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헬 나이츠 4권 (13화)
Episode 35 겁을 내다 (4)
“그럼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제이크의 말에 필과 폴은 다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칫, 말도 못하나.”
“맞아. 만날 혼자만 재미나는 일하면서.”
작은 말로 중얼거렸지만 제이크의 귀에는 고스란히 들렸다.
제이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에 폴과 필이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때, 때리려고요?”
“그러지 마세요. 아파요.”
폴과 필의 말에 제이크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게 쓸데없는 말하지 말랬지.”
제이크의 엄포에 필과 폴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주먹에 힘을 푼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 길로 자작령으로 돌아가.”
“네에?”
“우리 둘 만요?”
폴과 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둘만 가!”
“그럼 도련님은요?”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같이해요.”
필이 말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번 일은 나 혼자 해야 해.”
“혼자요?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폴이 물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제이크의 눈빛을 보는 폴과 필은 뭔가 재미난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폴과 필은 그런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같이 행동하며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머뭇거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이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아직도 안 갔어?”
“갑니다, 가!”
필이 대답을 하며 폴과 함께 사라졌다.
제이크는 멀어지는 폴과 필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퇴각하는 베이런 후작군을 보았다. 미묘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본격적인 시작은 바로 지금부터야.”
Episode 36 내분 (1)
1
베이런 후작은 노르딘 성으로 귀환했다.
잠시 이곳에 머물며 폐허 성에서 벌어졌던 것을 돌아볼 참이었다.
여장을 푸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설마 이곳까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노르딘 성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안감에 사흘을 지낸 기사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반발했다.
“이럴 줄 알았다!”
“여기까지 놈들이 오지는 못하지!”
불안했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점점 긴장되었던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
그 시각 회의실에 모인 베이런 후작과 가신들은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들도 기사들과 병사들이 느낀 것처럼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자 불안감을 씻어 버린 듯했다.
“현재 사흘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놈들이 꽁무니를 뺀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제 병력을 재정비해 다시 쳐들어가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가신들은 사흘 전 벌벌 떨며 퇴각할 것을 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오히려 더욱더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반면 베이런 후작은 아직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신중을 기했다. 그는 옆에 앉아 있는 게이런 남작을 보았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게이런 남작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베이런 후작의 물음에 번뜩 정신을 차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 모여 있는 가신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난 사흘 동안 놈들의 공격은 물론 흑마법사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성안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이런 남작의 말을 듣는 가신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는 경청했다.
“하지만 출정한다는 것은 아직 보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뭣이?”
“아니, 왜?”
“출정을 하지 않는다면 에페로 자작령을 그냥 두고 돌아가잔 말이오.”
여기저기서 반발이 일어났다. 게이런 남작도 이러한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놈들의 흑마법사에 대한 존재가 명확하지 않는데, 다시 나가서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현재 저희들은 흑마법사를 상대할 흑마법사가 없습니다.”
게이런 남작의 말에 열을 내던 가신들이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말처럼 에페로 자작령으로 가려면 다시 폐허 성을 지나야 했다.
폐허 성을 지나가는 길목이 막혀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폐허 성에서 다시 여장을 풀면 똑같은 일이 안 생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게이런 남작은 가신들의 모습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놈들의 흑마법사를 처리하지 않는 이상 출정을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됩니다. 게다가 어쩌면 우리가 이곳 노르딘 성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으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
“흠!”
게이런 남작의 말을 들은 가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했다. 몇몇 가신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게이런 남작은 그들을 보며 베이런 후작에게 말했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결정은 후작님께서 하십시오.”
어찌 보면 이미 결정이 났다고 봐야 했다. 가신들의 수군거림과 게이런 남작의 말, 그리고 베이런 후작의 표정.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후작령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베이런 후작은 눈가에 잔뜩 주름이 잡힌 채 고민에 빠져들었다.
당당히 후작령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에페로 자작령을 손에 넣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에페로 자작령을 제대로 밟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놈들에게 흑마법사의 존재가 있는 이상 진군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베이런 후작의 고민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진군이냐, 회군이냐의 어려운 고민 앞에 아무리 베이런 후작이라고 해도 쉽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긴 시간이 흐른 그때 회의실 탁자 맨 끝에 앉아 있는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젠장! 칼을 뽑았으면 썩은 당근이라도 썰어야 하지 않아! 뭘 그리 고민하고 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은 바로 베이런 후작의 사촌인 칼링 남작이었다.
