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헬 나이츠 1권 (5화)
Episode 01 에페로 자작가의 위기(2)
“아니에요. 어쨌든 다 같이 방법을 강구해 보아요.”
“네, 아가씨.”
집사는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나가는 집사의 어깨가 한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 집사의 모습을 보는 아이린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 비친 둥근 달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버지, 오라버니……. 나 어떡하면 좋아요.”
아이린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잠시 후 그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2
넓은 침상에 남자가 누워 있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이 큰 병에라도 걸린 모양이다. 그 곁에는 아이린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도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그 뒤에는 물수건을 들고 서 있는 하녀가 있다.
그녀는 아론을 곁에서 보살피는 하녀였다. 하녀도 몹시 걱정하는 얼굴이다. 매일매일 땀을 닦아 주고, 혹시라도 병세가 더 악화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인 것은 더 이상 병세가 악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한참을 힘들어 하는 아론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이린이 나직이 물었다.
“오라버니의 상태는 어때?”
그러자 곧바로 하녀가 입을 열었다.
“매일 이 상태세요. 나아지지도 않고요. 다행인 것은 병세가 더 악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신관의 말로는 이대로 계속 독을 정화하다면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는다고 해요.”
“그래? 다행이구나.”
“그런데 계속해서 잠만 주무시니 걱정이에요.”
하녀가 말했다. 아이린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걱정이야. 그보다 신관께서 다른 말은 없었어?”
일말의 희망을 걸며 물었다. 사실 아이린은 무너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집무실에 있다. 그래서 오라버니를 만나러 자주 오지 못한다. 하물며 신관이 와서 오라버니를 치료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곳에 오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며 간호하는 하녀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하녀는 아이린의 물음에 대답했다.
“별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나을 수 있다는 말도 없었어?”
“……네.”
하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작게 말했다. 아이린이 손을 들어 창백한 아론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희망은 버리지 말아야지. 계속해서 독을 정화하다 보면 분명 살아날 수 있을 거야.”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하녀도 힘을 주며 말했다.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에페로 자작가의 장남인 아론 에페로였다. 그는 원인 모를 독에 중독되어 이렇듯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다. 아이린은 수건으로 아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제발, 눈이라도 떴으면…….”
아이린이 나직이 속삭였지만 아론은 두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소리만 내뱉고 있다.
사실 아론의 상태는 매우 위중했다. 신관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유지했지만 여전히 몸속에 워낙 많은 독이 남은 상태라 어찌하지 못했다.
다만 신관이 매일 찾아와 조금씩 독을 정화시키고는 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독을 정화시키는 동안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사 상태에 빠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눈도 뜨지 못하고 잠만 계속해서 자는 것이다.
“오라버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아론의 손을 잡고 중얼거리는 아이린. 하지만 잠든 아론은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해 주지 못했다. 그런 오라버니를 보는 아이린의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 했다.
‘약해지지 말자, 나까지 무너지면 가문은 끝이야.’
아이린은 애써 마음을 다 잡았다. 하지만 현실은 계속해서 아이린을 낭떠러지로 몰고 있었다.
아론이 병을 이겨 내고 일어난다면 혹시라도 가문을 살릴 방도가 있을 텐데. 이런 상태니 아이린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아이린도 하녀도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침대에 누워 앓고 있는 아론만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아이린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아론의 손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녀가 급히 대답을 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그때 집사가 허겁지겁 뛰어들어 왔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으면 뭔가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아이린이 집사를 발견하고는 급히 물었다.
“네빌 집사님,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큰일입니다.”
“네에? 무슨 일인가요?”
아이린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네빌 집사는 침을 한차례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채, 채플 백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채플 백작가에서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아이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굳은 의지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지금 가겠어요.”
아이린은 대답을 하고는 몸을 돌려 아론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3
아이린은 네빌 집사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갔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곳에 채플 백작가의 가신인 로이 남작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한 아이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를 같이 해 창가를 보던 로이 남작이 몸을 돌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아이린을 발견하고는 인사를 한다.
“오랜만입니다. 아이린 님.”
“네, 어서 오세요. 로이 남작님.”
아이린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진 채 걸음을 옮겨 의자로 가서 앉았다. 로이 남작도 의자에 앉았다. 아이린은 그가 앉아 곧바로 물었다.
“남작님, 아직 이자를 갚을 날이 아닌데 이곳에는 무슨 일이신가요?”
아이린이 차갑게 말했다.
에페로 자작가는 채플 백작가에게 막대한 빚을 진 상태였다. 사실 빚을 진 것도 본디 에페로 자작이 서쪽 산맥 너머에 광산을 개발하겠다고 하면서부터였다.
