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시작은 천천히 (3)
감독에게 이야기한 목소리는 분명히 이진철의 목소리였다.
진철이가 미치지 않는 이상 감독한테 대들 리가 없는데….
현장을 자세히 보자 다른 스태프들의 얼굴이 보였다. 스태프들의 얼굴은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신형 감독과 이진철을 보면서 웃고 있는 스태프가 몇 명…?
응? 왜 웃고 있지?
“감독님. 오죽하면 제가 이런 말까지 드려야겠습니까? 어차피 딱 보니까 첫 번째 거 쓰실 거잖아요. 제가 감독님이랑 작품만 지금 다섯 개째예요. 연차로 따지면 8년째입니다.”
“아니. 뭐 좀 더 좋은 컷이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너 임마 머리가 너무 굵어졌다?”
서로 말은 날카로운데 실실 웃고 있었다.
이진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로웠다. 이진철이랑 같이 대학교 들어가고 이진철이 이신형 감독 쫓아다닌 지 벌써 8년이구나.
“형, 아니 감독님. 어차피 편집할 때 이 장면 저한테 의견 구하실 거죠? 제가 이번 컷 쓰실 때 1테이크 쓰신다에 제 영화 인생 걸겠습니다.”
“확신해? 나는 확신 못 하겠는데?”
둘의 어투가 도박판 노름하는 거랑 같았다.
“저번 작품 때도 확신 못 하셨는데 결국 제 말이 맞았죠?”
“아, 그건 그 작품인 거고 이건 또 느낌이 다르지. 뭔가 좀 아쉬운데.”
“더 좋은 컷 안 나와요. 다음 컷으로 넘어가세요. 제발요.”
와우, 진철이가 이신형 감독이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구나.
이진철이랑 이신형 감독의 인연은 내가 알기로는 오래전부터 함께해 깊은 거로 알고 있다.
그런데 호형호제까지 하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작품에 대해서 의견을 이렇게 교류하는지도.
보통 감독들은 자기 권위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기 권위에 대해 간섭할 경우 욕은 기본이고 손까지 올라가는 감독도 많다. 불쾌하다고 작품을 안 한다고 하는 감독들도 많고.
이신형 감독이 독특한 거다.
그리고 이진철이 그렇게 말하는데도 스태프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현장 분위기 자체도 학생들이 수학여행 온 것처럼 편안했고 무엇보다 스태프들이 이신형 감독을 전적으로 믿는 게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 중심에는 이신형 감독과 이진철이 있었다.
그 증거로 스태프들은 하루 이틀 본 장면이 아닌지 조명팀과 촬영팀이 이 상황을 보면서 내기하고 있었다.
“야, 진철이가 이긴다에 오늘 하루 일당 건다. 내기할 사람?”
“감독님. 그거 내기가 안 될 거 같은데요. 저도 조감독님에게 걸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모든 스태프가 이진철이 이긴다에 걸고 있었다.
“아니 이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뻔한 걸 누가 내기해요?”
“좋아요. 그럼 제가 이신형 감독님한테 걸게요. 제가 지면 다음에 제 사비로 회식 한번 할게요. 제가 이기면 오늘 스태프 일당 전부 제 건가요?”
스태프들이 왁자지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예진이 와서 내기에 참여했다.
“얘들아, 물주님 오셨다. 인사드려라. 예진 씨. 저녁 잘 먹겠습니다.”
“정말 제가 질 거로 생각하세요?”
“예진아, 이건 네가 지는 게임이야. 나도 조감독이 이긴다에 건다.”
촬영감독이 이예진에게 잘 먹겠다고 말하는데 그 곁으로 30대 미남형 남자배우가 다가왔다.
연기파 배우 유상우.
유상우는 이신형 감독의 페르소나다.
유상우는 첫 작품을 이신형 감독이랑 같이했었고 그 첫 작품이 대박 나면서부터 이신형 감독의 페르소나가 됐다.
주연이 아니더라도 이신형 감독의 작품에 꼭 출연하면서 이신형 감독에 대한 믿음에 대단하다고 했다.
“상우 오빠도?”
“너 조연출이랑은 작품 같이 안 해봤지? 너랑 작품 했을 때는 없었을 때니까.”
보통의 지금 상황이라면 얼음장처럼 촬영장이 얼어붙어야 정상 아닌가?
“하하, 현진 씨는 처음 보나 봐요?”
“아, 윤진수 PD님.”
“올라오라고 부르려고 했는데 올라오셨네요. 아마 잠시 뒤면 얘기 끝내고 저녁 먹겠네요.”
윤진수 PD의 말이 끝나자마자 투닥거리고 있던 이진철과 이신형 감독의 이야기도 끝이 났다.
“이번 씬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이예진 선배님이랑 유상우 선배님 회상씬 가겠습니다.”
“자자, 저녁 사왔으니까 저녁 먹고들 합시다. 아직 덜 식었을 때 먹어야지.”
이진철이 다음 장면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윤진수 PD가 장면 전환 전에 밥을 먹자고 이야기했다.
