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헬 나이츠 3권 (7화)
Episode 23 채플 백작의 분노 (2)
“모셔 왔습니다.”
“어서 들라 하라.”
하인이 문을 열었다. 곧이어 갑옷을 걸친 기사가 들어왔다. 그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채플 백작에게 다가가 기사의 예를 표했다.
“안녕하십니까, 채플 백작님. 저는 에페로 자작가에서 사신으로 온 베일 기사단장입니다.”
그의 인사를 받은 채플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페로 자작가에서 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아가씨께서 물어보시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그 순간 채플 백작이 움찔했다. 그는 곧바로 로이 남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이 남작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플 백작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베일 기사단장을 보았다.
“그래? 무엇을 물어보라던가?”
“네, 얼마 전 저희 광산으로 한 무리의 용병단이 쳐들어왔습니다. 그 일로 저희 에페로 자작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의 말에 채플 백작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베일 기사단장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혹시 그 용병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용병단이 어떤 용병단인가?”
채플 백작이 물었다.
“레드베어 용병단이라고 합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
채플 백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베일 기사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까? 근데 그들은 채플 백작님을 안다고 하던데요.”
“허허허, 당연히 알겠지. 나야 왕국 전체에 이름이 있으니 말이야.”
채플 백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베일 기사단장을 달랐다. 그는 눈빛을 날카롭게 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 용병단의 대장이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말로는 채플 백작님께서…….”
쾅!
베일 기사단장의 말을 끊는 듯 채플 백작이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다면 내가 그 녀석들로 하여금 광산을 공격하라고 시켰단 말인가!”
채플 백작의 언성에 베일 기사단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채플 백작님을 안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가씨께서는 혹여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계시지는 않는지 물어보라고 하셨는데…….”
베일 기사단장이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러자 채플 백작이 헛기침을 삼켰다.
“허험! 그, 그런 것인가?”
채플 백작은 괜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베일 기사단장의 자신에 찬 눈빛을 보는 순간 놈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자신이 지시를 내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해야 했다.
“나도 그 용병단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자세한 것은 모른다.”
채플 백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베일 기사단장이 의심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요? 정말… 모르십니까?”
베일 기사단장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그것을 본 채플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 지금 누굴 의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한 일도 아닌데 그 일로 협박을 할 심산인가?”
오히려 되레 큰소리를 치는 채플 백작이었다. 베일 기사단장은 바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협박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어쨌든 모르신다니 잘 알겠습니다. 무례를 범한 점 용서하십시오.”
“됐다!”
채플 백작이 고개를 홱 돌리며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베일 기사단장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잘 알겠습니다. 이번 용병단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신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신의 대답을 마친 메일 기사단장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때까지 채플 백작은 고개를 돌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로이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문이 닫히자 채플 백작은 참지 못했다.
쾅!
“이놈들!”
채플 백작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사신으로 온 자를 어찌할 명분이 없었다.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베일 기사단장이 나간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베일 기사단장이 채플 백작가를 나섰다. 그는 말 위에 올라탄 채 고개를 돌려 채플 백작가의 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베일 기사단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채플 백작 성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의 옆구리를 찼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는 했는데… 이래서 뭐가 잘된다는 거지?”
베일 기사단장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힘차게 몰았다.
베일 기사단장이 탄 말은 긴 울음을 터뜨리며 멀어져 갔다.
사실 채플 백작가에 베일 기사단장이 나타난 이유는 모두 제이크의 지시였다. 원래는 사신단을 꾸려 정식으로 항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제이크가 그것을 막아섰다.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는 말로 베일 기사단장을 따로 조용히 불러 지시를 내린 것이다.
제이크가 생각하기에 베일 기사단장이 최악의 경우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린이나 네빌 집사를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게다가 제이크가 직접 나서는 것도 꼴불견이고 말이다. 무엇보다 제이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다행히 별 다른 일 없이 무사히 마쳤지만 베일 기사단장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베일 기사단장은 제이크가 내린 지시대로 했다. 이제 결과는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제이크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베일 기사단장은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여태까지 그가 보여 준 행동. 자신을 믿고 맡기라고 하면 그는 그 믿음에 꼭 보답을 해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베일 기사단장은 제이크를 굳게 믿고 있었다.
