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 (2)
“속은 좀 괜찮냐?”
“네. 괜찮습니다.”
남진수가 내 얼굴을 보더니 안쓰러워하며 말을 걸었다.
처음으로 홍승기와 술 마시면서 두 발로 집에 들어왔다.
술자리에서의 퇴근은 이미 해가 뜬 후에 했지만, 적당히 눈치 보면서 마시고, 집에서 네 시간 정도 잔 뒤에 팬사인회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진짜 배우팀 매니저 하려면 술이 세던가. 술을 못하던가. 둘 중 하나야. 중간이 없어. 그 동네는 뭐 그리 술을 좋아하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물 대신 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고 교류하는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냥 분위기가 그렇다.
영화 하는 사람들의 술자리는 딱 두 가지다.
술을 못하거나 술을 잘 마시거나.
중간이 없다.
중간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게 술을 마시게 되는 순간부터는 술을 잘 마시게 되어 있다.
나 또한 처음에 술을 접했을 때는 술 반병 먹고 토했었다. 지금 주량은 안 세어봐서 모르지만, 많이 들어간다.
“우리 애들 팬사인회는 생각보다 진상이 많이 없어서 좋아. 옆 팀에선 팬사인회 할 때마다 죽을상이던데.”
“팬덤 분위기가 이래서 중요한 거 같아요.”
예전에는 진상이 많았다.
애들과 만났던 날 따라다니던 팬처럼 악질적인 팬들도 많았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초기에 회사에서의 대응이 훌륭했는데, 팬들에게 겁먹지 않고 강경하게 나간 것이 주효했다.
그리고 ‘다 제가 발로 뛰어다니면서 한 결과입니다.’라고 잘난 척하고 싶었으나 알아주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안녕히 가세요~”
“혜연아. 사랑해.”
상념을 떨치고 사인하는 멤버들을 뒤에서 보니 박혜연의 앞에서 손을 붙잡고 안 놓아주는 팬이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저 다음 분이 계셔서…. 저, 손 좀….”
“이러시면 안 돼요~”
그 사람은 박혜연이 말하는데도 꽉 붙잡고 박혜연만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미소도 거들어서 대화로 떼어내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만 놔주시죠. 이런 돌발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내가 다가서서 눈을 부라리고 말하자 그제야 박혜연의 손을 놓고 나갔다.
그리고 계속 아쉬운지 가면서도 뒤돌아보면서 박혜연을 보면서 퇴장했다.
박혜연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면서 다음 팬이랑 이야기하면서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니 아이돌들도 정말 극한직업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좋아해도 좋은 척. 싫어해도 좋은 척.
구설수 때문에 어떤 상황이라도 무조건 웃는 아이들을 보니 뭔가 가슴이 아려왔다.
살아 있는 인형이 이러할까.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진짜 진짜 예쁘세요!”
“감사합니다! 너무 안 띄워주셔도 돼요.”
“띄우다뇨. 사실인데요. 박혜연 음색 최고!”
그 뒤로는 다행히 정상적으로 사인회가 진행되었고 팬사인회가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무지갯빛 스타즈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아아!
짝짝짝!
팬사인회를 마무리하고 가려고 애들이 무대 인사를 하자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던 팬들이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쳐줬다.
다행히 나가는 방향은 관계자 통로가 있어 크게 마찰 없이 주차장으로 갈 수 있었다.
“오늘 일정 끝났다! 야호!”
“오늘은 프리한 프리 프리 일정!”
“오늘 개인 레슨 있잖아.”
“아, 맞네.”
유미소와 신희진이 스케줄 끝났다고 방방 뛰며 좋아했으나 이나라의 일침에 격침되었다.
휴식기에 들어가면서부터 멤버별로 노래나 안무, 연기 등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난 스케줄 남았는데….”
“앗, 난 그건 좀 부러운데.”
“나도. 나도.”
“나도 피처링 하고 시퍼.”
박혜연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서지영이 부럽다고 이야기하자 근처에 있던 린과 유코도 부럽다며 동조해줬다.
