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헬 나이츠 3권 (23화)
Episode 29 벨키라노의 농간 (2)
“흑마법사의 기운? 그럴 리가 없는데.”
베이런 후작이 흑마법사를 잘 알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자신 곁에서 암암리에 도움을 주고 있는 흑마법사도 있다. 그의 이름이 바로 벨키라노.
라예키르와 스타니스의 죽음에 복수를 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그였다.
“으음.”
베이런 후작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게이런 남작도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때 벨키라노가 창문을 통해 나타났다.
“그 녀석은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베이런 후작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서 있는 벨키라노를 발견하고는 베이런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호, 어서 오게 벨키라노.”
“안녕하셨습니까, 베이런 후작.”
베이런 후작은 나타난 흑마법사 벨키라노를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벨키라노가 베이런 후작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일은 잘 풀리고 있습니까?”
“아니, 잘 풀리지 않네.”
“그렇습니까? 이상하군요. 자신들의 영지를 위해서라도 거절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오.”
베이런 후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뭐,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변함은 없으니까요.”
벨키라노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베이런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자네가 의도한 대로 행하고는 있지만 녀석들이 완강하게 나올 텐데 말이야.”
“승낙하든 안 하든 어차피 에페로 자작가를 무너뜨리는 것이 주목적이니까요.”
벨키라노가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게이런 남작이 나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물음에 벨키라노가 사악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후후훗, 뭘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놈들을 집어삼킬 생각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보다 저쪽이 거절을 했다면 더 좋은 것이 아닙니까. 영지전을 벌일 명분도 얻었으니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아깝단 말이지.”
베이런 후작은 아이린의 미모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베이런 후작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이 벨키라노가 뒤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벨키라노는 이미 오래 전에 베이런 후작을 찾아와 충동질을 벌였다. 라예키르가 채플 백작을 찾아가 벌인 일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물론 목적은 같지만 방식을 조금 달리 했다. 그곳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스타니스와 라예키르가 목숨을 잃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먼저 녀석에 대해서 확인을 해야 했다.
벨키라노는 제이크라는 녀석에 대해서 조사를 했다. 하지만 별다른 것을 얻지 못했다. 다만 갑자기 에페로 자작가에 나타나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제이크라는 녀석에 대해서 아십니까?”
벨키라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베이런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게이런 남작은 그 말을 듣고 눈을 치켜떴다.
“제이크라고 했습니까? 이번에 그 녀석을 만났습니다. 안 그래도 그 일에 대해 후작님께 보고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아까 말하던 것이 그것이었나?”
베이런 후작도 흥미가 생기는지 급히 물었다. 게이런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녀석의 몸에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게다가 그 기세만으로 저의 숨통을 조여 왔습니다. 한마디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이런 남작이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했다. 곰곰이 듣던 벨키라노가 물었다.
“뿜기는 기운이 혹여 나와 같은 느낌이었나?”
“네, 맞습니다.”
“으음.”
벨키라노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그 모습을 살피던 베이런 후작이 물었다.
“혹시 그놈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혹여 자네와 같은 흑마법사인가?”
베이런 후작의 물음에 벨키라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흑마법사는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뭔가?”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저 저의 스승님과 견줄 만한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호위 기사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벨키라노는 스승께 들은 얘기를 하였다. 어차피 이들은 제이크에 관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벨키라노도 제이크에 관해서 알아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스타니스나 라예키르가 알아낸 것만으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스승과 같은 흑마법사의 호위 기사라고? 그의 이름이 뭔가?”
“잘 모를 것입니다. 예전에 그 흑마법사는 이그나탈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니까요.”
“이그나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베이런 후작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저도 스승님께 들었으니까요.”
“어쨌든 그 녀석이 있는 이상 힘들지 않겠나?”
베이런 후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벨키라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녀석은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보다 에페로 자작령을 손에 넣을 생각만 하십시오. 자칫 잘못하다가 당신의 영지마저 위험해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뭣이?”
벨키라노의 말에 베이런 후작의 눈빛이 치켜떠졌다. 그는 눈살을 찡그리며 벨키라노를 강하게 째려봤다. 자신이 누군가 이곳 북쪽을 책임지고 있는 무장이다. 그의 말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걱정 말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말이야.”
