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헬 나이츠 1권 (18화)
Episode 06 채플 백작의 방문(3)
“제, 제가 세어 보겠습니다.”
그러자 채플 백작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빌 집사는 하인을 시켜 상자를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하나하나 돈을 세어 나갔다. 그 사이 아이린은 여유롭게 찻잔을 들며 말했다.
“돈을 세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차라도 마시면서 기다리시죠. 모자라면 말씀하세요. 차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아이린의 비웃는 듯한 말에 채플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아이린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이, 이년이.’
아이린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차만 마셨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렀다. 채플 백작은 차도 벌써 열 잔째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이 로이 남작이 돈을 다 세었다. 정확하게 20만 1,000골드하고 1골드가 더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네빌 집사가 냉큼 1골드를 낚아채며 말했다.
“어이쿠, 1골드가 더 갔군요. 내가 그리도 철저히 셈을 하라고 일렀거늘.”
네빌 집사는 괜히 옆에 있는 하인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인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사실 1골드는 네빌 집사가 몰래 넣어 둔 것이다. 일부러 두 사람을 약 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동안 당한 것에 비하면 아주 약한 것이지만 그래도 막힌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다.
로이 남작은 다 세고 나서 놀란 얼굴로 채플 백작에게 말했다.
“배, 백작님! 맞습니다. 정확히 20만 1,000골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채플 백작이 곧바로 아이린에게 물었다.
“이, 이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했나? 내가 알기로는 이 정도의 돈을 구하기에는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러자 아이린이 채플 백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굳이 제가 그것까지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아참, 이제 이것은 필요가 없겠군요.”
아이린이 방금 생각이 났는지 앞에 놓인 계약서를 들고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채플 백작의 두꺼운 턱살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보아 분명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베이런 후작인가?”
“네?”
아이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베이런 후작가에서 도와줬냐는 말이다.”
채플 백작은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베이런 후작의 둘째 아들이 아이린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한 가지 결론을 낸 것이다. 만약 아이린이 둘째 아들의 마음을 받았다면 돈 많은 후작이 나섰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도 이 성을 노리고 있었고 말이다.
아이린은 채플 백작이 무슨 의도로 물어본 것인지 짐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발끈했다.
“불쾌하군요. 저를 뭐로 보시는 거죠?”
그녀의 말에 채플 백작도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하네. 내가 실언을 했네.”
채플 백작의 사과에도 아이린의 불쾌한 감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채플 백작이 속으로 생각했다.
‘성급했군. 일이 틀어지면 광산 개발권이라도 사야 하는데 말이야. 지금 상태에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겠어. 그나저나 저 많은 돈이 어디서 난 것이지?’
채플 백작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이며 고민을 해 보았다. 하지만 돈이 나올 곳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점점 궁금해졌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네빌 집사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쿡쿡!”
아이린도 얼굴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인상을 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언제 채플 백작의 저런 모습을 봤겠는가. 또한 그동안 이자를 바치며 당했던 수모가 한번에 쏵 내려가는 느낌이다.
“허험, 어쨌든 돈은 확실히 받았네. 잘 있게.”
“아니 왜요? 벌써 가시게요?”
아이린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채플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 일도 이제 없는데 여기 있어 무엇하겠는가. 다음에 또 보세나.”
그 말을 하고는 옆에 있는 로이 남작에게 소리쳤다.
“뭐하는 겐가! 어서 챙기지 않고!”
“네네, 백작님.”
괜히 로이 남작에게 불통이 튀었다. 로이 남작도 어리둥절한 듯 급히 대답을 하고는 그 큰 상자를 혼자 들겠다고 낑낑댔다.
“하인을 시켜 마차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네빌 집사가 나서며 말했다.
“그, 그리해 주겠는가?”
“네, 당연히 그래야죠.”
네빌 집사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로이 남작은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채플 백작은 이미 응접실을 나가고 없었다.
“배, 백작님. 같이 가시지요.”
로이 남작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이린이 크게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하하하!”
네빌 집사도 웃었다. 정말 가슴이 시원했다.
밖으로 나온 채플 백작은 숨을 씩씩거리며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로이 남작이 달려왔다.
“배, 백작님.”
로이 남작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채플 백작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저, 저도 잘…….”
“이런 멍청한 놈! 제대로 일 처리도 못하고 말이야! 오늘 나에게 이런 수모를 안겨 줘!”
“죄, 죄송합니다.”
로이 남작은 허리까지 숙이며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채플 백작의 분노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계속해서 로이 남작을 야단쳤다.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놈! 감히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니! 으윽, 멍청한 놈!”
“…….”
로이 남작은 온갖 욕을 들어먹으면서도 고개만 푹 숙인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때 제이크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훗, 꼭 뿔난 돼지 같군.”
제이크의 입꼬리 슬며시 올라가며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마치에 올라탄 채플 백작이 뒤이어 마차에 오르려고 하는 로이 남작을 발로 찼다.
쿵!
“배, 백작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로이 남작이 아픔도 잊고 놀란 얼굴로 그를 불렀다.
“네 녀석과 같이 타고 가고 싶지 않다.”
쾅!
그 말과 함께 마차의 문이 닫혔다. 로이 남작이 울먹이며 말했다.
