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헬 나이츠 3권 (22화)
Episode 28 베이런 후작의 욕심 (4)
게이런 남작의 노골적이 협박에 아이린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또다시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게이런 남작의 말은 베이런 후작가의 병력이 쳐들어오기 전에 좋은 말로 할 때 둘째 아들과 혼인해 백작령을 넘기라는 뜻이었다.
아이린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만약 거절을 하면 이 길로 베이런 후작가에서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모욕하고 치욕을 안긴 그 망나니 같은 놈에게 시집은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만 지었다.
“어, 어떻게 그런 협박을 할 수 있나요?”
“후훗, 협박이라고 생각하면 협박이고, 협상이라고 생각하면 협상이 됩니다. 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게이런 남작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확답을 얻길 원했다. 하지만 아이린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 녀석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말이다.
“어서 결정을 하시오.”
“어, 어쩜…….”
아이린의 입술과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집무실 문이 벌컥 하고 열리며 제이크가 들어섰다. 그는 게이런 남작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감히 누구를 협박하는 것이야! 다 차려진 밥상에 아예 포크를 올린 심산이네!”
제이크도 분노가 치밀었다. 어둠의 기세를 마음껏 뿜어내며 게이런 남작을 압박했다. 게이런 남작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압박하는 사내를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으으윽. 네, 네놈이 감히…….”
“감히? 죽고 싶나?”
제이크는 더욱 눈을 부라리며 기세를 강하게 내뿜었다. 그럴수록 게이런 남작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이린이 급히 제이크를 말렸다.
“제이크 님!”
아이린이 부르자 그제야 기세를 풀었다. 게이런 남작은 거의 실신 직전까지 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잔뜩 공포에 잠긴 얼굴로 제이크를 응시하더니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리나케 집무실을 나갔다.
나가면서 한마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냐, 후회하게 될 것이다.”
게이런 남작이 나가고 아이린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제이크의 가슴에 안기며 울음을 흘렸다.
“흑! 제이크 님.”
제이크의 가슴에 안긴 아이린은 계속해서 흐느꼈다. 간신히 하나를 막았는데 그보다 더 큰 상대가 나타났다. 이제 조금 나아지려 했는데 또다시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아이린은 계속해서 찾아오는 불행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자꾸 이런 일만 생겨나죠? 왜 자꾸…….”
제이크는 자신의 가슴에 안겨 흐느끼는 아이린을 그저 토닥여 줄 뿐이었다.
“전 그저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왜 자꾸 이런 실현을 주시는 걸까요? 정말 너무해요. 너무해요.”
“괜찮아. 진정해.”
제이크가 진정을 시켜보지만 아이린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아요.”
아이린의 물음에 제이크도 확답을 주지 못했다. 그저 깊은 한숨만 흘러나왔다.
“후우.”
제이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장애물을 넘으니 더 높은 장애물이 나타났다. 물론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지만 주어진 시간 때문에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군.”
Episode 29 벨키라노의 농간 (1)
1
에페로 자작가에서는 긴급 대책 회의가 열렸다. 제이크를 비롯해 아이린, 네빌 집사, 그리고 베일 기사단장이 자리했다.
그들 모두 잔뜩 굳어진 얼굴이었다. 회의실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매우 차갑고 무거웠다. 아이린은 오전에 만난 게이런 남작이 꺼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듣고 있던 네빌 집사와 베일 기사단장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이래서 약한 영지는 강한 영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긴 얘기를 마친 아이린이 두 사람을 보았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아이린이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백작령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작가를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네빌 집사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채플 백작이 영지전을 할 때도 이제 끝이구나 생각을 했다. 다행이 제이크 때문에 위기는 넘겼지만 이번에는 후작가와 상대를 해야 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말이다.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아가씨.”
“네?”
“아가씨께서는 베이런 후작님의 둘째 아들이 싫으세요?”
그러자 아이린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
“그,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집사님도 아시잖아요. 그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저는 절대로 싫어요. 아니, 죽어도 싫어요.”
“하지만 지금은 후작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네빌 집사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말을 꺼냈지만 이내 묵살당했다.
“그만하세요. 전 절대 그와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하며 슬그머니 옆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빌 집사는 아이린의 시선이 옮겨진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크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았다. 네빌 집사는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큰일이네요.”
네빌 집사는 아이린의 눈빛 하나만으로도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린은 제이크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이크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물론 네빌 집사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설령 제이크도 아이린을 좋아한다고 해도 힘들었다.
