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헬 나이츠 3권 (18화)
Episode 27 무너지는 백작성 (3)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있다. 믿어라. 너희 자신을 믿고, 나를 믿어라. 그러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너희들은 그저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싸우면 된다.”
바론은 제이크의 말을 듣고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항상 그랬다. 당당했고, 믿음을 주었다. 단지 말 한마디한 것뿐이지만 긴장되었던 마음이 다소 풀리는 것 같았다.
“저희들은 물론 대장님을 믿습니다.”
“그럼 되었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잘 숨어 있도록.”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바론이 다시 땅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제이크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는 다시 사라졌다. 이제 모든 준비가 되었다. 놈들을 완벽하게 처리하면 끝이었다.
3
채플 백작가의 병력은 좁은 길로 반 이상 들어섰다. 그들의 이동 속도는 매우 늦었지만 그만큼 주변 경계에 신경 쓰는데 온 신경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선두에는 알포네 기사단장이 이끌었고, 그 뒤로 3천에 달하는 병력이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좁은 길을 움직였다. 거의 끝자락까지 올 동안 놈들의 공격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지만 너무나 조용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단장님, 저길 보십시오.”
주변을 경계하던 알포네 기사단장이 선두에 있던 기사의 말에 즉시 시선을 던졌다. 기사가 말한 곳에서 한 키 높이만 한 목책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알포네 기사단장이 황급히 멈춰 세웠다.
“정지!”
병력이 정지를 했다. 알포네 기사단장은 뒤에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지금 즉시 백작님께 보고하라.”
“넵, 단장님.”
기사가 즉시 뒤에서 따라오던 채플 백작에게 달려갔다. 알포네 기사단장은 목책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녀석들이 아니겠지.”
알포네 기사단장이 나직이 말을 한 후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적의 매복이 있을 것이다. 모두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알포네 기사단장의 지시에 기사들은 모두 무기를 빼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때 알포네 기사단장의 눈에 또 다른 것이 포착되었다.
목책 건너편에 두 명의 사내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다. 무기는 하나도 들고 있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의 체격이 극과 극이라는 것밖에는 말이다.
알포네 기사단장이 본 사람은 바로 폴과 필이었다. 그 두 사람이 입구를 막고 서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기사의 기운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달랐다. 마치 어둠을 집어삼킨 듯 음침하면서 차갑게 느껴졌다.
알포네 기사단장이 천천히 그곳으로 이동했다. 점점 폴과 필의 인영이 뚜렷하게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스르륵 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팠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도 별로 좋지 않았다.
“크크크.”
“크르르.”
동물의 울음소리와 흡사했다. 알포네 기사단장이 검을 내밀며 소리쳤다.
“에페로 자작가의 병사들이냐?”
알포네 기사단장의 말에 폴과 필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서 내뿜어지는 어둠의 기운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알포네 기사단장은 뒤에 있던 기사들을 즉시 불렀다. 알포네 기사단장의 부름에 기사들이 즉시 달려왔다.
이윽고 폴과 필, 그리고 알포네 기사단장이 이끄는 기사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한편 뒤쪽에서 느긋하게 따라오던 채플 백작은 앞에서 기사가 달려오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기사는 즉시 채플 백작에게 보고를 하였다.
“앞에 목책이 있습니다. 아마도 놈들이 길을 막은 것 같습니다.”
기사의 보고를 듣던 채플 백작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닥치니 이가 갈렸다.
“감히!”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귀족들도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로이 남작이 채플 백작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할까요?”
그가 물었다. 채플 백작은 그를 째려봤다. 로이 남작이 움찔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밀고 나가야지. 게다가 녀석들 딴에는 목책을 세워 놓고 매복 있는 척해서 우리를 돌아가게 만들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흑마법사 놈들이 워낙에 머리를 잘 쓰지 않는가. 확인 결과 매복도 없다고 하니 그냥 부수고 나아가야지.”
“그럼 이대로 나가는 것입니까?”
“몇 번 말해야 해! 밀고 나가!”
채플 백작이 귀찮다는 듯 강하게 말했다. 그때 후방에 있던 병사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병사의 다급함에 채플 백작이 물었다.
“무슨 큰일?”
“보일란 성에서 병력이 나왔습니다. 곧장 이쪽으로 병력을 이끌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대략 수는?”
“2천이 넘습니다.”
“제기랄. 앞과 뒤를 동시에 치겠다는 뜻이군.”
채플 백작은 더욱 인상을 썼다. 이제 뒤로도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뒤보다는 목책을 세워 둔 곳을 정면 돌파하는 방법밖에 없다.
“알포네 단장에게 어서 정면을 뚫으라고 말해!”
“네, 백작님.”
지시를 받은 기사가 즉시 앞으로 뛰쳐나갔다. 귀족들도 채플 백작의 말에 수긍했다. 후방에서 쫓아오는 병력과 이 상태에서 싸우게 되면 큰 피해를 입는 쪽은 자신들이었다.
