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말실수해서 얻어맞아.
악성 팬들이 애들 패고 다녀.
노래 표절로 엮이고.
그룹에 왕따설 돌아.
힘들다고 딴 곳으로 가.
프레임 씌워서 물어뜯어.
6~7년 차 아이돌이냐고?
아니야.
단, 1년!
1년, 1년 된 아이돌이야.
이런 그룹이 어디 있냐고?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근데 다시 맡아야 한다고?
이걸 어떻게 하지?
제1화. 거꾸로, 그리고 다시…. (1)
“계약은 여기까지만 하죠.”
내가 회의실에서 나오면서 들었던 소리다. 회사 밖으로 나오면서 생각했다.
아, 얘네는 여기까지구나….
무수히 많은 아이돌이 1, 2년 안에 사라진다. 3년 이상 넘어가는 아이돌은 정말 매력 넘치는 거다. 사람들이 계속 봐주는 거니까. 아이돌은 매력이 없으면 얄짤없다.
아이돌 시장은 지금 과포화 상태다. 그래도 지금도 아이돌 기획으로 인생 한 방 역전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
왜? 돈이 되니까. 그중에서 성공한 기획자는 많지 않다.
내가 지금 있는 회사의 정 대표가 아이돌로 크게 성공한 게 사람들 마음에 불을 질렀다.
기존에 있던 대형기획사에서 나와 혼자 기획해 만든 아이돌을 밑바닥부터 국내 정상까지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대단한 거다.
쏟아지는 아이돌 시장 속에서 맨 밑바닥에서부터 국내 정상급 아이돌 그룹으로 키우기는 쉽지 않다.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최근 들어 중소기획사가 10여 년간 성공한 역사가 없었는데 바늘구멍처럼 좁은 구멍을 통과해 당당히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배우들도 전투적으로 영입하여 회사의 덩치를 키웠다.
“거, 앞에 지나가는 처자. 잠깐 시간 좀 내주어.”
지나가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에 부딪혀 상념이 달아나 버렸다.
오늘은 매니저 생활 중에 얼마 없는 조기 퇴근이었다.
가만히 있으니 추위가 와 닿고 얼굴이 따가워지기 시작해 나는 몸을 떨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내려가는데 돈이 없어서 그러는디 노잣돈 좀 주면 안 될까?”
“죄송한데 할머니. 제가 현금이 없어서요.”
바로 앞에 할머니와 젊은 여성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좋게 말하고는 있지만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할머니가 붙잡으려 하자 여자는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바로 지근거리라 할머니가 나에게 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쳐 있는 표정의 할머니가 들고 있는 분홍색 보따리가 유독 크게 다가왔다.
아, 젠장…. 나 이런 거 거절 잘 못하는데.
“총각, 내가 내려가야 하는데 돈이 없어. 노잣돈 좀 주면 안 될까?”
“어디로 가세요? 할머니?”
“으응. 그 머시야. 먼 데 내려가. 그래서 그러는디 노잣돈 좀 줘.”
“아…. 그러세요? 잠시만요.”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서 현금을 살펴보니 세종대왕님 한 장. 퇴계 이황 선생님 네 장.
지갑을 보느라 앞을 못 봤지만,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뒤통수가 따가운 거 보니 어마어마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러면 나가리인데.
“얼마가 필요하세요?”
“나 돈 하나두 없어! 근데 내가 먼 데 가야 혀.”
할머니들을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내가 어릴 때 교통사고로 눈앞에서 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나는 할머니들한테 너무 약해졌다.
그래서 맨날 할머니들만 뵈면 한없이 약해지고 멍청해졌다. 앞에 할머니를 보니 다시 우리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휴, 이번에도 그러네. 멍청이.
“할머니. 제가 가진 게 이거밖에 없어서요. 어디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거면 대중교통 이용하셔서 서울이나 경기도권은 다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응, 고맙네. 고마우이… 근데 총각. 그 지갑 안에 있는 그건 뭐고?”
지갑 안에 껴 있는 부적을 보셨는지 나에게 물어왔다.
할머니가 가지고 다니면 복 들어온다고 꼭 가지고 다니라고 했던 부적이었다.
“아, 이건 제 할머니 생전에 당신의 어머니가 주셨다고 했는데 저한테 주셨어요. 부적 삼아서 지갑에 넣고 다니고 있죠.”
“그려…? 아무튼 고마우이. 복 받을 거여.”
복이라…. 언제 복이 올까.
복이 오면 들어 와야 하는데 또 털렸다. 카드만 들고 다닐 걸 하는 후회가 생겼다.
그래. 마음 편하게 먹자.
“아니에요. 할머니 어디로 가시는지는 아세요?”
