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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나이츠 3권 (8화)
Episode 23 채플 백작의 분노 (3)
입꼬리를 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리는 채플 백작. 그 목소리를 들은 벨키라노가 흠칫했다. 채플 백작의 행동과 말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라예키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벨키라노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채플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책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라예키르였다면 좋았겠지.”
벨키라노는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후드 속에 감춰진 그의 입이 들썩였다.
“아쉽지만 그 녀석은 오지 못한다.”
“왜지?”
“모르는가? 그럼 내가 얘기해 주지. 라예키르는 죽었다.”
“죽어? 훗, 정말 죽었나?”
채플 백작은 콧방귀를 끼며 몸을 돌려 벨키라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라예키르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벨키라노가 간단히 말했다. 채플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 알고 있는데 뻔뻔스럽게 죽었다고 하다니.
“하긴, 몸을 숨기고 싶겠지. 뭐, 어쨌든 상관없다. 그보다 네 녀석이 여긴 어쩐 일이지?”
채플 백작은 목소리에 노기가 어려 있었다. 사실 채플 백작은 확실히 라예키르에게 속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화가 난 것이다. 아니, 지금 당장에라도 벨키라노를 사로잡아 여태껏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
감히 자신을 속이고 무엇보다 에페로 자작가에 숨어 다른 녀석을 보냈다는 것이 더 화를 돋우고 있었다. 채플 백작은 싸늘한 눈빛으로 벨키라노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찢어 죽일 놈.’
채플 백작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기사단을 불러 저 녀석을 사로잡아 라예키르의 행방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아니, 녀석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흑마법사들의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얼굴만 잔뜩 일그러뜨린 채 그를 응시했다.
‘좋다, 그렇게 속이고 싶다면 속여라. 지금은 속아 주지. 하지만 네놈들을 나를 잘못 생각했어.’
채플 백작이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벨키라노는 채플 백작과 손을 잡고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그는 채플 백작에게 걸어가 말했다.
“라예키르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라예키르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싶은데 말이야.”
‘빌어먹을 놈. 라예키르가 죽어? 거짓말도 잘하는군.’
채플 백작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벨키라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속에서는 아직까지 분노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대신? 라예키르가 죽었으니 그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것인가?”
“그렇다. 난 동생의 복수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와 손을 잡겠는가?”
‘미친 놈. 내가 또 속을 것 같아.’
채플 백작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벨키라노가 있는 곳 앞에 마주섰다. 채플 백작은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지 못했다.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로 말했다.
“손을 잡아? 네놈들이 감히 날 놀려!”
“무슨 소리인가? 내가 그대를 왜 놀리는가?”
채플 백작의 말에 벨키라노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는지 채플 백작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닥쳐! 이게 다 짜고 나를 속이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내 모를 줄 알았나. 아니면 라예키르 그 자식이 자신은 죽었으니 날 만나러 못 오니까. 그대 보고 가라고 하던가? 앙!”
벨키라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벨키라노의 눈빛이 바뀌며 속으로 생각했다.
‘음, 아무래도 라예키르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군. 그렇다면 이놈과는 손을 잡지 못하겠어.’
벨키라노는 곧바로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 때문에 적대감을 나타내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채플 백작과는 손을 잡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벨키라노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 그보다 지금 그대의 행동과 말은 나와 손을 잡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벨키라노의 음성은 매우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채플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기는 소리 하네!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것 같아! 꺼져! 꺼져 버려! 다시는 네놈들을 내 땅에 들이지 않겠다! 어서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려!”
채플 백작이 강하게 말을 하자 벨키라노가 인상을 구겼다.
“유감이군.”
벨키라노는 그 한마디만 하고 몸을 돌려 창문으로 사라졌다. 그는 사실 베이런 후작과 채플 백작을 엮어 에페로 자작가를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채플 백작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는 벨키라노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물러서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벨키라노가 사라지고 채플 백작은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에페로 자작가나 흑마법사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자 치가 떨렸다.
이대로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 없었다.
“감히 끝까지 나를 능멸해? 어디 두고 보자.”