“백작님, 그럼 저는 어떻게 갑니까?”
“걸어서 오든지 기어서 오든지 알아서 해! 가자!”
채플 백작 혼자 탄 마차가 뿌연 먼지를 품어 내며 떠나갔다. 고스란히 먼지를 뒤집어쓴 로이 남작은 그 자리에 앉아 멍한 상태로 떠나가는 마차를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백작니임!”
그 모습을 보던 제이크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꼴좋군.”
그러는 사이 돈을 가지고 나온 하인과 네빌 집사가 그런 로이 남작을 보며 위로했다. 그리고 에페로 자작가에서 마차를 꺼내와 로이 남작과 돈을 싣고 보내 주었다.
로이 남작은 거듭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3
그날 저녁 에페로 자작가의 앞마당에서 식솔들의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횃불이 군데군데 피워져 사방을 밝혔고, 한 곳의 화로에서는 큰 돼지가 구워지고 있었다.
큰 식탁이 나왔고, 하인들과 하녀들의 손에는 갖가지 음식들과 술, 과일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가지고 나오는 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저기다 놓게. 아니, 그것은 저쪽으로.”
그 한가운데 네빌 집사가 가지고 나오는 음식들의 위치를 지정해 주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도 오늘처럼 기쁜 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창가를 통해 내려다보는 이가 있다. 바로 아이린이었다. 그녀는 앞마당에서 갖춰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얼마 만에 갖는 파티인지 몰랐다. 비록 집안 식구끼리 갖는 파티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은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제이크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서 뭐해?”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린이 몸을 돌렸다.
“아, 잠시 정리할 것이 있었어요.”
“그래? 아직 멀었어?”
“아뇨, 방금 다 끝냈어요.”
아이린이 밝은 미소로 말했다. 제이크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창밖을 보았다.
“다들 좋아 보이네.”
제이크가 말했다. 그도 10년 전 저런 파티를 종종 했었다. 바로 저 자리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이런 행복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치열한 생존 싸움을 벌여야 하는 무서운 곳이었기에. 그리고 이런 기억들은 차츰 그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다.
그런데 오늘 깊은 기억 속에 감춰졌던 것을 끄집어냈다. 해맑게 웃고 행복해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아이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들 행복해하는 모습이 얼굴이 다 나타나요. 저들을 보는 저도 기분이 좋네요.”
“다행이네.”
짤막한 말이지만 그 안에 담은 깊은 뜻을 모를 리 없는 아이린이었다. 잠깐 동안 밖을 응시하던 아이린이 몸을 돌려 제이크에게 인사를 했다.
“에페로 자작가를 대표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정말 고마워요.”
아이린이 공손한 행동에 제이크가 당황했다.
“왜, 왜 그래?”
“당연히 우리 가문을 도와주신 것에 대한 인사예요.”
“이, 이런 낯간지러운 것을 바라고 한 일 아냐. 무엇보다 난 투자자야. 나중에 돈이 생기면 다 받을 생각이니까. 이런 것으로 무마할 생각 마.”
제이크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돌리며 말을 했다. 물론 속으로는 그도 기뻤다.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말이다. 하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나 참.’
아이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죠. 저도 빚지는 것은 싫어요.”
“그, 그래? 그럼 됐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창밖을 응시하는 제이크는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은 해야 하긴 해야 하는데…….
그때 아이린이 말했다.
“어멋!”
“왜, 왜?”
제이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린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나 봐요. 우리도 나가요.”
“으응? 난 좀…….”
제이크가 살짝 꺼려 했다. 사실 저런 파티를 느껴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너무 오랫동안 저런 식의 행복을 느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이린이 제이크의 팔을 잡았다.
“남자가 왜 그렇게 빼요. 어서 나가요.”
제이크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아이린이 잡은 팔을 의식적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제이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가요!”
“어, 어어어.”
제이크도 못이기는 척 아이린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앞마당에 아이린의 모습이 나타나자 모여 있던 식솔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아가씨께서 나오셨다.”
그들은 아이린을 보며 크게 박수를 치며 반겨 주었다. 아이린은 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옆으로 네빌 집사가 다가왔다.
“아가씨. 저리로 가시지요.”
“네.”
네빌 집사가 제이크와 아이린을 자리로 안내했다. 그 앞에는 역시 먹음직스런 음식들로 가득했다. 아이린은 우선 자신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높이 들었다.
“오늘 우리 에페로 자작가는 새롭게 태어나는 거예요. 지난날 힘들었던 시절들은 모두 잊고 오늘밤 다 같이 신나게 놀아요. 술과 음식들은 넉넉하니 밤새도록 마시도록 해요. 모두 다 같이 잔을 높이 들어요.”
아이린이 잔을 높이 들자 식솔들도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그리고 아이린의 힘찬 외침이 들려왔다.
“에페로 자작가를 위하여!”
그러자 식솔들이 말했다.
“에페로 자작가를 위하여!”
아이린이 단숨에 와인 잔을 비웠다. 그 순간 전통악기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며 흥을 돋웠다. 식솔들은 술과 음식들을 신나게 먹으며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췄다.
아이린도 그들의 춤을 추는 모습을 감상했다. 제이크가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박수를 치며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제이크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폴과 필이 뛰어들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