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시작은 천천히 (2)
“죄송한데 돌아 가주실 수 있을까요? 촬영 중이어서요. 죄송합니다.”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고 다른 길로 돌려보냈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이제 쉬는 날이 없을 텐데 왜 현장에 나와 있을까?
왜 나는 어제 이진철이에게 전화했을까?
왜 나는 어제 거절을 못 했을까?
후회가 막심이었다.
방을 구하는 대신에 일하러 나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영화 가을 동산 촬영 현장에 나와 있었다.
가을 동산은 진철이가 영화 연출을 배우고 싶어 했던 이신형 감독이 메가폰을 맡은 작품이었다.
“잘하고 있네.”
이진철의 목소리였다.
“왜 왔어? 브레이크야?”
이진철이 온지도 몰랐다.
언제 왔지?
“어. 조명 다시 손 봐야 한다고 조명팀에서 잠깐 시간 달라고 해서 왔다.”
“오늘 언제 끝날 거 같냐?”
이진철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초췌한 얼굴의 이진철 얼굴이 보였다.
나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
“그건 나도 모르지. 촬영이 언제 제시간에 끝난 적 있었냐? 항상 유동적이지.”
“디졸브는 안 하겠지? 나 내일 해 뜨는 거 보면 죽을지도 몰라.”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음.
나는 침음을 삼켰다.
오늘 밤새고 회사를 갈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느낌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내가 왜 쉬는 날에 이렇게 나와야 하는 거냐. 진철아?”
“내가 입 아프게 설명해야 해? 내가 너 얼마나 땜빵해 줬냐? 여기서 읊어줘?”
이진철이 애국가 4절까지 부를 기세로 말하길래 내가 고개를 급히 저었다.
“오케이. 거기까지. 하아, 제발 오늘 무사히 하루가 가길….”
“아무튼. 길어질 거 같으면 먼저 보내줄게.”
“미쳤다고 도중에 튀겠냐. 팔자려니 해야지.”
그래, 이게 팔자다. 사나운 팔자.
이진철도 피곤해 보였지만 즐거운 듯했다.
“근데 너 자퇴는 안 할 거야?”
“뭐하러 해. 나 계속 다니고 있다? 교수님이랑 쇼부쳐서 어떻게든 학고는 안 당하면서 다니고 있어.”
“징하다.”
“학교가 내 쉼터야.”
이진철과 오랜만에 만나 낄낄 웃으며 만담을 즐기고 있었는데 브레이크가 끝났는지 연출부 막내가 이진철을 찾으러 왔다.
“조감독님. 슬슬 슛 들어갈 거 같습니다!”
“어! 갈게! 야, 간다. 어차피 여기 사람 많이 안 오니까 상황 좀 보다가 들어와.”
“알았어. 가봐.”
이진철은 다시 촬영하러 사라졌다.
이신형 감독 스타일이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영화를 그렇게 잘 찍는 건가?
이신형 감독은 충무로에서 다 죽어가고 있는 멜로물을 찍고 있는 영화감독이다.
멜로로 영화가 흥행하기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다. 물론 흥행만 성공하면 투자 대비 얻는 이익은 다른 장르들보다 뛰어나긴 하다.
성공하는 게 개같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반적으로 멜로 영화는 투자금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투자금이 많이 안 들어가는데 왜 만들지 않을까?
이유는 멜로 영화가 그만큼 만들기 어려운 영화여서이다.
관객 수는 보통 투자금이 비례한다고 이야기 많이 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투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퀄리티가 올라가는 건 대부분 맞으니까.
업계 사람들끼리는 영화를 본 뒤 제작비를 들으면 반응이 둘로 나뉜다.
그것밖에 안 썼어? 와, 그렇게 많이 썼어? 두 가지 반응이다.
그것밖에 안 썼어? 라고 평한 영화는 대부분 평균 이상은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썼어? 라고 평한 영화는 대부분 평균 이하일 확률이 높다.
즉, 많이 썼는데 돈 쓴 티가 안 나는 영화는 별로라는 것이다.
별로인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쉽고 명확한 건 영화가 재미없어서이다.
아무튼, 이런 영화 시장에서 이신형 감독은 영화에 돈 쓴 티를 내는 감독이기도 했다.
“현진 씨. 할 만해요?”
“아, 오셨어요? 익숙한데요. 뭘.”
가을동화 제작 PD 윤진수.
윤진수는 돈 될 거 같은 영화 냄새를 잘 맡는 제작 PD라고 알고 있다.
“감독님이 좀 까다로우시죠?”
“까다로워도 돼요. 영화만 잘 찍어서 흥행 잘 시키면 되니까요.”
