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헬 나이츠 5권 (8화)
이그나탈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뭐,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을 죽일 정도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겠지. 강하다는 것은 강한 마기로 충만하다는 것이겠고 말이야.”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뒤에 있는 제자 한 명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이그나탈은 그 기세로 힘주어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쓸어버리겠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내 힘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그나탈이 말을 하는 중에도 뒤에 서 있던 제자들의 몸에서는 은은한 검은 마기가 샘솟았다.
“놈이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하고?”
이그나탈이 곧바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오냐. 클레노스 놈의 복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나를 위해서, 내가 7레벨에 오르기 위해서 네놈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금기 마법인 흡마 마법(마기를 흡수하는 마법)까지 배우지 않았나. 영지 안에서 이런 마기가 흐르는 것을 보니 7레벨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마기를 보유하고 있겠군.”
이그나탈의 눈동자가 어느새 검게 변하였다.
“기다려라, 곧 찾아가마.”
말을 마친 이그나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에 둥근 원이 남겨졌다. 정확히 말을 하면 땅이 죽어 있었다.
반경 5미터 안의 풀과 꽃도 모조리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그렇게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죽음의 향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 젠장. 괜히 왔나? 한두 놈도 아니고, 무려 여덟이야. 게다가 그 노인네는 역시 이그나탈이었어.”
아크는 어제 그들이 말한 것을 듣고 설마설마하였다. 아니, 그가 산속에서 나와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며 이곳으로 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다.
“진짜였어. 젠장, 젠장. 괜히 그런 말을 했나?”
사실 이그나탈에 대해서는 아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 악명이 신성제국에 미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저 녀석을 쓰러뜨리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는…….”
아크는 갑자기 급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면서 오늘 새벽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다, 당신들은…….”
아크는 필과 폴을 발견하고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그 모습을 본 제이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거참, 타이밍하고는…….”
제이크도 아크와 두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때에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일이 꼬였지만, 어쨌든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름은 필과 폴, 제 부하입니다. 저 녀석들과 작은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냥 무시하십시오. 워낙에 모자란 놈들이라…….”
“도련님!”
폴과 필이 동시에 소리쳤다.
“시끄러! 뭘 잘했다고!”
제이크의 면박에 폴과 필은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아크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 두 사람도…….”
“네, 같이 넘어왔습니다.”
“그럼…… 저들도 헬 나이츠?”
“에이, 무슨 헬 나이츠가 그리 많을까요. 저들은 그냥 헬 솔저입니다. 그래도 마계에서는 나름 최강의 전사들이죠.”
그리 말을 하는 제이크는 왠지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크는 저들과 상대를 했기 때문에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의 대장인 제이크는 얼마나 강할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크는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어쨌든 서로 인사도 했고…….”
제이크가 말을 천천히 하다가 폴과 필을 보았다.
“맞아, 무슨 일이야?”
“맞다, 도련님.”
폴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웬 이상한 녀석들이 영지로 오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확인해 보니 마기가 장난 아니었습니다.”
필이 말을 하며 슬쩍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제이크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누구인데? 혹시 그 녀석들 제자가 아직 남아 있었나?”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총 여덟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제일 세 보였습니다. 어쨌든 아주 맛나 보이는 마기였습니다.”
필의 말에 제이크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앞에 앉은 아크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제이크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기…….”
“네에?”
“아까 얘기를 들어보니 성과를 얻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제이크가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 아크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알아듣게 말해주시지요.”
“그러니까, 이곳에 왔으니 악의 종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마침 딱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이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폴과 필도 그가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실실 웃고 있었다.
다만, 아크만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제이크는 아크가 이해하지 못하자 다시 다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제이크가 아크에게 다가가 조곤조곤 설명을 하였다. 그러자 아크의 눈이 반짝이며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야 신전에 보고하는 저의 체면도 서죠. 그리고 저의 일도 하는 것이고.”
“제가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맘껏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악의 종자인 녀석들을 잡으러 나왔는데, 하필 이그나탈이었다. 아크는 깊은 한숨과 함께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젠장, 처음부터 이그나탈이었다면 쉽게 나선다고 하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한두 놈도 아니고 말이야.”
