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헬 나이츠 5권 (16화)
그렇게 말을 하고는 후버드 후작과 함께 천천히 복도를 따라 응접실로 걸어갔다.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었는가?”
“괜찮았습니다. 그보다 밀들이 아주 잘 익었더군요.”
“하하하, 그런가? 이번 년은 좀 잘된 편이더군.”
“그럼 밀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나눠야겠군요.”
“언제든지 말하게. 자네에겐 항상 열려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를 하면서 응접실로 이동하였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다르나 자작이 옆에 서 있는 메이를 보며 말했다.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나 자작은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에 잠시 말을 잃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뒤를 메이가 천천히 따라갔다.
응접실로 안내된 후버드 후작은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오오, 이것이 바로…….”
“그래, 드레인 티라네. 어서 마셔보게나.”
“드디어…….”
후버드 후작은 아주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선 코로 가져가 향기부터 맡았다.
“으음, 역시 향기가 좋군요.”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맛도 일품이라네.”
“그럼 어디…….”
후버드 후작은 천천히 드레인 티를 음미하였다. 한 모금을 입안에 넣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 눈을 감은 후버드 후작의 입안에서는 깨끗하면서도 때론 쓴맛과 달콤한 맛이 조화롭게 맴돌았다.
그리고 목울대가 움직이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그 향기가 다시 올라와 입안을 다시 채웠다. 후버드 후작은 매우 흡족한 미소를 띠며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드레인 티의 맛을 음미한 후,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역시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차군요.”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내 좀 챙겨 주겠네.”
“정말이십니까?”
“허허허, 정말이네.”
젤만 공작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후버드 후작의 손이 자신의 튀어나온 배 위에 올려졌다. 그는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젤만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번 초청과 환대, 게다가 이런 좋은 차까지. 그냥 받기에는 부담스러운 것들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후버드 후작의 말에 젤만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자네는 단도직입적이구먼. 좋네, 나도 직접적으로 말하겠네. 날 좀 도와주게.”
그 말에 후버드 후작의 눈빛이 바뀌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후버드 후작의 물음에 젤만 공작이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네, 제이크 백작을 아는가?”
제이크란 말이 나오자 후버드 후작은 순간 움찔하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눈빛을 읽은 젤만 공작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얘기 듣기로는 제이크 백작가의 땅 절반 정도가 원래는 자네 땅이었다고 들었네. 맞는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땅에 있는 광산도 원래는 자네 것이었겠군.”
젤만 공작의 말에 후버드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자신의 땅이었다. 그런데 서류상 실수로 넘어갔다. 그래서 다시 찾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광산을 되찾을 정보를 알려주겠네. 그리고 일이 잘 풀리면 그 땅마저 돌려주겠네.”
그의 말에 후버드 후작의 눈이 커졌다. 그의 상체가 자연스레 앞으로 쏠렸다.
“그 말, 사실입니까?”
“사실이네. 공증까지 할 수 있네.”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합의가 이루어진 후에 말하겠네. 그보다 광산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그 대가로 100만 골드를 주게.”
젤만 공작의 말에 후버드 후작은 살짝 고민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합의가 된 것인가?”
“네.”
“좋네. 그곳을 먹으려면 영지전밖에 없네.”
“영지전?”
“그렇다네.”
“하지만 그곳은 국경 지역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국가 간의 전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후버드 후작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젤만 공작은 오히려 담담했다.
“그것은 걱정 말게. 뒤에서 내가 막아줄 테니. 자넨 자네 국왕만 설득하면 되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저의 동생이 왕비마마입니다. 동생에게 말하면 될 것입니다.”
“그럼 문제가 없겠군.”
젤만 공작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런데 후버드 후작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였다.
“영지전을 벌이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영지전을 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려 하십니까?”
“그건 말이야, 미녀를 이용하면 되네.”
“미녀?”
“그렇다네.”
젤만 공작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후버드 후작도 따라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젤만 공작이 후버드 후작의 귀에다가 뭔가를 중얼거렸다.
후버드 후작은 젤만 공작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다 끝나고 두 사람은 서로 떨어졌다. 후버드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제게 딱 적당한 인물이 있습니다.”
“하하핫, 그럴 것이라 예상했네.”
젤만 공작은 그리 말을 하면서 식어버린 차를 보았다.
“이런, 차가 식었군. 다시 내오라고 하겠네.”