제작사 입장에서는 잘 찍고 잘 팔아주는 감독이면 만사 OK이다.
“이신형 감독님은 항상 못해도 손익분기점은 넘기셨었죠?”
“네. 다작은 안 하시는데 항상 찍을 때마다 평균은 해주시죠. 제작 입장에서 얼마 없는 믿고 투자할 수 있는 감독님이기도 하고요.”
영화감독이라고 첫 영화가 잘된다고 다음 영화가 잘되는 게 아니다.
작품 하나 찍고 끝인 감독도 많고, 하나 찍고 다음부터 다 말아먹는 감독도 많다.
그중 우리가 이름을 알 정도의 감독이라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윤진수 PD는 이번에 처음 보게 되었는데 정말 괜찮은 PD라는 생각을 했다.
하루 땜빵이긴 해도 나를 존중해준다는 게 물씬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윤진수 PD 제작사가 잘 나가는 것 같다.
“간혹 무리하게 요구하시는 게 있어서 좀 당황스럽긴 해도 이 정도 촬영장이면 매끄러운 편이죠.”
“하긴. 연출하다 보면 계속 욕심이 생기니까요. 그래도 이신형 감독님이면 마찰은 적은 편이죠?”
“네. 정말 그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번 작품은 너무 시달리고 너무 싸워서 힘들었거든요.”
PD만의 고충이 느껴졌다.
돈 문제로 감독이랑 PD랑 싸우는 경우는 생각보다 잦다.
나도 소싯적에 많이 싸웠지.
“그래도 그거 잘됐잖아요. 삼 형제였죠?”
“잘 안됐으면 화병 나서 이 작품도 못 했겠죠. 네, 맞아요. 그거. 아 그리고 현진 씨. 조금 있으면 이예진 씨 오시니까 알아두세요.”
“이예진 배우님이요?”
이예진이 이 영화를 찍었나?
바빠서 영화 흥행했다는 거만 알고 있었지 누가 나오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돌아오고 나서는 저번에 스치듯 본 게 처음이었는데, 너무 의외의 모습을 봐서 현장에서는 어떨지 자못 궁금했다.
“아, 이신형 감독님이랑 인연이 있어서 그냥 특별출연으로 잠깐 나오시는 거라.”
그럼 그렇지. 주연급이면 내가 기억을 못 했을 리가 없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어차피 여기에서 쭉 찍으니 조금만 더 고생해줘요.”
“네.”
윤진수가 그렇게 말하고 촬영하는 장소로 들어갔다.
영화를 찍을 때는 장소를 기준으로 찍을 때와 S# 기준으로 찍을 때가 있다.
영화에서 같은 장소 카페가 S#6, S#123 이렇게 나온다면 S#6과 S#123을 그날 다 찍는 것이다.
감정선을 중시하는 감독일 경우 S#1…S#123 이렇게 차례대로 찍는 감독도 있다고 하지만 제작비 여건상 대부분 중복되는 장소는 몰아서 찍는다.
윤진수가 가고 나서 마땅히 할 것도 없어 핸드폰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쇼케이스 반응을 살펴봤다.
[Re: 우리 애들 드디어 데뷔했네요. ㅜㅜ; 내일 혹시 리얼리티 단관 가시는 분?]
└ 저요! ㅎㅎ. 사진 첨부 합니다 꺼억. 나는 단관 너는 집에.jpg
└ 와 개 부럽네. 저거 인원 몇 명 안 뽑는 거 같던데. 내일 애들도 온다는 찌라시 있던데
└ 아 개 빡치네 부모님 만수무강하시길 빔
└ 패드립은 좀….
└ 만수무강 뜻 모르냐?
분위기는 좋은 것 같았다.
쇼케이스 이야기가 비율로 따지면 4~6 정도 됐고, 내일 방영되는 리얼리티 이야기와 오전에 있는 음악방송 사전녹화 이야기가 각각 2~3쯤 되는 것 같았다.
커뮤니티를 보다가 내일 일정에 대해서 다시 든 생각은 오늘 밤새워서 촬영하면 내일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었다.
오늘 밤새고 가면 내일 난 죽을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커뮤니티 반응을 보던 중에 밴 한 대가 들어왔다.
지금 여기에 밴을 타고 들어올 만한 연예인은 딱 한 명.
이예진뿐이다.
차에서 예상대로 이예진이 내렸다.
청순가련 여배우의 대명사. 이예진.
나이가 30을 넘었음에도 여전히 20대 같아 보였다.
그 뒤로 스타일리스트로 보이는 사람 한 명도 같이 내렸다.