“응. 노잣돈만 있으면 되어야.”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이야기를 마치고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돌아섰다. 근데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니 좀 찜찜했다.
치매 걸린 노인네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직업이 누구를 서포트 하는 일이다 보니까 오지랖만 생긴 것 같다.
내 식구만 챙기면 되는데.
그래도 마음이 찜찜한 것보다 확실하게 도와드리고 가는 편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
뒤를 돌아봤는데 할머니가 온데간데없었다. 이상했다.
일방통행로라 이렇게 빨리 사라질 수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찾아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모르겠다. 알아서 잘 찾아가시겠지. 집에나 가자.
* * *
집에 와서 씻고 로션을 바르는데 앞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참 퀭했다. 씻고 왔는데도 초췌해 보였다. 거울을 보며 양손으로 뺨을 쳤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어서 그런가? 막 사회에 나왔을 때는 정말 쌩쌩했는데.
이렇게 단기간에 확 늙기도 힘들 텐데 참 우스웠다. 괜히 더 피곤해졌다. 나는 침대로 가서 누운 뒤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스타즈 마무리……]
[(속보) A씨 음주운전으로 입건]
[충무로의 떠오르는 샛별! 크랭크인! 이진철 감독 인터뷰]
[음악 방송 1위! 뒤늦게 반등하는 소녀들! 역주행을 달려서!]
[떠오르는 신예 그룹, 일곱 빛깔 아이틴티.]
[(단독) 기획사! 충격 실태! 민낯을 낱낱이 알아보자!]
역시 우리 애들 기사가 거의 없었다. 딱 하나뿐이었다. 망한 아이돌이 해체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
설령 기사가 많았어도 어차피 회사에서 막았을 것이다.
좋은 기사가 떠도 그룹이 망했기 때문에 회사 브랜드 인지도만 깎아 먹는다고 분명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마지막 콘서트도 안 하고 끝내는 건 아쉬웠다.
유종의 미는 거두는 게 좋지 않나?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은…. 애들도 처음에는 참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이렇게 생각나는 거 보면 1년 정도 맡았다고 그새 정이 들었나 보다. 해체한다고 하니 힘들었던 지난 1년이 떠올라 싱숭생숭했다.
근데 난 그럼 이제 누굴 맡게 되려나? 2팀으로 넘어가게 되나?
오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집에만 오면 긴장이 풀려 나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오늘은 모처럼 일찍 누워 볼까….
* * *
“일어났니?”
꿈인가? 엄마 목소리가 들리네.
머리가 지끈거려 터질 듯이 아팠다. 이런 느낌은 술을 한계치까지 먹고, 필름 끊기고 다음 날 술병 났을 때의 기분이었다.
신호가 배 속에서부터 식도로 무섭게 올라오고 있었다.
“웁… 웁….”
방에서 토하기 전에 빠르게 나와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와중에 드는 머릿속의 생각은 온통 물음표였다.
“우웩. 우웨에에엑…. 꺾…. 꺾…. 우웩.”
“…….”
“허억, 헉…. 하악. 퉤.”
결국 변기를 붙잡고 토하기 시작했다. 술병 났을 때도 이렇게 토한 적은 없었다.
계속해서 억억 하면서 위액만 변기에다 뱉었다. 토하는 와중에 생각을 해 봤다.
나는 분명히 독립했다. 일이 너무 바빠서 집 - 회사 구간을 도저히 커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엄마 목소리가 들릴까?
그리고 여기는 독립하기 전 본가였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괜찮아?”
화장실 문 뒤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아리송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냥… 그냥… 머리가 아파서…. 어… 음….”
엄마가 말을 거는 이 상황이 정말 낯설었다.
그리고 깨질 듯한 두통은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회사 가서 아프다고 하고 병원 좀 가. 신입이라고 눈치 보지 말고.”
“어… 아냐. 엄마가 왜 여기…. 아니야. 별거 아냐. 지금은 괜찮아.”
“뭐 잘못 먹었어? 웬 헛소리야.”
내가 신입? 뭐야 이거? 꿈인가? 아니 꿈일 리가 없는데.
꿈에서 토하고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린가.
변기와 눈싸움 하느라 뒤에서 들린 엄마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평소의 우리 엄마였다.
“지금 너 시간 아슬아슬하니까 일단 빨리 씻어.”
엄마가 그렇게 얘기하고 다시 나갔다. 멍하니 가만히 있다가 씻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뺨을 두어 번 세게 때리고 앙증맞게 걸려 있는 칫솔을 들고 이를 닦기 시작했다.
내가 신입이면 오늘이 며칠이지? 과거로 돌아온 건가?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면 그 모든 게 꿈?