“현진 씨, 안쪽에 있는 도시락 좀 같이 가지러 가죠.”
“네.”
나는 윤진수 PD와 함께 카페 안쪽에 있는 도시락 박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윤 PD님. 제작비 좀 씁시다. 이거 먹고 우야 촬영해요? 계속 이러면 파업합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고요. 다음 촬영 스케줄에는 식당 있습니다. 오늘은 참아주세요.”
“오늘만 넘어갑니다~”
윤진수 PD와 조명감독이 허허 웃으며 이야기했다.
“야, 현진아. 이리와.”
이진철이 나를 불렀다.
“감독님. 여기 제 친구인 김현진입니다. 지금은 매니저 일하고 있어요.”
“아~ 네가 말하던 그 친구? 반가워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말하던? 나? 뭘 얘기했길래?
“반갑습니다. 김현진입니다. 예전에 찍으신 벚꽃이 필 무렵. 잘 봤습니다, 감독님.”
“아이고, 그거 망했는데. 부끄럽게.”
이신형 감독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감독님. 망하진 않았어요. 손익분기점은 넘었습니다.”
“그건 망했다고 하는 거야.”
“진짜 망한 감독들이 들으면 돌 맞아요. 감독님.”
가까이서 본 이진철과 이신형 감독은 정말 친해 보였다.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아이고 배고파라. 막내야, 밥 좀 가져와라.”
“네!”
“내 것도.”
“네!”
왜 연출부 막내가 불쌍해 보이는 걸까.
조금 측은해 보였다.
“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같이 먹어요. 뭘 따로 먹고 그래?”
“감독님이 불편한가 보죠.”
“아 거, 진짜 확 그냥. 너 오늘 까분다?”
“말 안 할까요?”
“아니. 그러면 심심하잖아. 아무튼 같이 먹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밥 좀 가지고 올게요.”
확실히 이진철과 이신형 감독의 케미가 좋은 듯했다.
밥을 가지고 다시 이신형 감독과 이진철이 있는 곳으로 왔을 때는 이예진과 유상우가 같이 있었다.
“다음 장면은 기깔나게 뽑아야 해. 이번 영화 핵심이야.”
“저희야 감독님 연출하시는 거에 그냥 따라가는 거죠. 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감독님.”
가까이 와 들어 보니 서로 진지하게 작품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었다.
와,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밥을 넘기지. 먹다 체하겠는데.
멀뚱멀뚱 있는데 이진철이 자기 옆으로 나를 불렀다.
이진철 옆에 앉자마자 눈동자 여덟 개가 나를 향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이 온 걸까.
“제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네요. 하. 하. 하.”
“아, 상우랑 예진이는 모르는 얼굴이지? 진철이 친구래. 지금은 매니저 일한다고 하더라고.”
이예진과 유상우가 더욱더 호기심 짙은 눈으로 쳐다봤다.
“매니저세요? 누구 담당이세요?”
“아, 전 배우 담당은 아니고요. 헥사곤에서 어제 데뷔한 스타즈 담당입니다. 로드 매니저예요.”
“진철이 친구면 나보다 어릴 테니까 말 편하게 할게. 근데 헥사곤이면 예진이 지금 소속사 아니야?”
“네. 편하신 대로 하세요.”
“네. 맞아요.”
이예진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계속 바라봤고 유상우는 친화력이 좋은지 바로 나를 편하게 대했다.
예전의 일이 떠올라 이예진의 눈초리가 나는 조금 부담됐다.
“그래도 얘가….”
이진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 같아서 눈치를 줘서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그래도 제 영화관에 많은 도움을 준 친구예요. 원래는 감독님에게 인사시키려고 불렀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모이게 됐네요.”
“뭘 그냥 같이 밥 먹는 건데.”
“감독님은 막내 애들이랑도 자주 같이 드시잖아요.”
“막내들은 죽으려고 하던데?”
당연히 죽으려 하지 이 사람들아. 막내 처지에서 맨 윗대가리랑 같이 밥을 먹으면 밥이 넘어가겠냐?
이신형 감독의 촬영장이 워낙 자유분방하고 재밌는 촬영장이라는 건 진철이 통해서 많이 들었었다.
근데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대충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이신형 감독과 이진철이 먼저 일어났다.
이예진이랑 유상우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지 대충 먹다 남기고 둘이 대본 리딩을 하고 있었다.
“진철아, 10분 뒤 촬영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봐.”
“네.”
이제 다시 분주하게 촬영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예진과 유상우가 연기하는 걸 현장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둘 다 연기를 굉장히 잘한다고 알고 있는데 어떨까?
“감독님. 조명팀이랑 촬영팀은 오케이랍니다. 동선은 밥 빨리 먹고 확인했고 조명팀은 전에 세팅해 놓은 거에서 크게 달라지는 거 없다고 합니다. 배우 스탠바이 되면 슛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알았다.”
이신형 감독과 이진철이 이야기를 나눴고 이내 이신형 감독은 손을 털고 배우들에게 다가가서 이야기했다.
