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나는 배가 고프다 (1)
지금 걷는 도시의 풍경이 왠지 낯설었다.
사고를 친 다음 날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처음으로 내가 영업을 하러 방송국을 가서 그런 걸까.
지금 나는 애들 프로필 들고 방송국으로 가고 있었다.
남진수가 나보고 대뜸 ‘너 내일 필드 한번 뛰어봐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을 들이박을 정도면 방송국 가서 뭐라도 해서 올 것 같다고.
나는 아직 지금까지 방송국에서 단 한 번도 영업을 해본 적이 없다.
예전에는 미숙해서 못했었다.
익숙해질 때쯤에는 그룹이 휘청거려서 못했었다.
지금은 풋내기라 못했는데 갑자기 시킨 것이었다.
이게 징계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방송국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방송국 PD들은 프로필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수많은 매니지먼트들이 바보라고 가만히 있을까?
그들도 필사적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방송국에나 프로그램 회의실에는 항상 프로필이 가득했다. 어떤 프로그램은 프로필을 돌리면 아예 섭외조차 안 하기도 한다고 했다.
무엇을 기대하고 나 혼자 방송국으로 보낸 건지 모르겠다.
지-잉. 징. 지-잉.
상념에 젖어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진철]
화면에 뜬 이름은 이진철이었다.
먼저 전화하는 일이 드문데.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이긴. 요즘 바쁘냐?
“아니. 애들 휴식기라 그렇게 바쁘진 않다.”
말을 하고 아차 싶었다.
이진철은 안 바쁘다고 일 시켰던 전적이 있었다.
- 그럼 오늘 쫑파티 하는데. 올래?
“가을동화? 거기를 내가 왜 가.”
가을동화 촬영이 다 끝난 듯싶었다.
겨우 하루 땜빵 뛴 건데 쫑파티는 너무 사치다.
- 윤진수 PD님이랑 이신형 감독님도 허락했어. 너 그때 밤새고 그냥 갔잖아.
“시간 되면.”
- 할 것도 없다며. 그냥 와.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공짜 술인데.
공짜 술이라는 말에 혹했다.
오늘 방송국에서 영업 뛰고 나면 할 게 없긴 했다. 회사에서는 오늘 나보고 방송국에 프로필 돌리고 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음…. 그럴까?”
- 오는 거로 안다. 끊는다.
이진철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바로 끊었다.
술을 안 먹은 지 벌써 3개월째다. 애들이랑 다니면서 항상 바쁘게 보내다 보니 먹을 시간이 없었다.
요새 스트레스가 장난 아닌데 오늘은 일 끝내고 이진철이나 괴롭히면서 보내야겠다.
* * *
어느덧 방송국에 도착했다.
내가 목표로 한 프로그램은 단 하나다.
곧 다시 시작하는 집구석에서 보는 Live 예능이다.
줄여서 집구석 Live인데 인터넷 방송처럼 실시간으로 시청자들과 소통하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그대로 나가지는 않고 편집을 거쳐서 나간다.
이 프로그램은 시즌 2로 나올 정도로 화제성이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섭외는 메인 PD만 만난다면 바로 섭외될 자신이 있었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 메인 PD가 아이돌 덕후이기 때문이다. 집구석 Live는 시즌 1 때도 아이돌 섭외가 꽤 잦았었다.
생각보다 PD 중에도 아이돌 덕질 하는 사람이 꽤 있다.
숨기고 다녀서 잘 모를 뿐이다.
그리고 이 PD는 우리 스타즈 애들의 팬이기도 했다.
이 사람이 SNS로 우리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응원해 주었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예능국 회의실 복도에 도착해서 주위를 살펴보니 아직 이 프로그램 회의실이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메인 PD 사무실로 가야 했다.
보통 PD들의 사무실은 두 개로 나뉜다.
프로그램에 대해 회의하면서 아이템과 기획을 짜는 프로그램 회의실과 개인 업무를 보는 개인 사무실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프로그램 런칭에 들어가면 프로그램 회의실에서 살지만 런칭 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복도를 돌며 다른 프로그램에도 프로필을 돌릴까 했지만 좋은 소리는 듣기 어려울 것 같아 바로 개인 사무실 쪽으로 직행했다.