“히, 나도 피처링은 처음이라 설레긴 해. 쪼오끔 신기한 기분?”
“음원 대박 나는 거 아니야? 음원 킬러잖아. 김민재 선배님.”
응. 대박 났어. 표절 대박.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연금 노래 생기나아?”
박혜연이 텐션이 올라갔는지 말의 끝 음이 올라가며 사투리가 나왔다.
“그건 배 아파서 안 돼.”
이나라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나라맘! 자식이 잘되는 게 왜! 어째서!”
박혜연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흐느끼며 이나라에게 기댔다.
“됐어. 빨리 가. 오빠 기다리고 있잖아.”
“앗,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아직 시간 좀 남았어. 팬사인회도 일찍 끝났고.”
“너희도 이제 얼른 타라. 회사 가야지.”
남진수도 애들을 닦달하며 밴에 태웠고 나는 따로 남진수가 가져온 승용차에 탑승했다.
내가 탄 차에 뒤이어서 박혜연이 조수석에 올랐다.
“와, 승용차 진짜 오랜만에 탄다.”
“이제는 밴이 익숙하지?”
“네. 항상 이동을 그거로만 하니까 이제는 다른 교통수단 탈 때 너무 신기해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박혜연이 승용차를 처음 타보는 어린아이처럼 승용차 내부를 열심히 훑고 있었다.
“나중에 되면 버스나 지하철은 못 탄다고도 말하던데 너도 그러는 거 아냐?”
“설마요. 그래도 제가 살아오면서 지하철이랑 버스를 얼마나 많이 탔는데요.”
“아무튼, 자 출발한다.”
“네.”
남진수에게 받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출발했다.
나도 오랜만에 승용차를 모는 거라 조금 익숙지 않았다.
밴이 차체가 높기 때문에 승용차랑은 보는 시야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박혜연과 단둘이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나는 박혜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혜연아.”
“네?”
“아까 같은 경우에는 그냥 단호하게 이야기해. 안 그러면 계속 그런 애들 생겨.”
“아…. 저도 미소 언니처럼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리고 우리 그룹에 혹시 피해가 갈까 봐 걱정도 되고요. 아이돌은 흔히 전부 외향적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사실 저는 아이돌 할 성격은 아닌 거 같아요. 외향적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저는 정말 내향적이거든요.”
박혜연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본인의 성격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지금도 운전하면서 옆을 흘깃 보니 말하면서도 조금 움츠러들어 있었다.
“아니야. 내향적인 사람이 어떻게 아이돌을 해. 보여주는 모습이 다인 게 아이돌인데. 아이돌은 날 때부터 아이돌이라는 말도 있어. 아이돌은 될놈될이거든.”
“…….”
백미러로 눈치를 살펴보니 잠자코 듣고 있는 박혜연이 보였다.
“자신감을 가져, 혜연아. 네가 매력 없었으면 어떻게 데뷔했겠어? 떨어진 친구들은 뭐가 돼. 너 지금 제일 잘 나가는 그룹의 메인 보컬이야.”
“핫.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기분 좋네요…. 그렇죠? 제가 이런 마음 품는 건 떨어진 친구들한테 예의가 아니겠죠?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지금 정말 행복하거든요.”
괜히 쭈굴쭈굴 쭈구리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자존감이 너무 없었다.
지금이면 자존감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있을 만도 할 텐데.
생각해보니 피처링 의뢰를 한 김민재가 이런 박혜연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노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혜연아. 너 김민재 씨랑 무슨 인연이라도 있어? 콕 집어서 너랑 하고 싶다고 연락 왔었는데.”
“네? 아뇨. 음악 방송에서 본 게 처음이었어요. 배혜지 선배님 말처럼 뭔가 사람이 가벼워 보이고 바람둥이 같기도 했는데…. 그냥 유쾌하신 거 같아요.”
그게 유쾌한 거면 내가 아는 유쾌하다는 의미가 바뀐 것 같은데.