“따로 디렉팅은 안 할게. 일단 보자.”
“좋아요.”
“가봅시다.”
이신형 감독이 이야기를 끝내자 각자 자기 위치로 가기 시작했다.
“이 씬 첫 컷이 예진이가 카페로 들어오는 장면이지?”
“네. 준비할까요?”
“그래, 가자.”
“슛 들어가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슛 들어가겠습니다! 슛 들어갑니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준비를 끝내고 스탠바이했다.
“막내야, 슬레이트 쳐야지.”
“아. 네! 가겠습니다!”
연출부 막내가 슬레이트를 들고 카메라 구도에 맞춰 슬레이트를 댔다.
“카메라 롤”
“사운드 스피드”
“씬 35 - 1 – 1”
딱!
경쾌하게 슬레이트 치는 소리와 함께 촬영장이 숨소리 없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진철의 준비 신호와 함께 다시 촬영장이 기지개를 켜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디.”
“액션!”
* * *
“컷. 오케이! 여기까지! 다들 오늘 고생했어요.”
이예진과 유상우.
둘 다 연기력이 미친 것 같았다.
둘이 보여주는 연기력은 내가 밤을 지새우면서 졸린 것도 잊고 보게 했다.
아마 둘의 연기력이 아니었다면 밤을 새워서 찍는 게 힘들기만 했을 거다.
이신형 감독이 꽤 까탈스러워서 고생할 줄 알았는데 둘 다 감독의 의도를 빠르게 잡아서 촬영했는데도 아침 해가 떠 있었다.
실내촬영이기 때문에 내가 크게 나서서 현장 통제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좋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바라시 하겠습니다! 소품 정리할 때는 연출부를 꼭 찾아주세요!”
“야, 저거 정리할 때 조심해라. 저거 부수면 너 연봉 날아간다.”
이신형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촬영이 끝났고 감독과 주요 배우들이 이야기를 나누러 모여들었다.
그리고 분주히 정리하고 있는 스태프들 사이로 이진철이 나에게로 왔다.
“야, 넌 먼저 가라. 유 PD님이랑 이야기했어. 고생했다.”
“그래도 뒷정리는 같이해야지.”
“임마. 너 당장 지금 출근해야 하잖아. 됐어. 유 PD님이랑 이야기됐으니까 먼저 가. 어차피 장비 빼는 거 말고는 크게 없으니까.”
“진철아! 이 새끼 어디 갔어?”
“갈게요! 잠시만요!”
나보고 가라고 이야기하는 진철이를 두고 진철이를 찾는 이신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고생했다. 괜히 불렀나 싶기도 하네. 아무튼,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알았다. 갈게, 고생해라.”
“어. 수고.”
후. 그럼 이제 출근하러 가볼까?
오늘 하루 빡세게 버티고 바로 죽은 듯이 자야지.
“고생하셨습니다! 먼저 가볼게요.”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세요!”
이예진과 차태수 팀장이 오는 게 보였다.
혹시 회사로 가려나?
“팀장님. 혹시 회사로 가세요?”
“아니. 바로 예진 씨 집으로 가야지. 왜?”
“제가 이제 회사로 가야 하는데 혹시 회사 가시나 해서 여쭤봤어요.”
근처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이예진이 이야기했다.
“어차피 우리 집 가려면 회사 거쳐서 가는 길이잖아요. 팀장님 태워서 같이 가죠?”
“아, 네. 예진 씨만 괜찮다면야 저도 괜찮습니다.”
나랑 차태수 팀장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예진이 끼어들어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는 길은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아니야. 넌 꼴딱 샜잖아. 내가 하는 게 더 안전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예진 배우님.”
“그냥 선배님이라고 불러요.”
“네. 선배님.”
아무래도 예전에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예진이 예민했던 날인 듯싶었다.
이예진 덕분에 편하게 회사로 가게 됐다. 이 상태로 지하철 탔으면 백 프로 지하철에서 잤을 거다.
근데 가면서 잘 거 같은데 눈 뜬 상태로 갈 수 있을까?
“그럼 차 가지고 올게요. 현진아, 같이 가자.”
“네.”
그렇게 차태수와 같이 밴으로 가서 차를 끌고 이예진 앞으로 왔다.
이예진은 아무 말 없이 차에 타서 가만히 있었다.
“예진 씨. 출발하겠습니다.”
“네.”
앉아 있으니까 너무 졸리다.
어떻게 하지?
“현진 씨, 졸리면 자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오히려 그러는 게 더 신경 쓰여요.”
잠 깨려고 뒤척였던 행동이 뒤에서 보였나 보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요. 힘든 건 아니까요.”
본인도 밤 지새워서 힘들 텐데.
갑자기 이예진의 모습에서 휘광이 보이는 착각에 휩싸였다.
홍승기는 왜 이예진 보고 미친년이라 한 걸까.
“현진아. 그냥 자.”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대화가 기폭제가 된 듯 수마가 덮쳐왔다.
너무 졸렸다. 아, 모르겠다. 눈만 감고 있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