅에 이예진과 이예진 매니저인 차태수 팀장 그리고 내가 참여하게 됐다.

스타즈는 연말 준비에 한창이라 내가 크게 할 게 없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난 그 자리에 와 있다.

“계약, 하시는 거죠? 이예진 배우님?”

“아니요.”

이예진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갑자기 회의실의 분위기가 북극마냥 급격히 냉각됐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화기애애하고 따스한 분위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