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헬 나이츠 5권 (17화)
찰스가 투명한 유리잔을 꺼내 알렌 앞에 두고 그 안에 갈색의 위스키를 부었다. 약 1/3가량 부었을 때, 찰스의 손이 멈추었다.
“여기 있습니다.”
알렌은 갈색 빛이 감도는 위스키의 향기를 우선 맡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크윽.”
맥주와는 또 다른, 강력한 알코올이 목을 불태우며 식도를 훑고 내려갔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알렌에게는 너무 좋았다. 왠지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한동안 뜸했습니까?”
“최근에 훈련이 좀 많았네. 그보다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한가?”
알렌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자 찰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알렌 님께서 좀 일찍 오신 겁니다.”
“아, 그런가?”
그런 말을 하며 다시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켰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알렌이 말했다.
“한 잔 더.”
“네.”
찰스가 다시 잔을 채웠다. 잔이 거의 찰 때쯤,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입구로 향했다.
그곳으로 몸에 짝 달라붙은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들어왔다. 검은 피부를 가진 그녀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실내를 한 번 훑고는 바텐더가 있는 테이블로 이동하였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찰스가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마티니 한 잔 주세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매혹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찰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여태까지 이렇게 고혹적인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알렌도 마찬가지였다. 들어온 순간부터 알렌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평생 저렇듯 매혹적인 여인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꼬았다. 그러자 옆이 터진 드레스 사이로 그녀의 허벅지가 드러났다. 매끈하게 뻗은 그녀의 허벅지가 알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티니가 나오는 동안 그녀는 작은 담배 파이프를 꺼냈다.
그러자 곧바로 찰스가 다가와 그녀의 파이프에 불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담배 파이프를 빨고, 한숨을 내쉴 때 뿜어져 나오는 연기마저도 매혹적이었다. 알렌은 술을 마시는 것도 잊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비록 작은 술집이라 하지만, 가게 안이 온통 그녀의 향기로 가득하였다. 알렌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자신이 태어나서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미녀였다. 섹시한 것은 둘째 치고, 남자의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알렌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게 안에는 자신과 그녀, 바텐더인 찰스,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알렌은 다시 시선을 돌리려고 하다가 움찔 놀랐다.
구석에 있던 그녀가 어느새 자신 눈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알렌은 순간 놀란 눈으로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붉은 입술로 시선이 갔다.
알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서 장미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향기를 맡은 알렌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하지만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그녀의 손아귀에 딱 걸려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당신…….”
“네, 네에?”
알렌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 자꾸 절 힐끔힐끔 쳐다보죠?”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며 다시 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대뜸 말하였다.
“봐요, 지금도 쳐다봤잖아요.”
“그, 그거야, 가까이 있고, 또 물어보시니까…….”
“정말 그게 다예요?”
“그, 그리고…….”
“그리고?”
“당신은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알렌의 아름답다는 말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로라예요. 당신은?”
“네에?”
“당신 이름이 뭐냐고요.”
“아, 알렌…… 알렌입니다.”
“아아, 알렌 씨.”
로라는 알렌의 이름을 되새김질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보던 알렌도 몸을 돌려 자신의 술을 마셨다.
“알렌 씨는 여기 단골이신가 봐요?”
“네, 그렇습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들르는 곳입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그럼 제가 지금 방해를 한 건가요?”
“아, 아닙니다. 절대!”
알렌은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그러자 로라가 대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알렌은 마치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하였다. 눈까지 풀리며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는 생긋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방해가 안 된다면 저랑 한잔해요. 오늘 저도 혼자 있고 싶었는데, 알렌 씨를 보니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생각이 드는데…….”
로라의 뜻밖의 제안에 알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로 승낙을 해야 할까, 아님 거절을 해야 할까?
이런 아리따운 미녀가 같이 한잔하자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뭐, 어때?’
알렌은 생각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럽시다. 저도 오늘은 왠지 미인과 같이 한잔하고 싶네요.”
“호호호, 미인? 제가 그렇게 아름답나요?”