어서 빨리 좁은 길을 벗어나 넓은 곳에서 적들을 상대해야 했다.
채플 백작에게 보고를 마친 기사는 즉시 알포네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백작님께서 정면 돌파하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보일란 성에서 병력이 나와 쫓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보고를 받은 알포네 기사단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하지만 되돌아가는 것보다 적들이 매복 기습을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정면 돌파가 좋겠다고 그도 판단을 내렸다.
“들었나? 모두 목책을 치우고 신속히 이곳을 빠져나간다.”
“넵, 단장님.”
척, 처처척!
기사들은 정면에 세워진 목책으로 돌진했다. 그런데 반대편에 있던 두 명의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알포네 기사단장이 두 사람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어서 빨리 목책을 치우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목책을 치워라! 주위의 매복 기습에 신경을 써라!”
알포네 기사단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몇몇의 기사들이 목책을 치웠다. 그 사이 뒤에서 채플 백작이 이끄는 병력이 도착했다.
“알포네 단장, 얘기는 들었겠지?”
“네, 백작님. 목책은 치웠습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면 됩니다.”
“그럼 나가자!”
채플 백작의 눈에도 저 앞에 좁은 길이 끝나는 지점을 발견했다. 천천히 걷던 병사들도 일제히 발을 빨리했다. 그때 산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공격!”
그러자 주변 산 언덕에서 땅 속에 숨어 있던 병력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우와아아아!”
“죽여라!”
그들은 모두 제이크가 가르친 병사들이었다. 선두에 바론이 험한 인상을 지으며 공격해 들어갔다. 채플 백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좋은 길이라 제대로 된 진영을 갖출 수는 없었다.
그리 되자 우왕좌왕하는 쪽은 채플 백작가였다.
“우와와아! 기습이다!”
“적들이 공격한다! 모두 막아라!”
“당황하지 마라!”
알포네 기사단장이 고함을 질렀다. 기사들도 병사들을 다독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금세 진형이 무너졌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병사들은 어찌할지를 몰라 했다.
“막아라, 막아!”
지휘관들의 처절한 외침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반면 제이크의 병사들은 철저히 계획된 움직임으로 적들을 상대했다. 이번에도 제이크가 알려 준 다른 진형으로 몰아붙였다.
일명 돌파 진형이라고 5인 1조가 되어서 다섯이 창대를 한 방향으로 모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전진을 하며 적을 찌르는 방식이었다.
끝자락에 5명씩 조를 짜 땅 구덩이를 파고 매복해 있었다. 그리고 제이크의 지시가 떨어지자 진형을 갖추며 그대로 돌진한 것이다.
그러자 길게 늘어선 채플 백작가의 적 진형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병력이었기에 금세 그 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또다시 제이크의 병사들이 들이닥치며 적들을 유린했다.
채플 백작은 들려오는 병사들의 비명 소리에 고함을 질렀다.
“놈들을 상대하지 마라! 신속히 이곳을 벗어난다! 어서 움직여라!”
채플 백작은 이렇게 좁은 길에서 적의 돌파 진형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매우 불리했다. 그래서 신속히 이곳을 벗어난 후 넓은 곳에서 적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녀석들을 상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포네 기사단장도 생각이 같았다. 그는 앞을 막고 있던 목책이 치워지자 재빨리 채플 백작에게 달려갔다.
그를 호위하며 좁은 길을 벗어났다. 달려드는 제이크의 병사들을 상대하며 채플 백작을 인도했다. 그 사이 자신을 따르던 기사 몇 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알포네 기사단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죽음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짐했다. 꼭 복수해 주겠다고 그렇게 달려 좁은 길을 벗어나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채플 백작을 인도하고 곧이어 각 귀족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주위를 호위하던 병사들도 대부분 없었다. 그렇게 하나둘 좁은 길을 뚫고 나온 병사들이 넓은 공터에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으로 나오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알포네 기사단장이 병사들을 다독였다.
“어서 움직여라. 진형을 갖추어라!”
말을 몰며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병사들도 재빨리 몸을 움직여 진형을 갖추며 좁은 길의 입구를 응시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왔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사, 살려 줘!”
동료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병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곧이어 더 이상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채플 백작가의 병사들은 이미 진형을 갖춘 채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숲에서는 한 명도 적들이 나오지 않았다. 비명 소리가 없어져도 한참이 지나도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적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로이 남작이 채플 백작에게 말했다.
“놈들이 나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으으윽, 빌어먹을!”
이제야 넓은 공터로 나와 확실한 전투를 하려고 했지만 놈들이 나오지 않으니 그것도 되지 않았다. 속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알포네 기사단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어 간 부하들을 생각하니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에라도 저 숲으로 뛰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저 좁은 길에 들어가면 당하는 쪽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검의 손잡이를 꽉 쥐며 부르르 떨었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숨어서 야금야금 병력을 처리하는 것이 얌체처럼 느껴졌다.
기사라면 당당히 나서서 정정당당히 붙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전쟁이었다. 이것도 하나의 전술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