솔직히 제이크가 분명 훌륭한 기사인 것은 맞다. 하지만 작위도 없고, 무엇보다 망국의 귀족인 만큼 귀족의 대접을 받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아이린이 벌써 마음을 빼앗겼으니 네빌 집사의 입장에서도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후, 그냥 좋으니까. 이름 없는 귀족가의 자식이었다면 괜찮을 텐데…….’
네빌 집사는 망해 버린 왕국의 귀족 출신만 아니었어도 되었다. 그렇다면 한 번쯤 생각해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후작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네빌 집사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가문을 위해서라도 후작가와 결합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결혼을 억지로 시킬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고민이 되었다.
베일 기사단장도 무거운 얼굴로 침묵만 유지했다. 그라고 해서 어디 뾰족한 방법이 있겠는가. 하지만 옆에 있는 제이크라면 달랐다.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의 시선이 제이크에게로 향했다. 제이크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채플 백작가를 무너뜨린 것만큼 후작가와의 전쟁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제이크의 시선이 베일 기사단장에게 향했다. 그는 애절한 눈빛으로 제이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피식 웃었다.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겠지.”
제이크의 뜬금없는 말에 아이란과 네빌 집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이린이 급히 물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세요?”
“방법은 무슨, 그냥 정면 돌파지.”
“네에?”
아이린이 놀란 눈으로 답했다. 네빌 집사도 베일 기사단장도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제이크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후작가와 전쟁을 치를 생각이었다.
“아이린은 그 녀석과 결혼이 죽어도 싫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잖아. 후작가와 싸우는 방법밖에는 말이야. 걱정 마, 그 일에 대해서 내가 도와줄 테니.”
제이크의 말에 네빌 집사가 답답한지 한 소리를 했다.
“이건 단순한 영지전이 아닙니다. 아니, 백작가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는 후작가입니다. 최소한 채플 백작가의 병력보다 무려 3배는 많을 것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쩔 거야? 아이린이 싫다고 하잖아.”
“그, 그건…….”
네빌 집사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제이크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후작가다. 절대 승산 없는 게임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방법은 하나야. 놈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 그래야 이곳을 지킬 수 있을 것이야.”
“누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후작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베일 기사단장도 답답한지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결심을 했는지 네빌 집사에게 말했다.
“알고 있어. 그래도 부딪쳐 봐야지.”
제이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이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도와줄게, 이번에도 그 다음에도…….”
제이크의 한마디에 다들 놀란 눈이 되었다. 특히 아이린은 그 말을 듣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고, 고마워요. 흐흑, 정말 고마워요.”
2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베이런 후작가. 베이런 후작가의 성은 그야말로 요새였다. 북쪽 지역을 수비하는 수장인 만큼 병력 또한 많았다.
채플 백작가의 성처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식도 없고, 그렇다고 운치도 없었다. 다른 점은 높은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탑 위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경비병이 눈에 불을 밝히고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성벽은 거대한 돌로 쌓아 올려 그 웅장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 특이한 것은 성벽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이다. 다른 왕국과 인접한 국경지대인 만큼 전쟁의 긴장감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구멍은 화살을 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벽을 쌓는데 저런 자그마한 구멍을 만들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뛰어난 전투용 요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전쟁이 없어 제대로 활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전쟁이 터졌을 때 이곳 베이런 후작성은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로 변한다. 그 누구도 왕국에 침입을 못하게 말이다. 그런 성에 베이런 후작이 있다. 왕국에 커다란 힘을 등에 업고서 말이다.
베이런 후작은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게이런 남작이 자리했다.
게이런 남작은 에페로 자작가에 다녀와 곧바로 베이런 후작을 만났다. 그리고 아이린과 나눈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 주었다. 베이런 후작은 듣고 있는 내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린이 끝내 청혼을 거절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하자 베이런 후작이 길길이 날뛰었다.
“정녕 그리 보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후작님.”
“흥! 감히 나의 아들을 거절해! 백작가를 이겼다고 기가 살았구만.”
베이런 후작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근데 후작님.”
게이런 남작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베이런 후작의 고개가 돌아갔다.
“왜 그러느냐?”
“사실 에페로 자작가에 갔을 때 이상한 녀석을 만났습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마치 흑마법사를 대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게이런 남작의 말에 베이런 후작의 눈빛이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