3
베일 기사단장이 한바탕 휘젓고 간 집무실의 분위기가 몹시 좋지 않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채플 백작은 얼굴 가득 분노를 드러내며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는 로이 남작은 쥐죽은 듯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빌어먹을 놈!”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채플 백작이 욕을 내뱉는다. 로이 남작은 그 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했다. 이때는 절대로 채플 백작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있지만 없는 듯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한다. 까닥 잘못 말을 내뱉었다가는 불똥이 오히려 자신에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감히 자작가 주제에…….”
채플 백작의 분노는 더욱 올라갔다. 어떤 식으로든 자작가에서 백작가에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물론 채플 백작이 한 일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고 심문하듯 물어봤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채플 백작은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내 머리 위에 올라서려고 하는군.”
채플 백작은 분노를 곱씹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쿵쿵쿵!
고요한 침묵만이 감도는 집무실에 분노에 찬 채플 백작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힘차 보였다. 여전히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상태였다.
“으으윽, 정말 열 받는군! 열 받아! 으아악!”
와장창!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플 백작이 급기야 옆에 있던 도자기를 하나 들고는 땅바닥에 던져 버린다. 그리고는 강한 콧김을 뿜어대며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하아, 하아.”
붉은 실핏줄이 생겨난 눈으로 깨어진 도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도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채플 백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털썩 앉은 그는 두 손가락을 깍지 끼며 전방을 응시한다.
그때까지 로이 남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채플 백작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피며 자신이 말할 기회만 엿보았다.
채플 백작은 조금 전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원했던 일에 대해 실패해 본 적이 없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었고, 쟁취했다. 물론 광산이야 돈이 되지만 라예키르의 달콤한 말에 속아 도와줬던 것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점점 더 갖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광산뿐만이 아니라 에페로 자작가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모든 것을 얻은 후 그 계집을 자신의 노리갯감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혓바닥으로 자신의 발을 핥게 만들 것이다.
조금 전 자신을 농락했던 것에 몇 배를 갚아 주겠다고 다짐했다. 게다가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떠보기 위해 사신을 보낸 것을 모를 리 만무했다.
“앙큼한 계집년! 다 알고 있으면서 아주 얕은 수를 써!”
채플 백작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마치 비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베일 기사단장의 눈빛을 기억했다.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내리깔고 보는 시선. 그 녀석의 눈빛은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는 듯 쳐다보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그때만 해도 당장이라도 눈알을 뽑고 싶었지만 참았다.
“감히 날 모욕했겠다. 감히 날! 이대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채플 백작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로이 남작은 그 옆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어찌할지를 몰라 했다. 가끔 채플 백작의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때였다.
채플 백작 등 뒤로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화가 나는가?”
채플 백작의 시선이 홱 돌아가며 소리쳤다.
“웬 놈이냐?”
로이 남작도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언제 나타났는지 검은 로브를 걸친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한 채플 백작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그가 바로 흑마법사이기 때문이다.
“훗! 흑마법사?”
채플 백작이 코웃음을 날렸다. 무섭게 변한 눈빛은 어느새 싸늘하게 변했다.
“네놈은 누구냐? 설마 라예키르는 아니겠지?”
채플 백작의 말에 흑마법사가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 후후후. 벨키라노라고 한다. 라예키르의 둘째 형이지.”
그렇다. 채플 백작에게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바로 세 명의 흑마법사 중 하나만 남은 벨키라노였다. 채플 백작은 라예키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의 등장에 더욱 기분이 언짢았다.
“벨키라노? 라예키르가 아니라 둘째 형이라고?”
“그렇다.”
벨키라노의 음산한 음성이 나왔다. 채플 백작이 몸을 돌리며 의자에 깊숙이 묻으며 그를 쳐다봤다.
“라예키르가 아니라, 벨키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