“저기요. 혹시 배명수 PD님 자리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배 PD님이요? 배 PD님이면 저기 계세요.”
“감사합니다.”
사자머리의 배명수 PD가 보였다.
이내 나는 프로필을 점검하고 배명수 PD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배명수 PD님. 저는 스타즈 매니저 김현진이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 되시나요?”
“아, 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프로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아직 맡은 프로그램이 없는데요.”
내가 프로필 돌리러 찾아왔다고 하자 배명수 PD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1월에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이야기가 나올 거로 생각했는데 얼마 되지 않았던 듯했다.
“이번에 다시 집구석 Live 지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본 프로그램이라 이렇게 일찍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거 승인 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내부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저도 현장에서 건너건너 들은 거라….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거야 없고. 정보가 빨라서 좀 놀래서 그랬어요.”
배명수 PD가 생각보다 호의적이었다.
PD 중에는 괴팍한 사람도 많아서 배명수 PD 정도의 반응이면 아주 양호한 거였다.
나는 잽싸게 애들 프로필을 꺼내 배명수 PD에게 건넸다.
“여기 저희 애들 프로필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프로필 돌리러 온 아이돌 매니저는 또 처음이네요. 애들이 매니저 복이 있네요. 긍정적으로 보겠습니다.”
배명수 PD는 빠르게 프로필을 훑더니 나에게 이야기했다.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더욱더 호감이 생긴 듯했다.
배명수 PD의 얼굴도 까칠해 보이지 않고 밝아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애들 정말 잘할 거예요.”
“그럼 제가 일이 있어서….”
“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니 뭐… 섭외를 무조건 해준다는 건 아니고….”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배명수 PD는 일이 있다면서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가 의욕 있게 대답하자 오히려 역으로 당황한 듯싶었다.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더 방해 안 하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말하고 나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예능국 복도와 드라마국 복도를 지나는데 앞에서 실랑이하는 두 명의 인물이 보였다.
“아, 거참. 편성 안 된대도. 우리 돈 없어요. 투자받고 다시 와요.”
“김만수 PD님. 편성만 받으면 투자받을 수 있습니다. 제발요.”
“자꾸 도돌이표로 이야기하게 만드시는데, 투자를 받고 오시라고요. 예? 이게 이해하기 어려워요?”
“PD님….”
“더 얘기할 거 없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시 올 땐 꼭. 반드시. 투자를 받고 오세요. 그 전엔 할 말 없습니다.”
편성 PD로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자신을 붙들고 있는 사람을 밀고 휙 지나갔다.
밀린 사람은 대비를 못 했는지 중심을 못 잡고 바닥에 엎어졌다.
엎어지자 들고 있던 용지가 낙엽처럼 바닥에 흩뿌려졌다.
“하아….”
도와주려고 가까이 다가가니 용지 표면에 있는 ‘마녀’라는 타이틀이 보였다.
그리고 그 타이틀을 본 순간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마녀는 케이블에서 히트 친 드라마다.
상황을 보니 예전에도 지상파에서 까이고 케이블로 간 듯싶었다.
지금은 편성과 투자를 받으려고 뛰어다니고 있는 제작 초기 단계인 듯했다.
이거 내가 낚을 수 있지 않을까?
맹렬하게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용지를 주워주면서 관계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예. 괜찮습니다. 제가 정리할게요.”
“같이 그냥 주워 드리는 건데요, 뭘.”
나는 프린트 된 용지를 주워주면서 말을 건넬 타이밍을 살폈다.
“드라마 제작사…신가 봐요?”
“아, 예. 이번에 만들어진 신생 푸른 숲 제작사입니다.”
“편성 받기가 좀 힘들죠?”
“하아… 관계자세요?”
내가 편성 이야기를 하자 세상 모든 고통이 다 여기에 있다는 표정을 짓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 저는 헥사곤에 있는 스타즈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헥사곤이면… 우리 드라마 대본도 갔던 곳이네요. 연락은 못 받았지만.”
제작사 측 인물이 우리 회사도 대본이 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예전에 우리 회사 소속에서 마녀를 찍은 배우는 없었다.
마녀는 순수 작품으로 뜬 드라마다.
주연도 크게 이름값 있는 배우도 아니었고 연기력과 작품으로 히트 친 드라마였다.
