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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13화 (에필로그 완결) (314/314)

환관의 요리사 313화 에필로그 5화

실컷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었으니, 이제 웃는 얼굴로 내일을 맞이하러 가자꾸나.

그리고 또다시,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서…….

* * *

법국의 수도, 펠리스의 파리안 언덕에 우뚝 선 만신전의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소년은 웃음을 머금은 채 굳어버린 입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상대에게 호의적으로 해석되며 별 의미 없이 내보이기 좋다는 점에서 웃음은 언제 어디서나 무난한 표정이다.

하지만 무표정보다 입가와 눈가에 피로가 축적되기에 장시간 유지하기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교황과의 회담에서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장시간 옅은 웃음을 지어야 했던 소년의 입가는 이미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소년은 입을 쩍 벌려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까이로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둥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멀리는 엘 마라 법국의 수도 펠리스의 정경과 한없이 멀지만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지평선이 보였다.

“참, 그냥 가려니 아쉽습니다그려. 또 언제 이 풍경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보기 드문 절경에 소년이 감탄사를 중얼거리자 보좌관 명목으로 회담에 참석했던 태감이 기지개를 켜며 대꾸했다.

“그리 아쉬우면 하룻밤 자고 가지 그러냐. 신전이 이리 크니 방문객을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을 테지.”

“아예 밥도 여기서 먹고 가지요? 신전인데 굶주린 이를 박대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신전 밥이라.”

태감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눈으로 뒤쪽의 백작을 바라보았다.

비밀 회담장 앞에서 그들이 퇴실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백작이 태감의 눈짓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커흠, 성직에 있는 자는 늘 검소함과 청빈함을 미덕으로 삼아야 하는 법인지라.”

“신전 밥도 검소하고 청빈하다?”

“주린 배를 채울 정도는 됩니다만.”

말 그대로 주린 배만 채울 수 있을 정도라는 의미였다.

백작이 예시로 사흘 굶은 개도 피해 가는 콩죽과 말도 인상을 찌푸린다는 귀리죽, 극심한 코감기에 걸린 이도 악취를 맡을 수 있어 달리 걸레 빤 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감자 스튜, 성벽을 건설할 때 주춧돌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는 보리빵 등을 들자 태감은 창백하게 질려서는 손사래를 쳤다.

“정이 맛보고 싶으시다면 금식일보다도 고통스럽다는 고난의 식사를 체험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만…….”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무척 뜻깊은 기회인 줄은 알지만, 떠나온 고향 땅의 음식이 그리워 오늘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도.”

“크흠, 자신의 배를 채울 것이 있음에도 남에게 돌아갈 식량을 탐내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지요. 제 먹을 것은 숙친왕 전하께서 마련해 주실 테니, 신전의 식사는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겠습니다.”

소년은 구정물 같은 감자 스튜와 입에서 데굴거리는 콩죽, 구더기가 들끓는 건빵도 우적우적 삼키는 선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보리빵을 앞에 둔 태감의 얼굴을 상상해 보고는 작게 키득거렸다.

제법 볼만하겠는데.

소년은 타인의 불행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성격이었고,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태감이었다.

태감은 소년이 혹시 신전의 밥맛이 궁금하다고 할까 봐 겁이 난다는 듯 걸음을 재촉하여 유서 깊은 기둥을 지나쳐 만신전을 빠져나갔다.

소년은 실실 웃으며 느릿하게 태감의 뒤를 따라 걷다가,

태감이 충분히 멀어졌을 때쯤.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나?”

작은 목소리였고, 지나가듯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렇기에 앞서 걸어가던 백작은 조금 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반문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니,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충분히 성의가 있었기에 소년은 부드러운 어조로 몇 마디 부연설명을 덧붙여 다시금 말했다.

“회담 내용 말일세. 궁금하지 않나?”

서방 종교계의 수장인 교황과 이국에서 온 왕의 비밀스러운 회담.

설령 정치에 관심이 없는 무지렁이 촌부라 할지라도 궁금해할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난처한 얼굴로 옆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개 사제 신분으로 궁금해할 만한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고개를 들이밀지도 않겠다?”