꿈은 확실히 아니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는 선명했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갑자기 또 머리가 너무 아파 왔다.
일단 씻자.
아무 생각 없이 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쳐 앉아서 핸드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해 봤다.
[10월 9일]
날짜를 보며 잠시간 아무 생각 없이 하염없이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10월 9일이라….
10월 9일이면 입사하고 5일째다.
내가 회사 들어간 날은 정확히 기억한다. 10월 5일은 내가 정 대표가 있는 헥사곤 E&M에 들어간 첫 입사 날이었다.
어제가 1월 7일이었으니까…. 얼추 1년? 정확히는 14개월 정도 돌아온 셈이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이 맞다는 가정이 붙지만.
그리고 10월 9일.
오늘은 내가 처음 아이들을 만난 날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팬들과 틀어졌던 날이기도 하다.
10월 9일. 이날 처음 헥사곤에 온 애들이 회사를 구경한답시고 회사 정문에서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스타즈 멤버 중 한 명을 따라다니던 팬 때문에 애들이 겁을 먹었었다.
애들은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회사에 숨겼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던지 데뷔 초기에 팬들에게 너무 냉담하게 대했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애들 통해서 들었던 정보였다.
그래서 초기부터 바짝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할망정 거리를 두니 화제성을 얻고 데뷔해서 벌써 탑 스타병 걸렸다며 삐걱거렸었다.
이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과거로 돌아왔든, 꿈이든 중요한 것은 또 똑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설령 개꿈이고 착각이라고 해도 미리 가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또다시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건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빠르게 몸을 움직여 청바지에 간단한 맨투맨 그리고 두꺼운 겉옷 하나를 걸치고 집을 나왔다.
나오니 날씨는 정말 쾌적했다. 조금 쌀쌀하지만 쨍한 햇빛,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딱 좋은 가을 날씨였다. 어제만 해도 바람이 너무 세서 따가웠던 느낌이었는데 세상모를 일이다.
조금씩 뛰어가며 주위를 보니 나와 같이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여성. 느긋하게 가는 학생.
저들도 지금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까?
정말 돌아온 걸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뛰다 보니 어느새 역 앞에 도착했다. 역 안으로 들어가 개찰구 앞에서 카드를 태그하는데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안 보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준 부적이 어디 갔는지 사라졌다. 태그를 하고 지하로 내려가 전철을 기다리면서 생각해 봤다.
그 부적이 과거로 돌아오게 해주는 부적이었나? 근데 왜 갑자기? 내가 어제 뭐 특별한 거 한 게 있나?
어제 특별한 거라곤 할머니한테 돈 드린 것밖에 없었는데.
다시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러자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어제 할머니한테 얼마를 줬더라.
그래. 14,000원 드렸었지. 그리고 지금 돌아온 날짜가 얼추 14개월 전이니까….
- …지금 장암행. 장암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전철을 타면서 다시 생각해 봤다. 원래 있던 부적이 없어질 리가 없었다. 난 이걸 지갑에 넣고 빼 본 적이 없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압축 프레스기에 압축된 것 마냥 낑겨 가면서 다시 정리해봤다.
그 할머니가 되돌아오게끔 해준 걸까? 할머니 신이 누구 있지?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삼신 할매뿐이었다.
그럼 내가 다시 뒤돌아봤을 때 안 보인 게 아니라 사라진 거였을까.
돈도 달라고 할 때 현금이라고 이야기 안 하고 노잣돈이라고 표현하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저승으로 가는 길이셨던 건가?
이내 갑자기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노잣돈으로 준 만큼 과거로 되돌아오게 해준 거라면…?
아, 제길.
왜 현금이 14,000원뿐이었던 거야. 한 10만 원은 들고 있었어야지. 아니, 한 20만 원쯤 있었다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현금을 그렇게 들고 다닐 일은 없다. 그리고 내가 할머니한테 약하다지만 그 돈을 다 줬을 리도 없었다.
- 이번 역은 이번 역은 학동, 학동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벌써 내릴 시간이 됐다. 이 답답하고도 지옥 같은 곳을 이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독립했을 땐 회사가 가까워 출근 지옥철을 안 겪었는데 오랜만에 겪으니 적응이 안 됐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편으로는 초조했다.
내가 시간에 맞춰서 온 걸까?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걸까?
내려서 역 바깥으로 나오니 바로 회사가 보였다. 값비싼 강남땅에 혼자 유독 옆 건물보다 우뚝 솟은 빌딩.
그리고 그 앞에 내가 담당했던 애 중에 두 명이 보였다.
또 그 옆에 이상한 남자도.
“…내, 내가…. 데뷔할 수 있게 뽑, 뽑아 줬는데….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는 돌아온 게 맞는 것 같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