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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나이츠-118화 (118/125)
  • # 118

    헬 나이츠 5권 (18화)

    알렌은 다시 그들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시종 한 명이 뛰어왔다.

    “단장님, 단장님!”

    “왜 그러느냐?”

    “지금 백작님께서 찾으세요. 지금 당장 집무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알았다.”

    대답을 마친 알렌이 부기사단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부기사단장.”

    “네, 단장님.”

    “나는 잠시 백작님을 만나고 올 테니까, 그동안 자네가 훈련 지도를 맡고 있게.”

    “네, 단장님. 다녀오십시오.”

    알렌이 부기사단장에게 훈련을 맡기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알렌은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두드렸다.

    “알렌입니다.”

    “들어오세요.”

    아이린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알렌은 잠시 움찔하다 이내 문손잡이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제이크, 아이린, 네빌 집사, 아크, 이렇게 네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집무실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이크와 아이린, 네빌은 평상시 그 분위기지만, 아크만큼은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렌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고하였다.

    “알렌, 백작님의 부름에 왔습니다.”

    “일단 앉게.”

    제이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렌은 바로 착석하였다. 그런데 제이크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에 알렌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이것 때문이네.”

    제이크가 말을 하며 옆에 앉아 있던 네빌 집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네빌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알렌은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동자가 커지며 연신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알렌이 강력하게 부인하며 서신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다시 주워 든 네빌 집사가 입을 열었다.

    “지난 기사단 회식 때 뭐하셨습니까?”

    네빌 집사의 물음에 알렌은 눈을 깜빡이며 그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러자 이내 찰스의 가게에서 만난 그녀가 떠올랐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난 후, 말도 없이, 그 흔한 메모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난 그녀를 말이다.

    “서, 설마…….”

    알렌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저, 전 정말 몰랐습니다. 로라는 그냥 술집에서 만난 것이 다였습니다.”

    알렌이 언성을 높이며 항변하였다.

    알렌은 정말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실 그것이 진실이었기에. 하지만 지금 상황은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어쨌든 이미 자신은 그녀를 강간한 범인으로 몰린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애첩을 강간한 알렌을 후버드 후작이 원하고 있었다. 만약 내놓지 않으면 영지전도 불사하겠다고 경고까지 남겨져 있었다.

    네빌 집사가 조용히 말했다.

    “어쨌든 후버드 후작의 애첩과 잠을 자기는 했군요.”

    “으음…….”

    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후버드 후작의 애첩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물론 그녀가 자기 입으로 말하기도 뭐한 상항이지만, 굳이 자신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알렌에게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알렌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하지?”

    아크가 물었다.

    “뭘 어떡해요? 알렌을 내주면 안 돼요.”

    “그럼 정말 영지전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죠.”

    아이린이 강하게 말했다. 제이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이건 국가 간의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네빌 집사가 말을 하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알렌이 입을 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

    “잉?”

    알렌의 말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그건 안 될 말이에요.”

    아이린이 강하게 말했다.

    “이제야 겨우 안정을 찾은 영지입니다. 그런데 저 하나 때문에 전쟁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저 하나만 가면 좋게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절 보내주십시오.”

    알렌이 침통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듣던 제이크가 알렌에게 말했다.

    “이것은 단장의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 그럼?”

    알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단장 자네를 넘겨주면 나의 입장은? 우리 입장은 뭐가 되냐는 말이야. 후버드인지 하버드인지, 그 새끼가 무서워서 백작가의 기사단장을 그냥 넘겨준다고 우습게 생각할 것 아닌가. 단장은 나를 그런 우스운 놈으로 만들 셈이야?”

    “그, 그건 아닙니다.”

    알렌이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잠자코 있어. 싸움을 걸어오면 싸우면 되는 거야. 요즘 내가 너무 조용히 있었어. 이참에 확 쓸어버리면 되는 거야.”

    제이크는 전에 없이 무서운 눈빛으로 말을 하였다. 아이린도 살짝 몸을 떨며 말했다.

    “여보…….”

    그녀의 부름에 제이크가 피식 웃었다.

    “말이 그렇다고. 그보다 이번에는 처남이 나서는 것이 어때?”

    “제가 말입니까?”

    아크가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선봉에 서면 모양새도 좋고, 무엇보다 좋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한 번 꼭지가 돌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서 말이지.”

    제이크는 그리 말을 했지만, 그래도 왕국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아크가 전면에 나서준다면 주변 영지들에도 그렇고, 확실히 모양새가 좋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크 본인도 그동안 받기만 했지 동생을 위해서, 영지를 위해서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도움을 주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제가 선봉에 서서 녀석들을 처리하겠습니다.”

    아크는 강하게 눈빛을 반짝이며 의지를 다졌다.