아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점점 멀어지는 이그나탈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다?”
아크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매제 될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며 나왔는데, 검도 뽑지 못하고 돌아가면 무슨 체면이 서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폴과 필이 나타났다.
“여기서 뭐해?”
“그러게. 뭘 그리 멍하게 쳐다만 보고 있지?”
폴과 필의 말에 아크는 순간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상황을 지켜보는 거다, 상황을!”
“무슨 놈의 상황? 그냥 쳐들어가서 때려 부수는 거지.”
“부순다기보다는 아작을 낸다고 봐야겠지?”
“아, 그렇구나. 아작이구나.”
“키키키, 그렇지, 아작이지.”
폴과 필은 아무리 상대가 이그나탈이라고 해도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장난까지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아크는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내가 저것들을 믿고 나왔다니…….’
아크는 폴과 필을 바라보며 속으로 약간의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멀어지고 있는 이그나탈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 일단은 부딪쳐 봐야지.’
아크도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폴과 필이 다가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뒤에 우리가 있잖아.”
“맞아, 우리가 도와줄게. 도련님도 도와준다고 했어.”
“그, 그래?”
아크는 영 미덥지 못한 말에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게다가 제이크의 실력을 100% 알지 못하는 아크이기에 과연 이그나탈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쓰러뜨린 폴과 필이 고작 제이크의 부하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저들이 도와준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지도 몰라.’
신성제국의 신성기사단장과 거의 맞먹는 실력을 가진 아크이지만, 상대가 이그나탈이다 보니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좋아!”
아크는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그나탈이 사라진 방향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그 뒤에서 폴과 필이 손을 들어 올리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3
이그나탈은 일곱 제자와 함께 찬찬히 영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강력하진 않지만, 영지 곳곳에 마기가 은은하게 어려 있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있었다.
“좋구나, 좋아.”
이그나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뒷짐을 진 채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제자들이 아무 말 없이 따랐다.
그렇게 영지 입구까지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잘 걷던 이그나탈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살짝 아미를 찡그리며 신음을 삼켰다.
“으음…….”
그러자 뒤에 있던 제자가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제자의 물음에도 이그나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매우 흥미로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이그나탈이 몸을 돌려 제자를 쳐다봤다.
“넌 못 느끼는 것이냐?”
“무엇을 말씀입니까?”
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잉, 쯧쯧쯧. 특별한 기운을 느끼지 못했냐 말이다.”
“제자는 잘…….”
“수련이 많이 부족하구나.”
“죄송합니다. 좀 더 수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는 고개를 숙이며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였다. 이그나탈은 다시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간간이 떠도는 마기의 기운 속에 신성력이라……. 아주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네에? 신성력?”
이그나탈의 말에 제자의 눈이 크게 떠지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놈입니까?”
“아니다. 이런 신성력은 신성제국이다.”
“시, 신성제국!”
신성제국이라는 말에 제자들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그래, 좋은 먹잇감이로구나.”
이그나탈이 고요하게 말을 했지만, 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성제국이라는 말에 몹시도 흥분한 상태였다. 하물며 신성제국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스승님, 어디입니까?”
제자들은 주위를 살피며 신성제국 놈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수련이 부족한 탓인지 신성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그나탈은 신성력을 느끼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초대를 하니, 그에 응대를 해야겠지. 가자!”
이그나탈은 도시로 들어가는 대로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제자들도 스승인 이그나탈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약 20여 분을 걸어갔을 때, 자그마한 공터가 나왔다. 그 공터 중앙에는 순백의 갑옷을 입고 중검을 자기 앞에 박아놓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아크가 있었다.
이그나탈은 아크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섰다.
“네놈이냐, 날 이리로 부른 것이?”
이그나탈의 말에 아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이그나탈!”
아크의 말투에서 비장함이 묻어났다. 이그나탈도 그의 결심이 느껴졌는지 이내 눈빛에 흥미로움이 일렁거렸다.
“호오, 내가 이그나탈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랬단 말이지? 그렇다면 제법 한가락 한다는 소리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