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3)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건 내 예상에 없던 상황이다.
“리얼리티요? 편성이 남나요?”
“어. 정규 편성 전에 1주 정도 편성이 비는데 얘네 리얼리티로 하나 찍어서 넣어도 될 것 같은데.”
“그게…. 제 선으론 확답을 못 드릴 것 같은데요. 잠시만요.”
리얼리티면 무조건 OK해야 한다.
리얼리티를 함으로써 얼굴을 더 알릴 수 있다. 안 하면 손해고 바보다.
일단 생각을 멈추고 급히 남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 뚜 – 뚜
신호음이 가는데 남진수가 전화를 받지를 않았다.
왜 안 오지? 이것도 바뀐 걸까?
초조하게 발을 굴리며 신호음이 가는 걸 기다리던 중에 남진수가 오는 게 보였다.
“아, 팀장님 오셨네요. 팀장님! 여기요!”
내가 부르자 남진수는 내 옆에 있는 최 PD를 보고 최 PD에게 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최 PD님. 죄송합니다. 회사에 일이 있어서 너무 늦게 왔네요.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뛰어왔는지 남진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 팀장님. 아닙니다. 애들 잘하던데요? 아, 그리고 혹시 애들 데리고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나 찍을 생각 없으세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요? 편성할 시간이 안 나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남진수가 이마에 맺혀 있는 땀을 닦으며 최 PD를 바라봤다.
게다가 최 PD가 리얼리티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한 듯 눈동자가 떨렸다.
“네. 근데 원래 배정받은 파일럿 프로그램이 날아가서요. 그래서 편성을 넣어야 하는데 오늘 애들 하는 거 보니까 애들 데리고 찍으면 그림 괜찮을 것 같아서요.”
“네. 물론 되죠! 혹시 그럼 촬영 날짜가 어떻게 되나요?”
“얘네 쇼케이스가 2주 남았죠? 쇼케이스 후에 가능할까요? 너무 바쁜가? 그래도 그냥 애들한테 붙어서 밀착관찰 프로그램 형식으로 진행해 볼 생각이라 그렇게 크게 상관은 없을 듯싶은데요. 어떠세요?”
이야기하는 흐름을 보니 순탄하게 프로그램을 따낼 것 같다. 상황이 너무 좋았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선에서 확실히 OK하긴 힘들고 확답은 회사 통해서 전달드려도 될까요? 아마 무조건 OK가 분명한데 혼자 결정하긴 힘들어서요.”
“네, 좋아요. 오늘 안으로만 이야기해 주세요. 안 되면 다른 편성 넣어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애들 방송 참 잘하네요. 신 PD님이 감각적으로 편집했다고 생각했는데 소스 자체가 좋았네요.”
“그럼요. 그 말도 안 되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애들인데요.”
이게 바로 나비효과인 걸까?
이렇게 상황이 바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긴장하며 상황을 보고 있는데 남진수와 대화 하던 최 PD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후배야. 매니저 생활 잘하고 나중에 다른 현장에서 만나자. 저는 그럼 이만.”
“감사합니다, 선배님. 들어가세요!”
최 PD가 그렇게 말하고 촬영장에서 벗어났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러나 최 PD의 말에 남진수는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며 심문할 기세로 해명을 요구하는 표정이었다.
“아, 저도 몰랐는데 최 PD님이 우리 학교 선배님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뭐? 이야~ 연영과 출신 매니저는 좀 다르네. 현장에 인맥도 있고. 다시 봤다. 야~”
“아닙니다. 우연히 만난 거라…. 방송 현장은 잘 안 계시고 보통 영화 현장에 많이들 계십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남진수는 조금 전만 해도 뛰어오느라 조금 헐떡였는데 이제는 정상적인 호흡으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애들은 잘 찍던?”
“네. 잘하던데요. 팀장님이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단련돼서 그런지 잘하네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올라온 애들인데 잘하지. 정리하고 회사로 넘어가자. 애들 연습실로 픽업하고 오늘은 먼저 퇴근해. 늦어서 미안하다. 앞에 일 처리가 너무 늦었네. 따로 전화 없길래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안 했어.”