    2

    마론 왕국의 국왕은 편안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매일매일 올라오는 국정 보고는 조금 전 서류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고, 이제는 오랜만에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이 시간에 마시는 차는 그야말로 달콤한 사탕과도 같았다. 그때,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다.

    “국왕 전하, 젤만 공작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시종이 허리를 굽힌 채 말을 했다. 순간, 국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신만의 휴식 시간을 방해한다는 것에 짜증이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저 시종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국왕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찻잔을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젤만 공작이 직접 알현을 청하는 것이라면 자신도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것은 괘씸하지만, 그래도 귀족들 중 정점에 올라있는 인물이었다. 젤만 공작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귀족들이 많았다.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권력이 강하다 해도 젤만 공작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국왕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들라 하라.”

    “네, 전하.”

    시종이 조용히 물러났다. 국왕은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젤만 공작이 들어오며 인사를 하였다.

    “전하를 뵈옵니다.”

    “어서 오시오, 젤만 공작. 이리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젤만 공작이 국왕 옆으로 가서 앉았다. 국왕은 그런 젤만 공작을 보며 물었다.

    “젤만 공작께서 이 시간에 왕궁에 어인 일이시오?”

    “하하하, 저야 항상 국정을 돌보시는 전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잠시 여행을 하던 중 바다 건너 낭만국에서 전하께 딱 좋은 것을 구해 이렇게 왔습니다.”

    낭만국에서 물건을 가져왔다는 말에 국왕의 표정이 바뀌었다. 바닷길로 일주일가량 가면 낭만국이 있었다. 거기서 나오는 신기한 약재와 보석, 그리고 모형물들은 이곳 마론 왕국에서 아주 희귀한 물건으로 통하고 있었다. 낭만국 사람들은 손재주 또한 좋아 미술품과 도자기까지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렸다.

    국왕은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눈을 빛냈던 것이다.

    “허허허, 젤만 공작은 좋겠소. 낭만국까지 여행도 다녀오시고 말이오.”

    “어찌 저 좋다고 그리하겠습니까. 이것이 다 국왕 전하를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나를 위한 여행이란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국정을 돌보시는 전하께서는 낭만국에 가고 싶어도 그 여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친히 가서 그곳에 대해 알아보고, 외교도 쌓으며, 이래저래 전하께 도움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아, 다 짐을 위한 일이었단 말이구려.”

    “네, 전하.”

    젤만 공작의 입에 발린 말에 국왕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사탕발림이 아주 좋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젤만 공작이 밖을 향해 박수를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두 사람이 양쪽으로 잡고 들어온 것은 하나의 액자였다. 흰 천에 둘러싸여 있어 내용은 확인이 되지 않지만, 딱 봐도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제가 전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런가?”

    “네, 전하.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시게.”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젤만 공작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한 명이 흰 천을 걷어냈고, 그 안에 그려진 그림이 국왕의 눈을 사로잡았다.

    “오오오, 아름답구려. 정말 아름다워.”

    “하하하, 맘에 드실 줄 알았습니다.”

    국왕은 액자 속에 그려진 그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 쪽으로 향했다.

    액자에 그려진 화려한 색채와 색감은 국왕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국왕은 한참을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 뒤에 서 있는 젤만 공작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 낭만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가의 솜씨랍니다.”

    “오호, 그런가?”

    “네, 전하. 전 최고가 아니면 구하지 않습니다, 전하.”

    젤만 공작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하였다. 국왕은 다시 그림 속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바라보던 국왕이 입을 열었다. 물론 국왕의 시선은 그림에서 떼지 못한 채였다.

    “젤만 공작.”

    “말씀하십시오, 전하.”

    “이만한 그림을 짐에게 그냥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게 부탁할 것이라도 있는 것이오?”

    “하하하, 전하. 그리 말씀하시니 서운합니다. 전 그저 낭만국으로 간 김에 전하께 딱 어울리는 그림을 발견해서 이렇듯 가져온 것뿐입니다.”

    “그런가? 그냥 주는 것이다, 이 말이오?”

    “하하하, 물론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제이크 백작가에 있는 왕국의 기사에 대해서 잠시 드릴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젤만 공작의 말을 들은 국왕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국왕은 ‘그러면 그렇지’란 표정을 지은 후 몸을 돌려 뒷짐을 졌다.

    “왕국의 기사? 그자가 왜?”

    “얘기가 길 것 같습니다.”

    젤만 공작이 은근히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알겠소. 차를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를 해봅시다.”

    국왕이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사이 젤만 공작은 그림을 가지고 온 시종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시종들은 곧바로 그림을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젤만 공작은 곧바로 몸을 돌려 국왕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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