로라는 몸을 살짝 돌리며 매혹적인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알렌은 지금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알렌은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작게 말했다.
“그, 그렇소.”
“아이, 좋아라.”
로라는 천진난만한 아이마냥 좋아했다. 그 모습이 알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장장 두 시간가량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로라가 얘기를 하고, 알렌이 그 얘기를 들어주며 동조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는 사이 술은 점점 더 들어가고, 취기가 올라왔다. 로라도 취기가 올라오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몸을 살짝 비틀거렸다.
“으음, 저 취했나 봐요.”
로라의 말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소. 물론 나도 취했지만. 그만 마시죠.”
“네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을 하며 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그녀가 몸을 휘청하며 넘어지려 하였다. 알렌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였다.
“괘, 괜찮아요.”
로라는 알렌의 부축을 받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그녀는 이내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알렌은 약간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때, 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렌 씨, 당신이 그녀를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찰스의 말에 알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긴 지금 이 가게에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바로 자기밖에 없었다. 알렌은 기절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바로 안아 들었다.
“먼저 가네.”
알렌은 찰스에게 말을 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그 뒤로 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안한 밤 보내게.”
알렌은 찰스의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관으로 로라를 데리고 갔다. 로라가 기절만 하지 않았다면 물어서라도 그녀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 데리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기절한 그녀를 다시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알렌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근처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물론 주위에서 제법 깨끗하고 좋은 곳으로 갔다.
여관방으로 들어간 알렌은 자신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혹여 그녀가 깰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알렌이 팔을 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는 두 팔이 있었다. 알렌은 깜짝 놀라며 손의 주인을 확인하였다.
바로 로라였다. 조금 전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였는데, 어느새 두 눈을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고 있던 것이 아니었소?”
하지만 그녀에게서 답은 들려오지 않고, 대신 그녀의 매혹적인 입술이 다가와 알렌의 입술을 덮었다.
“웁!”
알렌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알렌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와 깊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침대로 스르륵 무너졌다.
이 일로 인해 어떤 엄청난 결과가 닥칠지, 알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Episode 47 영지전(上)
1
밝은 햇살이 창가로 스며들며 서서히 침대를 비쳤다.
그곳에는 구릿빛 피부의 넓은 등판을 드러낸 채 엎드려 누워 있는 알렌이 있었다.
그는 얼굴에 따스한 햇살이 비쳐지자 절로 눈을 찌푸렸다. 그것도 잠시. 알렌은 곧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의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알렌은 잠시 눈을 찌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관에 있는 자신을 보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찰스의 가게에서 만난 그녀. 그리고 뜨거웠던 하룻밤.
하지만 지금 옆에는 그녀가 없었다.
메모도, 간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었다.
알렌은 순간 서운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메모라도 남겨주지…….”
알렌은 그녀가 떠난 것이 아쉬운지, 아님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괴로운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남겼다.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알렌은 옆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하나둘 챙겨 입었다.
그러면서 로라를 생각하였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알렌은 자신의 옷을 다 입었다. 그러고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은 물론, 다른 곳도 세세하게 살폈다. 혹여 메모를 남겼는데 다른 곳으로 떨어진 것은 아닌지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구석구석 확인을 해봐도 그녀의 메모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자 더욱더 서운함이 들었다.
“아무리 하룻밤 사이라고 해도…….”
알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옷을 다 챙겨 입고 나서 잠시 침대를 바라보며 미련이 남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잠깐. 알렌은 언제나 그랬듯 어느새 무심한 표정으로 바뀌며 여관방을 나섰다.
그로부터 삼 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알렌은 여전히 연병장에서 훈련을 지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똑바로 못하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들을 못해!”
“죄송합니다!”
“내가 휴가 때 너무 풀어놓았나? 그런 것인가?”
“아닙니다!”
기사들의 힘찬 대답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부기사단장이 말했다.
“자자, 정신 차리고 다시 해보자.”
부기사단장의 지도하에 전술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이 지금 하는 전술훈련은 기존에 있던 것을 조금 변형하여 반복 숙달하는 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