“네. 알겠습니다. 특별한 일 없어서 저도 연락 안 드렸습니다.”
남진수에게 그렇게 말하고 팬 서비스를 열심히 하며 스태프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저희가 곧 가봐야 해서 빠르게 사진만 찍고 가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가겠다고 이야기하자마자 스태프들이 꽤 분주하게 애들과 사진 찍는 게 느껴졌다.
이내 얼추 현장이 마무리된 것 같아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애들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팀장님. 그럼 이제 어디로 가요?”
“너희 안무연습 해야지. 쇼케이스 얼마나 남았다고. 아, 그리고 너네 뮤직비디오 촬영 날짜 잡혔어.”
이나라가 다음 목적지를 묻자 남진수가 뮤직비디오 이야기를 했다.
남진수가 뮤직비디오 이야기를 하자 애들의 반응이 남달랐다.
“뮤비요!? 언제 찍어요?”
“다음 주. 10월 14일. 뮤직비디오 찍어야 하니까 체중 관리 잘해. 이건 찍히면 그대로 평생 간다.”
“아, 그렇죠. 평생 가죠….”
몸무게 이야기를 하니 급격하게 좌절하는 이나라였다.
아이돌들의 체중 관리는 항상 고달프다.
예외도 몇 명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예외다.
“일단 자율적으로 맡기겠지만 실패하면 다음부터는 회사 차원에서 관리 들어갈 거야. 너네 관리 받는 거 싫어하지? 자율로 할 때 잘해라. 알았지?”
“네! 그럼요!”
애들은 뮤직비디오 이야기에 표정이 생글생글해지다가 다이어트 이야기에 축 처진 강아지처럼 텐션이 내려갔다.
남진수가 앞으로의 일정을 알려 주면서 걷다 보니 차에 도착했다.
뒤에서 애들은 뮤직비디오와 다이어트 이야기로 한참 재잘재잘 떠들면서 왔다.
먼저 차에 타서 협소한 주차공간을 빠져나와 남진수와 아이들을 태웠다.
“팀장님, 그럼 회사로 가겠습니다.”
옆자리 조수석에 탄 남진수에게 이야기하고 회사로 출발했다.
* * *
헥사곤 E&M 지하주차장으로 다시 들어왔다.
퇴근 시간이 조금 넘어서 그런지 차들이 아침보다는 별로 없었다.
나는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남진수에게 다가갔다.
“오늘 고생했다. 내가 늦으면 안 됐는데. 근데 별 탈 없이 잘 진행했네? 매니저 처음 맞냐?”
“처음 맞습니다. 단지 제가 현장이 좀 익숙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남진수가 우스갯소리로 내게 이야기했다.
익숙하긴 익숙하지. 1년을 봤는데.
“앞으로 잘 부탁하고. 애들이랑 별 마찰 없으면 네가 1년 동안 애들 맡을 수도 있겠다.”
“그런가요?”
“뭐 딴사람 맡고 싶어?”
내 말투가 조금 탐탁지 않아 하는 것으로 보이자 남진수가 물어왔다.
그러나 나는 딴사람을 맡으면 안 된다.
나는 스타즈 애들의 정보만 빠삭하다.
“아닙니다. 저도 마무리 잘해서 애들 보내면 좋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다시 말하지만, 오늘 수고했고. 오늘은 할 일 없으니 이만 들어가 쉬어라.”
“애들 픽업은요?”
“오늘은 내가 할게. 들어가.”
계 탔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늦게 온 게 마음에 걸린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남진수랑 이야기를 나누는데 뒤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스타즈 애들이 인사했다.
아직 연습실로 안 올라갔었던 듯싶다.
“그래. 연습 잘하고 내일 보자.”
“네! 푸 매니저님도 들어가세요~”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지 유미소와 신희진이 제일 열렬하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리고 이내 모두 회사 안으로 사라졌다.
호칭이 예전보다 다양해졌다. 런닝맨, 런닝매니저, 푸 오빠, 오빠, 푸 삼촌, 푸 매니저님.
스타즈 애들과 남진수랑 인사하고 회사를 나왔다.