“그런가요? 저는 배우 담당이 아니라 가수 담당이라….”
“신생이 다 그렇죠. 방송사랑 기획사들은 리스크 있는 선택은 안 하려고 하니까요. 도와줘서 고마웠습니다.”
“네, 저기…. 혹시 드라마 대본 한번 제가 받아볼 수 있을까요? 제가 아는 배우들한테 추천 한번 해볼게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요.”
바로 떠나려 하길래 낼름 냅다 질러버렸다.
대본을 받을 수 있을까?
심장이 아까보다 세차게 뛰었다.
지금은 못 먹어도 고였다.
“그래 주시면 저희야 고맙죠. 여기 있습니다. 원래는 방송국에 제출할 기획서랑 대본이었는데, 구겨지기도 했고 그냥 가져가시고 어디 외부로 유출만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서로 힘냅시다. 고생하세요.”
그렇게 나에게 대본을 주고 떠났다. 사람을 잘 믿는 양반이었다.
같이 주워주고 도와줘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해서 동질감을 느낀 건지, 아니면 편성을 까여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마녀 대본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걸 누구한테 줘야 할까?
* * *
“캬~ 달다. 달아”
“술을 언제 마셨길래 술이 다냐?”
“술? 술 어제도 먹었지. 근데 쫑파티 쇠주는 역시 달라. 기분이 좋다니까.”
“난 간만에 먹어서 그런지 쓰다.”
이진철이 알싸하게 올라온 취기로 기분 좋다며 이야기했다.
방송국에서 일을 보고 나도 가을동화 회식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면서 구석진 곳에서 다른 스태프들이랑 술을 마셨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술 약한 사람은 나가떨어지고 이진철과 함께 마시게 되었다.
“이제 뭐 할 거냐.”
“뭐하긴 편집해야지.”
“아, 맞네. 후반 작업이 남았지… 끝나고는?”
“후반 작업 끝나면… 아마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 여기저기 뿌려보고 그거 찍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을까?”
이진철은 자기 시나리오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침울해했다.
“이제 데뷔하냐?”
“데뷔를 내가 하고 싶다고 바로 하냐. 운도 따라 줘야 하고… 작품도 좋아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참 하기 힘드네.”
“임마. 잘 될 거야. 내가 보증한다.”
이진철이 자기 한탄을 귀에 딱지가 나도록 끝없이 했다.
아냐. 넌 성공적으로 데뷔해. 대단한 놈이야. 그게 확정된 미래야.
“네가 뭐라고 보증해. 새끼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한잔할까?”
“그래. 한잔하자.”
“이진철의 데뷔를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이진철과 오랜만에 웃으면서 이야기하니 즐거웠다.
사회로 나오기 전에만 해도 자주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술을 기울였던 친구였는데 사회로 나와 서로가 바빠지다 보니 만날 일이 너무 적어졌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이야기하기 힘들었을 거다.
“야. 내가 오늘 드라마 대본 하나 받았거든? 한번 봐봐.”
“뭔데. 이건.”
“그냥 보고 재밌는지 아닌지만 판단해봐. 예술 감성 빼고.”
“예술 빼면 우리가 남는 게 뭐가 있냐? 거 까탈스럽긴. 줘봐.”
이내 나는 마녀 대본을 꺼내서 이진철에게 주었다.
이내 우리 테이블이 조용해지자 옆에서의 소음이 내 귓가로 들려왔다.
고기 굽는 소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주문을 받는 이모.
그 와중에 이진철은 묵묵히 드라마 대본을 보더니 테이블에 툭 하고 대본을 던졌다.
“재밌네.”
이진철이 침묵을 깨고 나에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고 이진철의 대화만 내게 들렸다.
“그치? 이대로 뽑으면 괜찮을 거 같지 않냐?”
“근데 이거 너희 애들 주게? 걔네 연기할 깜냥은 되냐?”
그게 문제야.
나도 누구한테 줘야 할지 모르겠거든. 줘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아니. 그냥 일단 받아왔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뭐 감독이나 작가가 중간에 병신 짓만 안 하면 그럭저럭 선방할 거 같은데.”
나랑 이진철이랑 마녀 대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재밌는 이야기하시네요. 저도 좀 끼워 주실래요?”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언제 우리 테이블 쪽으로 왔는지, 이예진이 서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