“후후후, 저야 믿고 있습니다.”
3
베이런 후작은 다시 한 번 게이런 남작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를 보낸 것은 어찌 보면 최후 통첩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을 경우 영지전도 불사한다는 그런 각오였다.
에페로 자작령의 집무실에는 아이린과 제이크, 게이런 남작이 있었다. 처음부터 제이크가 함께 자리했다.
“결정을 내렸소?”
“처음부터 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이린이 말했다. 제이크는 옆에서 그저 팔짱만 낀 채 조용히 있었다. 게이런 남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렇게 기회를 줬는데도 거부를 하다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혼을 승낙하지 않으면 베이런 후작님께서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소. 그래도 정녕 거부를 하겠다는 것이오.”
게이런 남작이 강하게 말했다. 아이린은 움찔하며 제이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어떻게 좀 해 봐요. 이런 눈빛이었다.
제이크가 게이런 남작을 보았다. 그리고 간단히 말했다.
“꺼져!”
“어라? 방금 뭐라 했소?”
게이런 남작은 혹여 자신이 잘못 듣지는 않았는지 재차 물어보았다. 제이크가 팔짱을 풀며 그의 귀에다 입을 가져갔다.
“귀가 막혔나? 좋아, 다시 한 번 들려 주지.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꺼져!”
게이런 남작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이크를 보았다. 제이크는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꺼지라고 했소?”
“확실히 알아들었군.”
제이크가 말했다. 게이런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이런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강하게 말했다.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게이런 남작이 몸을 홱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거칠었다. 그가 나가고 걱정 어린 시선이 된 아이린이 조용히 물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요?”
“괜찮아. 백작 때처럼 이번에도 나만 믿어.”
강한 자신감의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린은 제이크의 눈빛을 보는 순간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그것을 들킬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미, 믿고 있어요.”
아이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그럼 됐어.”
제이크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아이린은 그런 제이크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을 믿고 있지만 베이런 후작은 채플 백작보다 몇 배는 힘들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제이크가 집무실을 빠져나가면서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모습에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지었다.
밖으로 나온 제이크가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그때 폴과 필이 나타났다.
“도련님, 이번에는 후작가입니까?”
“또 저희가 움직일까요?”
폴과 필이 싱글벙글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제이크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엥?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저 지켜보시겠다는 겁니까?”
폴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생각은 이번에도 둘이 나서서 깨끗이 청소를 하겠다는 의도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채플 백작과 전쟁을 할 때도 자신 둘이 다 하지 않았나.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을 했는데 제이크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니 맥이 풀렸다.
“그럼 어쩔 생각이에요?”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제이크가 간단히 말했다. 그러자 필이 황급히 말했다.
“에이, 도련님. 그러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 두세요. 백작가처럼 확실히 처리할 테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저희 둘이 베이런 후작가에 가겠습니다.”
폴과 필이 자신 있게 대답을 했지만 제이크는 그들을 막았다.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니, 왜요?”
폴과 필, 둘이 동시에 말했다. 그러자 복도를 걷던 제이크가 걸음을 멈추며 두 사람을 보았다.
“방금 그 녀석에게서 흑마법사의 냄새가 났다. 그 녀석이 있는 한 아무리 너희들이 날고 긴다고 해도 어렵다.”
제이크의 말에 잔뜩 실망한 얼굴이 된 폴과 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흑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저희들을 막지 못해요, 도련님.”
폴이 작게 말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단호했다.
“한 번 안 된다면 안 돼!”
제이크의 강한 말에 폴과 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제이크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던 제이크가 두 녀석을 달랬다.
“어쨌든 대기는 하고 있어. 내가 부를 때까지 말이야. 언제든지 나설 수 있게.”
제이크의 말에 효과가 있었을까? 폴과 필은 언제그랬냐는 듯 환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이죠?”
“저희야 항상 움직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녀석을 보며 제이크도 웃었다.
“후후, 알았다. 우선 내가 먼저 움직일 테니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도련님.”
“알겠습니다.”
폴과 필이 힘차게 대답을 한 후 신나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뛰어갔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제이크는 피식 웃었다.
“훗, 아무튼 단순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