이 시간에 퇴근하는 건 정말 꿀과 같다.
예전에 애들이 망가져 있을 때는 크게 일이 없긴 했지만 이렇게 일찍 퇴근한다는 것 자체가 매니저에겐 축복이다.
매니저는 정해진 스케줄이 없다. 담당 아티스트 일정이 끝나면 그대로 쉬거나 업무가 있으면 업무를 보는 거고, 그거마저도 없으면 다른 연예인 지원을 가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퇴근이다.
조금 출출한데 사내식당에서 밥이나 먹고 갈까?
헥사곤 E&M은 사내식당이 맛있기로 유명했다.
제일 유명한 맛집은 대형기획사인 PM 기획사인데, 우리도 그 못지않게 맛있다고 평가가 좋았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냥 집에 가기로 했다.
일찍 퇴근할 수 있을 때 해야지.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다. 으슬으슬 추운 게 이제 겨울이 다가오나 보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난 뭘 하고 있을까?
* * *
집에 들어와 씻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거울로 비추어진 모습을 보니 젊어진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1년 젊어진 게 맞았다.
오늘 하루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일단은 지금, 책상에 앉아서 고민해봤다.
일단 나는 과거로 돌아온 게 맞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할머니를 도와줌으로써 과거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다람쥐 쳇바퀴 구르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달라졌던 점은 바로 어제 내가 할머니에게 14,000원을 뜯겼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으니까.
후회하는 일이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노래 불렀는데 막상 돌아와 보니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럽지만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벌써 내가 알던 미래랑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나비효과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비효과가 무서워 알고 있는 지식을 안 쓸 수는 없다.
그것만큼 미련한 짓이 어디 있나.
내가 이번에 애들을 보면서 확실히 느꼈다. 이 애들은 원석이라고.
내가 알던 미래에는 이 원석들이 처참히 망가졌지만, 이번엔 내가 가공해 볼 생각이다.
그렇다면 내 목소리, 내 힘을 키워야 하는데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생각해본 게 이런 그룹이 어떻게 그렇게 악재가 많이 터졌을까?
아무리 운이 중요한 연예계라지만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을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악재가 많이 터졌다.
평범한 아이돌들은 계약 끝나기 전까지 1~2개 정도 터지는 스캔들이 1~2달 간격으로 빵빵 터졌었다.
게다가 회사가 손쓸 틈도 없이 언론에 불이 붙었었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누군가 기획해서 아이들을 묻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든 상관없다.
이번에는 내가 모조리 부숴버리겠다.
미래를 아는데 대비를 못 하면 그건 바보다.
그리고 그 미래를 가지고 성공을 못 하면 그거 나름대로 문제가 있는 거다.
문제가 있으면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고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과거의 나는 아직 방송계를 뚜렷하게 알지 못하여 몸을 사렸었다.
그 이유는 군대에서도 하는 말이 있다.
뭐든지 중간만 하라고. 나대면 결국 자신만 손해 볼 거라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평균만 하는 거다.
내 과거 1년을 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내가 원하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크게 단축될 거로 생각한다.
이 바닥은 약육강식이란 말에 난 깊이 공감한다.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고, 도태되면 아래에 바로 먹힌다.
하지만 그 능력조차 운에 먹힌다.
이 바닥은 아무리 푸시를 해줘도 운이 없으면 작품이든 연예인이든 못 뜨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그 운을 잡았다.
그것도 확정적으로.
이제 방해물만 치우고 꽃길만 걷는 일만 남은 거다.
나는 맛있게 차려진 밥상을 다 먹어치우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너무 피곤해졌다.
너무나도 황당한 일을 겪으니 몸도 머리도 엄청 피곤한 듯싶었다.
일단 피로감을 식히기 위해 잠깐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우니 급격하게 몸이 무척 나른해졌다.
몸이 나른해지니까 그냥 자고 내일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설마 잔다고 내 기억이 어디 사라지지는 않겠지?
긴장을 놓자마자 피로감이 더욱 확 몰려왔다.
일찍 퇴근해서 피로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 버렸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정리해야겠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내게 일어난 것 같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