젤만 공작이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집사가 들어왔다.
“차를 다시 내오게.”
“네, 공작님.”
집사가 나가고 얼마 후, 다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가 나왔다. 젤만 공작이 찻잔을 들었다. 후버드 후작도 같이 찻잔을 들었다.
“자, 우리의 앞날을 위해…….”
“앞날을 위해.”
3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저녁노을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그 시각, 알렌은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마치는 중이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목검을 거치대에 옮겨놓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들이 땀에 젖어 반들거렸다. 살짝 부풀어 오른 근육들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다.
알렌은 훈련을 정리하고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부기사단장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저기…… 단장님.”
알렌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뭔가?”
부기사단장은 말하기가 조심스러운지 잠시 머뭇거렸다.
“빨리 말해보래도.”
“아, 그것이…… 내일 오랜만에 갖는 휴식인데…….”
“그래서?”
“오늘 훈련 받느라 고생도 하였고…… 그래서…….”
부기사단장은 얼버무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렌이 답답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오늘 한잔하자는 건가?”
“네에? 아, 네에. 그렇습니다.”
알렌의 말에 부기사단장의 표정이 풀어지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런 부기사단장의 모습을 보던 알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것을 뭐 그리 어렵게 말을 하나. 그냥 한잔하고 싶다고 말을 하면 되지.”
“죄, 죄송합니다.”
“자넨 그것이 문제야. 그런 것에는 영 쑥맥이란 말이야.”
“헤헤, 태생이 그런 것을 어찌합니까. 그래도 단장님께서 바로 캐치해 주시지 않습니까.”
“됐다. 다들 샤워하고 옷 갈아입은 후 ‘숲 속’ 주점으로 모이도록! 단, 성 경비하는 인원들을 체크하고.”
“넵, 알겠습니다!”
부기사단장이 힘차게 대답을 하고는 몸을 돌려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기사들에게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가던 알렌은 그 소리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주점 숲 속에는 오랜만에 모인 기사들의 회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술을 내오랴, 안주 준비하랴 분주하였다.
하물며 왁자지껄 힘차게 떠드는 소리로 주점이 떠나갈 듯하였다. 하지만 술과 안주를 옮기는 주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하였다.
“여기, 맥주 두 잔 더요!”
“안주도 더 주시오!”
“네네, 알겠습니다.”
주인은 여기저기 술과 음식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알렌은 부기사단장과 구석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의 휴식에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알렌은 곧 맥주잔을 들어 한 번에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부기사단장이 황급히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일어나십니까?”
“후후후, 이제 난 빠져 줘야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좀 더 있다가 가십시오.”
“됐다. 자네가 책임지고 애들 잘 관리하고.”
“단장님…….”
“내가 빠져 줘야 여자들도 부르고 놀 것 아닌가.”
“하, 하지만…….”
부기사단장은 말을 얼버무렸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알렌은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애들이나 잘 챙겨서 보내. 내일 논다고 해서 무리하게 마시지 말고. 그리고 사고 치지 말고.”
“알겠습니다.”
부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렌은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에 던졌다.
짤랑―!
탁자 위로 주머니가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돈주머니였다. 부기사단장은 깜짝 놀란 두 눈으로 알렌을 올려다보았다.
“단장님…….”
“여자들 부르고 술 더 먹으려면 돈이 필요할 거다. 걱정 말고 이 돈으로 마음껏 먹여라.”
알렌은 그 말만 남기고 홀로 뒷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갔다. 혹시 자신 때문에 기사들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였다.
어두운 골목을 따라 막 대로에 접어들 때쯤, 주점 안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알렌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달빛이 찬찬히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알렌은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았다. 달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가?”
알렌은 홀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고 돌아 그가 도착한 곳은 골목 깊숙이 있는 작은 술집이었다.
작은 나무 문을 열자 따랑, 하고 종소리가 들렸다. 그 종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촛불들이 가게 안을 밝히고, 서너 개의 탁자와 테이블 너머로 바텐더가 컵을 닦고 있었다.
종소리에 바텐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입구로 향했다. 그곳으로 알렌이 등장하자 바텐더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오호, 알렌 님. 오랜만입니다.”
“아, 찰스, 잘 있었나.”
“하하하, 저야 늘 똑같지 않습니까.”
바텐더 찰스 앞에 알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늘 먹던 걸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