채플 백작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로이 남작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Episode 24 채플 백작의 시비(1)
1
나른한 오후의 일과는 언제나 달콤하다. 따뜻한 햇살이 창가에 비치고 어려움을 겪던 에페로 자작가도 따스한 봄날이 찾아온 느낌이다.
아이린은 오늘처럼 아무 문제없는 생활이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채플 백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이크가 자신에게 모두 맡기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훑어보다가 이내 펜을 놓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조용해. 평화로운 것은 좋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 과연 채플 백작이 어떻게 나올지.’
아이린의 눈가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네빌 집사가 들어왔다.
“아가씨.”
“네빌 집사님. 어서 오세요.”
아이린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네빌 집사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아이린의 표정도 굳어졌다. 네빌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채플 백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채플 백작가에서요? 무슨 일이죠?”
“아무래도 그 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네빌 집사의 말에 아이린이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모셔 오세요.”
“네, 아가씨.”
네빌 집사가 나가고 잠시 후 로이 남작이 들어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아이린에게 말했다.
“채플 백작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소.”
“그래요? 우선 앉으시죠.”
아이린이 로이 남작을 자리로 안내했다. 네빌 집사는 차를 준비하겠다며 나갔다. 자리에 앉은 아이린이 물었다.
“채플 백작님께서 무슨 말을 전하라고 하던가요?”
그러자 로이 남작이 바로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도 사뭇 진지했다.
“채플 백작님께서는 이번 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시오. 그 첫째로 증거도 없이 백작가를 농락했고, 모욕감을 안겨 준 것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하셨소.”
“네에? 농락이라니요. 저희가 언제?”
아이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농락했다고 말을 하는 로이 남작의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 남작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아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아이린은 거듭 이유를 모르겠다며 설명을 요구했다. 로이 남작은 눈빛을 사납게 바꾸며 말했다.
“솔직히 백작님께서 지금까지 에페로 자작가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소. 그런데 이런 식으로 모함하고 모욕해도 되는 것이오? 백작께서 분노하시는 걸 겨우 말리고 왔소.”
로이 남작의 말을 들은 아이린은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누가 누굴 모욕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저런 식으로 뻔뻔하게 나오다니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증거가 있긴 하지만 제이크가 소용없다고 했다. 아이린도 저쪽에서 발뺌한 이상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잘았다. 하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했다.
모욕이라니? 지금 누굴 모욕하고 있는지 몰랐다. 아이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며 욕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여기서 열을 내면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지만 여기서 냉정해야 해. 어쨌거나 저쪽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아야겠지?’
생각을 마친 아이린이 심호흡을 한 후 조용히 물었다. 지금 아이린에게는 무엇보다 냉정이 중요했다.
“솔직히 로이 남작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채플 백작님께서 도움을 주셨다는 것은 알아요. 그에 대해 저희도 감사를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도움에 관해서는 저희도 충분히 사례를 했다고 보는데요. 게다가 우리 가문과 채플 백작가와의 빚은 이미 없지 않나요. 그런데 이런 억지를 부리는 것은 저로써도 이해가 되지 않네요.”
아이린은 차갑게 말을 했다. 로이 남작도 저리 나올 것이라 예상은 했는지 베일 기사단장이 찾아와 얘기했던 것을 상세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린이 움찔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 조용히 말했다.
“그건 모욕이 아니지요. 저희도 레드베어 용병단 대장의 말을 듣고 확인차 들렀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이리 나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백작님께서는 매우 불쾌해하고 계시오.”
아이린이 충분히 설명을 했음에도 로이 남작은 막무가내였다. 아이린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도 솔직히 불쾌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후우, 알겠어요. 그래서 저희가 어떻게 사과를 하면 되나요?”
아이린은 우선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 남작은 그녀가 한 발 물러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적당히 성의 표시를 하기 바라오.”
“성의 표시라면?”
아이린이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그러자 로이 남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광산을 넘기시오.”
“네에? 광산이오?”
아이린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채플 백작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것 같았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광산을 요구한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아이린은 어이없는 얼굴로 로이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이린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아이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지금 당장에라도 로이 남작을 쫓아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백작가에서 온 사람인데 대놓고 박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이 힘이 없는 자의 설움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제이크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