광산 개발 소식을 접한 채플 백작이 자신도 참여시켜달라며 에페로 자작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단독으로 하겠다며 거절을 했지만 끝임 없이 찾아와 사정을 하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투자만 하는 조건으로 광산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광산 개발은 아무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물론 에페로 자작이 살아 있는 동안은 말이다.
그런데 에페로 자작이 급작스럽게 죽자 그 광산 개발도 흐지부지해져 버렸다. 계획부터 시작해 모든 일정을 에페로 자작이 관리했기에 장남인 아론도 손을 대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은 병으로 누워 있으니 누가 책임지고 광산 개발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린이 나서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광산 개발은 전면 백지화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채플 백작이 투자 계약서를 들고 와 다짜고짜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막대한 돈을 지불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투자금을 핑계로 영지까지 먹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간신히 이자를 내며 막고는 있지만 그것이 힘에 부쳤다.
왜냐하면 그 이자만 해도 무려 500골드나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에페로 자작이 살아 있을 때는 이 정도의 이자는 충분히 갚을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힘들다.
상단도 망하고 이렇다 할 수입들조차 점점 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낼 돈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어쨌든 힘겹게 돈을 긁어모아 이자는 내고 있기는 한데 이것도 아마 다음 달은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물며 이번 달 이자 낼 날도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로이 남작이 나타났으니 아이린의 시선이 고울 수가 없다. 하지만 로이 남작은 이자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얄밉게 난 수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허허허, 이런. 뭔가 오해를 하셨군요.”
“오해요?”
아이린이 날카로운 눈매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저 의논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걸음을 했는데 노골적으로 싫은 눈으로 말씀을 하시니 섭섭합니다.”
로이 남작이 약간 불만 섞인 음성으로 말하자 아이린이 곧바로 부드러운 얼굴이 되었다. 어쨌든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괜히 책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상의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이에요?”
“네, 말씀드리죠. 요새 소문을 듣자 하니 사정이 많이 힘드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래서요?”
“이대로 가다간 빚만 늘고 파산하실 것 같은데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로이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요?”
아이린이 물었다. 그러자 로이 남작이 생각했던 바를 얘기했다.
“채플 백작님에게 빚진 돈을 모두 탕감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자작령 서쪽의 산맥과 맞닿은 보일란 성을 팔아 주십시오.”
“보, 보일란 성을요?”
아이린이 깜짝 놀랐다. 반면 로이 남작은 신중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보일란 성은 갑자기 지력(地力)이 나빠지면서 영지 생산력이 떨어졌다. 지금은 산맥 근처에서 나는 광물과 목재, 약초들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또한 에페로 자작가로서는 유일한 수입원이기도 했다. 게다가 광물이라고 해 봤자, 예전 프라인 백작가에서 개발한 곳이었다. 지금은 그 광산에서도 거의 광물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그 지역을 포기하라는 말은 영지를 망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뭐, 시간이 지나면 결국 망하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수입원인 그곳을 판다는 것은 어림없었다. 아론 오라버니의 약값과 에페로 자작가에 딸린 식솔들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채플 백작가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망하게 될 영지이기에 빚쟁이들이 전부 들이닥치기 전에 가장 먹음직스런 땅을 미리 선점해 놓겠다는 욕심이었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아이린은 속상했다. 아직 망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파리 떼들이 달려들려고 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인데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너무해, 정말 인정이라도 있는 사람들인가?’
아이린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하지만 참으려 해도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은 막지 못했다. 아이린은 막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로이 남작은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쳇, 여자애들 우는 건 정말 재수 없는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입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무척이나 너그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제가 너무 많이 아이린 님을 괴롭혀 드렸군요. 어떻게 한다… 나도 백작님의 심부름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오.”
“…….”
로이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아이린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린이 입을 열지 않자 로이 남작은 아예 확답을 얻으려는 듯 마지막 말을 꺼냈다.
“지금 당장 말씀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답은 천천히 해 주셔도 좋습니다. 아, 이자 내는 날이 열흘 뒤니까. 그때 말씀해 주시면 좋겠군요. 아니, 생각은 천천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단 열흘 뒤 까지는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을 천천히 하라고 하면서 열흘 뒤에 듣겠다니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아이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는 사이 로이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할 말을 다 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전 채플 백작님의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열흘 후 다시 뵐 때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로이 남작이 인사를 하고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 아이린은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흐흑.”
옆에 있던 네빌 집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 아가씨.”
네빌 집사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선뜻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아이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흐느끼고만 있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아이린이 눈물을 훔치고는 집사를 불렀다.
“네빌 집사님.”
“네, 말씀하세요. 아가씨.”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네빌 집사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한 후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책상 근처로 천천히 걸어가 섰다. 그러고는…….
“으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