“팀장님, 저 먼저 올라갈게요.”
“네. 주차하고 갈게요.”
“네.”
이예진이랑 스타일리스트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갑자기 어제 일이 떠올라 긴장되어 침이 목울대로 꿀꺽 넘어갔다.
“안녕하세요. 가을동화 스태프시죠? 촬영 어디서 하죠?”
“안녕하세요. 제 뒤쪽으로 쭉 가시면 촬영하고 있는 거 보일 거예요.”
이예진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예전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미소 지은 모습을 보니 조금 괴리감이 느껴졌다.
“네. 고생하세요.”
“고생하세요.”
나는 스타일리스트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예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예진이랑은 예전에는 회사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는데 이번에는 촬영장에서 인사를 나누게 됐다.
내가 본 건 저번이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서 예민하게 반응한 걸까?
지금 모습은 내 기억 그대로였다.
홍승기가 말했던 미친년이라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가?
연예인들 겉모습에는 상당히 가식이 깔려 있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이랑 작품을 같이 해본 게 아닌 이상 정확하게 그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연기자들의 본모습은 작품을 같이하다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자기관리가 철저해도 촬영을 하다 보면 본래의 성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지금 이예진을 다시 보니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뷔 때의 모습이랑 지금의 모습이 거의 똑같다.
데뷔 때랑 다른 점은 단지 나이에 의해 분위기가 있어 보이는 정도?
게다가 비단 배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체와 외모 관리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나온 성격도 모난 곳도 없는 것 같았다.
홍승기가 말한 미친년이라는 게 무얼 의미하는 걸까.
이예진과 스타일리스트가 가고 나서 뒤이어 이예진 담당 팀장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 너 왜 여기 있냐? 회사 때려치웠어?”
3팀 팀장 차태수.
아무래도 같은 매니저 식구이다 보니 팀이 달라도 종종 마주쳤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일하는 친구 때문에 땜빵 왔어요.”
“황당한 놈이네. 잠깐만, 너 스타즈 담당이지? 그럼 휴가 아니야?”
저도 황당합니다. 왜 제가 여기 있죠?
“네. 여기 조감독이 제 친구인데 제작부 한 명 도망갔다고 끌려왔어요.”
“조감독이면…. 진철 씨? 이야, 인맥 좋네. 왜 배우 담당 안 하고 거기로 갔냐?”
차태수 팀장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진철이 생각보다 이 바닥에서 유명한가 보다. 나는 잘 몰랐지만.
“담당을 제가 정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애들도 1년이고.”
“뭐 그렇긴 하지. 1년 뒤면 넘어오겠네. 촬영은 어디서 하냐?”
“제 뒤로 쭉 올라가시면 촬영하고 있는 거 보일 거예요. 이예진 배우님은 먼저 가셨어요.”
“차 안에서 예진 씨가 오늘 촬영은 아마 밤샘 촬영할 것 같다고 각오하라고 이야기하던데. 그럴 분위기야?”
“저도 오늘 와서 확답은 못 드리겠는데요.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차태수 팀장은 오늘 촬영이 언제 끝날지 걱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저보단 나으시잖아요.
“하, 또 골골대겠네.”
“전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내가 너보단 낫네.”
낄낄 웃던 차태수 팀장은 이내 자신의 할 일이 생각났는지 몸을 틀어 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알았다. 있다 보자.”
“네. 고생하세요.”
오늘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다. 윤진수 PD가 따로 말이 있던 건 이예진이 끝이었으니까.
가을동화 촬영은 점심 이후부터 계속 찍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벌써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서 여덟 시였다.
저녁 시간도 거르고 찍고 있는 거 보니 촬영 딜레이가 많이 된 듯싶었다.
저녁은 아까 윤진수 PD가 사온 거 같던데 언제 먹는 거지?
어차피 올 사람도 다 왔고 통제를 굳이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나도 올라가서 현장이나 봐볼까?
이예진이 방금 온 거 보니 이예진이 안 나오는 씬은 다 끝나가서 시간에 맞춰서 부른 거 같았다.
한번 현장으로 올라가 상황 보고 내려오던가 해야겠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촬영 현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나무처럼 길게 뻗어 있는 조명기가 보였다.
이진형 감독은 조명을 정말 화려하게 많이도 치는구나.
조명을 많이 쳐서 촬영 딜레이가 된 건가?
점점 현장이 가까워지자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아직 촬영 중은 아니고 소강상태인 것 같았다.
이내 촬영 현장에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요.”
“뭐? 다시 말해봐. 뭐라고?”
“감독님. 계속 이렇게 찍으시면 오늘 다 못 찍어요.”
뭔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