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헬 나이츠 5권 (1화)
Episode 41 행복한 나날
1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넓은 들녘에 누렇게 익은 밀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서쪽 하늘에 드리운 저녁노을이 오늘따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서쪽 하늘을 등진 언덕 너머로 한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낡아 빠진 로브와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언덕 위에 올라서자 저녁노을을 받은 그림자가 길게 수평선 위로 늘어섰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하나의 성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뒤집어쓴 후드 안에서 두 눈이 반짝이며 굵은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십 년…… 만인가…….”
그는 낮게 독백을 읊조린 후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사내는 언덕 아래, 넓고 큰 대로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외성의 문이 보였다. 그곳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문 양옆으로는 경비병과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외성에 도착한 사내는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로 천천히 인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성문에 있는 기사는 한 명씩 성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번뜩이는 매의 눈으로 하나하나 살피던 그때,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음?”
뭔가 이상함을 느낀 기사는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비록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의 직감이 뭔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무언가 수상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는 무언가 건졌다는 기쁨에 입가로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곧바로 그를 향해 외쳤다.
“어이! 거기!”
하지만 후드를 쓴 사내는 못 들은 척 인파들 틈에 섞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기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재빨리 뛰어가 후드 쓴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말 안 들리나? 멈춰!”
그제야 후드 쓴 사내가 멈췄다.
후드를 쓴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후드 내부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앞에 다가온 기사를 힐끔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기사는 거지꼴로 서 있는 사내를 위아래로 훑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기사가 본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곁에 서 있으려니 땀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걸친 누더기 옷은 거의 넝마나 다름이 없는 수준이었다.
“으윽, 냄새.”
급기야 기사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손으로 코를 막았다. 하지만 기사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수상하다고 말이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경계 근무를 서면 수상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할 정도의 눈을 가지게 된다. 기사는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 올리며 거지꼴을 한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고개 들어 후드를 벗어라.”
기사의 말에 사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기사는 살짝 인상을 썼다.
“뭐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을 벗으라고!”
기사가 윽박지르며 거칠게 나갔다. 원래 처음부터 의심이 가는 녀석에게는 강하게 나가야 했다. 그가 여태까지 이곳을 지키며 몸으로 직접 느낀 바였다.
‘후후, 이제 반항을 하겠지? 그 순간 넌 끝이다.’
기사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사내를 몰아붙였다. 기사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에 찬 검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 검의 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 멈칫했다.
“응?”
일말의 반항도 없이 순순히 말을 듣는 것이 아닌가. 사내는 머리에 쓰고 있던 낡은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20대 후반,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빛은 무심한 듯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원래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기사였다.
“어…… 어, 어디서 왔는가.”
기사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사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봐, 말을 못해? 어디서 왔냐니까?”
기사가 다그치며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다. 대신 로브 속에 감춰져 있던 사내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기사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러고는 흠칫 놀라 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며 검의 손잡이로 손이 향했다. 하지만 로브 속에서 나온 사내의 손 위에는 하나의 징표가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그 징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빛을 머금은 돌이었다.
그런데 그 돌의 겉면에 천사의 날개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급기야 헛바람까지 삼키며 뒤로 넘어질 뻔했다.
“허헉! 이, 이것은…….”
“쉿! 조용히 하시오.”
사내의 입에서 처음으로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사는 다시 한 번 그 징표를 확인하고는 대뜸 고개를 숙였다.
“시, 신성기사님인 줄 모르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저의 행색이 이러니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본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이렇듯 신분만 확실하다면야…….”
사내는 냉큼 징표를 품속에 넣었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럼요. 당연합니다.”
기사는 처음과 달리 연신 굽실거리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사내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렇게 사내는 다시 후드를 쓰고 인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넌지시 바라보던 기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내가 신성기사를 만날 줄이야. 그런데 우리 도시에는 어쩐 일이지?”
기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을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뭔 일이 있겠지. 내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말이야. 그보다 한 건 하는 줄 알았더니…….”
기사는 뭔가 아쉬움이 가득 담긴 말을 내뱉으며 경비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조금 전 신성기사가 걸어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가만, 저 신성기사…… 내가 아는 사람인가?”
잠시 고민을 하던 기사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내가 감히 신성기사를 어디서 봤겠어. 미친 생각이지.”
기사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다시 본연의 일을 시작했다.
2
한가한 오후.
뒷마당의 넓은 잔디밭에 제이크와 아이린이 나와 있었다. 제이크 옆에는 집사 네빌이 자리했고,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들려져 있었다.
그 맞은편으로 아이린이 편안한 얼굴로 잔디밭에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온몸으로 직접 받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제이크는 자신 앞에 놓인 또 다른 서류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오랜만에 갖는 휴식인데, 꼭 여기까지 나와서 이래야 해? 좀 쉬자, 쉬자고.”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 중으로 급히 처리해야 하기에…….”
집사 네빌은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정말 쉬는 날 없이 바삐 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두 영지의 빠른 안정을 위해서 오늘 중으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 버린 것을 말이다.
도로 공사와 수로 공사, 그리고 영지전으로 인해 공백이 생겨난 기사단 확충까지…… 중요한 안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백작이 된 제이크의 승인이 떨어져야 진행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다. 네빌은 하나의 서류를 제이크 앞에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
“이것은 이번 도로 확장 공사건에 관한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후작령과 저희 백작령을 연결하는 도로 확장 건으로…….”
네빌은 서류를 내밀며 추가적인 보충 설명을 차근차근 이어갔다. 하지만 제이크는 듣는 둥 마는 둥 서류에 쉽사리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이 자꾸만 옆에 앉아 있는 아이린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제이크의 눈빛에는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후후후, 귀여워. 어쩜 저리도 귀여울까? 게다가 저 볼록하게 솟아오른 깜찍한 배하며…… 으히히힛!’
제이크는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아이린의 배를 주시하며 행복감에 빠져 있었다. 그런 제이크의 시선을 전혀 모른 채 아이린은 독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따뜻한 홍차로 입가심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옆에서는 네빌이 정성스럽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준비를 하…… 백작님!”
“…….”
제이크는 네빌 집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은 아이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자 네빌 집사가 다시 한 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불렀다.
“백.작.님!”
“으응?”
그제야 네빌 집사에게 시선이 옮겨갔다. 네빌 집사는 눈을 부라리며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그런 네빌 집사의 눈을 보고 제이크가 움찔하였다.
“으구, 꼭 날 잡아먹겠다는 눈이군.”
“제가 지금 그런…….”
“알았어, 알았다고. 지금 보고 있잖아.”
제이크는 네빌 집사의 말을 자르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하였다.
“집중해요. 그걸 빨리 끝내야 저랑 놀죠. 네빌 집사도 빨리 일 끝내고 쉬어야 하잖아요.”
“알았어. 그래, 네빌. 다음 거.”
“후후, 네.”
네빌 집사는 다음 안건을 곧바로 내밀며 설명을 하였다. 제이크도 이번에는 한눈팔지 않고 업무에 집중하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이린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약 한 시간가량의 업무 보고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