칼링 남작은 텁수룩한 수염에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 문제로 많은 말썽을 부려 나머지 가신들로부터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베이런 후작의 사촌이라는 명분 때문에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칼링 남작은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베이런 후작을 보며 말했다.
“후작님! 저에게 병사를 주십시오! 제가 당장에라도 출정하여 에페로 자작가를 쓸어버리겠습니다! 그까짓 흑마법사 저는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칼링 남작의 발언에 고민을 하고 있던 베이런 후작의 마음이 흔들렸다.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이제 입으로 말을 하면 되었다.
그런데 칼링이 직접 출진하겠다고 하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처럼 큰맘 먹고 병력을 이끌고 나왔는데 한 번이라도 싸워 봐야 하지 않겠는가.
게이런 남작은 흔들리는 베이런 후작의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됩니다. 우리는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흑마법사의 정체와 힘을 알기 전까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러자 칼링 남작이 바로 말했다.
“흥! 그까짓 흑마법사가 뭐가 무섭다고 그래. 우리 기사들은 절대 겁내지 않아.”
칼링 남작이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게이런 남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사흘 전 일어난 사건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직접 나서서 처리하시지 그랬습니까!”
“그, 그때는…….”
칼링 남작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게이런 남작이 베이런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님, 흑마법사를 대응할 방법은 이미 손을 써 놓았습니다.”
게이런 남작의 말에 베이런 후작을 비롯해 다른 가신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대응할 방법이라니?”
베이런 후작의 물음에 게이런 남작이 미소를 지었다.
“이미 성국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흑마법사가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으십시오. 조만간 답변이 올 것입니다.”
성국이라는 말에 베이런 후작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성국에 있는 성기사라면 흑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미치자 베이런 후작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성기사를 흑마법사와 대적하게 하고, 자신이 이끄는 병력을 에페로 자작령으로 보내면 될 것 같았다.
“호오, 성국에서 성기사만 보낸 준다면야.”
하지만 생각도 잠시 베이런 후작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확실히 보내 준다고 하던가?”
“그, 그건 아직 확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곧 답변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네에.”
게이런 남작이 힘없이 대답했다.
베이런 후작은 다시 고민을 빠져들었다. 성국의 성기사를 믿고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촌 칼링 남작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갈 것인가.
“하지만 이제 와 겁을 낼 수는 없는 일이지.”
베이런 후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게이런 남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칼링 남작도 고민을 하였다. 그러나 확답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았다.
“흥! 성기사를 보내 주든 말든 난 사흘 후 출정하겠다.”
칼링 남작은 그 말을 하고는 회의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게이런 남작이 말릴 새도 없었다.
2
노르딘 성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사흘 뒤 출정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얘기 들었어?”
“들었어. 사흘 후에 출정이라며.”
“제길, 또 출정이라니.”
“맞아, 전에 있었던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해? 솔직히 무섭지 않아?”
“당연히 무섭지. 하지만 어떻게 하겠냐. 우리는 명령이 내려지면 움직이는 병사에 불과한데.”
“에효, 정말 답답하구나.”
병사들은 그때처럼 또다시 일이 벌이지지는 않을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칼링 남작의 직속 기사 중에 브라운이 있었다. 그도 사흘 후 출정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는 연신 투덜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또다시 폐허 성으로 가야 하다니. 미쳤군, 미쳤어. 아니 왜 다시 가겠다는 거야?”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복도를 걸어가는 그때 맞은편에서 귀엽게 생긴 하녀가 지나갔다. 그녀를 발견한 브라운은 조금 전까지 찡그렸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호오, 꽤 귀엽게 생겼는데.”
걸음을 멈춘 브라운은 다가오는 하녀를 아예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하녀는 자신의 온몸을 훑어보는 기사의 눈빛을 대하자 고개를 푹 숙였다. 벽 가까이 붙어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