김민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오기 전에 내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표절한 노래를 찾지는 못했으나 표절이 터져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적당히 상황 봐서 김민재한테 표절 언급을 해주면 알아서 지레 겁먹고 녹음을 그만두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표절했다고 의문을 던지는데 그 사실을 본인이 알고도 바로 그만두지 않는다면 정말 멍청한 거니까.
이 방법도 내가 같이 필드로 와서 할 방법이지 남진수가 왔다면 내가 손쓸 방법이 아예 없었을 것 같다.
어떤 노래를 정확히 표절했는지는 모르지만, 언급만 해줘도 효과가 상당하리라고 본다.
‘어디서 들었던 멜로디 같은데요.’ 라던가. ‘어? 이거 좀 익숙한데?’라던가.
용의주도한 놈이라 분명히 알아들을 거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강행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때는 또 그 상황에 맞는 다른 계획을 세워야지.
그리고 내가 저렇게 가수한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다. 일개 로드 매니저가 어떻게 남의 회사 가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으로 막는 수밖에.
“그건 유쾌한 게 아니라 작업 거는 거야.”
“네? 그런 생각은 안 들던데요.”
“녹음실 가서 김민재가 이상한 행동 하면 강하게 싫다고 해. 남자인 내가 봤을 때는 녹음실에서도 분명 작업 걸 거야.”
“에이. 설마요.”
박혜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싶다.
어떻게 보면 연습생 시절 같이 생활했던 동기나 오빠들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알아야 할 텐데 이게 쉽지가 않다.
박혜연과 그렇게 이야기 나누며 드라이브를 하다 보니 어느새 다 도착했다.
- 도착 100M 전입니다.
“금방 왔네.”
“그러게요. 이야기하면서 왔더니 정말 금방 왔네요.”
내비게이션이 우리의 도착지를 알려 주었고 나는 매의 눈으로 근처에 주차할 공간을 찾아서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와, 건물 되게 세련됐다.”
“헥사곤이 더 멋있지 않아?”
“에이. 헥사곤은 올린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여기도 리모델링한 거 같은데 뭘.”
그렇게 박혜연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김민재 회사 측에서 주소를 받은 건물로 들어왔다.
들어와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주소만 알려주고 건물 몇 층인지를 안 알려준 것이다.
내가 가만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상호안내판을 보고 있자 박혜연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4층인 거 같은데요? 저기 Play Maker Studio라고 쓰여 있는 곳이요.”
박혜연이 내가 보고 있던 안내판을 유심히 보더니 안내판을 가리키며 나에게 알려줬다.
“어? 그러네. 고맙다.”
“아니에요. 헤헤, 저 지금 피처링 너무 기대돼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박혜연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 4층입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김민재의 녹음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와, 녹음 스튜디오는 다 이런가 봐요. 우리가 녹음했던 곳이랑 다른 게 없네.”
“녹음 스튜디오야 다 똑같지 뭐.”
스튜디오 내부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으나 우리 인기척을 들었는지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혜연아! 이야 반갑다! 음악방송에서 본 뒤로 한…. 2주 만인가?”
“안녕하세요! 민재 오빠!”
“안녕하세요. 김민재 씨 스타즈 매니저 김현진입니다.”
김민재는 인사를 한 나를 한번 슥 훑더니 고개만 까닥거리며 박혜연에게만 말을 걸었다.
싸가지 보소.
“혜연아, 오빠가 노래 죽이게 뽑았거든? 오늘 잘해 보자!”
그렇게 말하면서 박혜연의 손을 덥석 잡더니 손을 흔들었다.
박혜연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해했으나 이내 표정을 풀고 웃으면서 김민재에게 이야기했다.
“아하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봐도 하는 행동을 보니 저 새끼는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던 그 표절곡으로 녹음하는지만 확인하고 행동에 나서야겠다.
혹시 바뀌어 다른 곡으로 녹음하면 표절이라고 터트릴 수도 없고 우리만 피해 볼 수 있으니까.
속으로 꾹 참으며 잠시 후 김민재 명줄을 따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이렇게 상상하지 않으면 못 참고 김민재를 들이박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김민재에게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