과연 자기 보신을 최우선 가치로 꼽는 정치인다운 노련한 처세술이었다.

소년은 젊은이들에게 보기 드문 감탄스러운 자제력을 보인 백작을 보며 혀를 내두르다가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해 질 녘 까마귀만큼이나 불길한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유감일세.”

백작이 무엇이 유감이냐고 묻기도 전에 소년은 답을 알려주었다.

“머지않아 알게 될 테니.”

“예? 그게 무슨……”

“그때쯤 되면 신분을 핑계 대지는 못할 걸세. 흠, 어찌 보면 축하할 일이군.”

소년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백작을 앞질러 걸었다.

백작은 소년의 말을 곱씹으며 골몰하다가 소년의 등이 점처럼 보일 만큼 멀어진 것을 보고는 다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소년은 자신의 등을 쫓는 달음박질 소리가 가까워질 때쯤 왼발 발뒤꿈치를 축으로 삼아 빙글 돌아섰다. 그러고는 답을 구하러 온 백작을 향해 말했다.

“이제 슬슬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군. 애석하게도 태감께선 신전의 경건한 만찬에 참석하실 의향이 없으신 것 같으니, 식사 준비는 평소처럼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자네도 함께하겠나?”

백작은 혀끝까지 올라온 의문을 빗장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으리라. 분명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될 테니, 사람이 가장 여유롭고 넉넉해지는 저녁 식사 후가 적기일 테지.

백작은 질문을 유보하고는 기대감으로 한껏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석이나마 선생님께서 차리신 식탁에 앉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허허, 법국의 백작 나으리께 어찌 말석을 내어드리겠나. 내 오른쪽 자리에 앉으시게.”

소년은 봄바람 맞은 열일곱 처녀처럼 기대감으로 벅차오른 가슴에 양손을 다소곳이 모은 백작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어제는 우리가 먹고 싶은 걸 먹었으니, 오늘은 자네가 먹고 싶은 걸 차려주지.”

* * *

지평선에 걸터앉은 태양이 한숨으로 하늘에 불티를 흩날리는 시간.

만찬장은 붉게 달아오른 하늘 아래에 차려졌다.

뒷덜미를 쓸어 만지는 저녁 바람결은 서늘했고, 황혼이 내려앉은 하늘엔 울긋불긋 저무는 햇살로 치장한 꽃구름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년은 외교관 공관의 정원에 차려진 식탁 위에 소박한 화병을 내려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로 만들어진 둥근 화병에는 참싸리와 솔체꽃, 여뀌가 꽂혀 있었다.

“야외에서 식사하기에 좋은 날이야. 술 한잔 걸치면서. 그렇지 않은가?”

“함께 건배하며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할 친구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소년은 우수에 젖은 백작의 눈을 보며 맞장구를 치려다, 백작의 뒤쪽에서 한껏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있는 태감을 보고는 어물쩍 얼버무려 대답했다.

저 양반이라면 건배하는 척하면서 술을 끼얹고도 남지.

소년은 속 좁은 양반 어쩌구 하며 태감의 인격적 결함을 속으로 헐뜯고는 헛기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백조의 날개깃처럼 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을 가리켰다.

식탁에는 옥으로 만든 받침 위에 놓인 젓가락과 청자 앞접시. 그리고 은 고리에 끼워진 냅킨과 세필로 우아하게 적은 각자의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태감과 백작. 단혜림. 장소와 이삼. 그리고 표자승이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자 소년은 만찬의 주최자이자 주방장으로서 가볍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녹색 유리병을 들어 각자의 잔에 식전주를 따라주었다.

달콤새큼한 향기와 함께 잘 익은 사과 속살 색의 술이 수정 잔을 가득 채운다.

기포와 함께 부드러운 거품이 보글보글 솟아오른다. 입술을 간질이고 목구멍을 따갑게 할 청량한 한 모금.

만찬은 잘 익은 사과주(cidre) 한 모금으로 시작되었다.

상큼하고 살짝 떫으며, 입에 군침이 돌 만큼 새콤하고, 목으로 넘기고 나면 은근하게 달콤한.

매혹적인 사과주의 맛에 어른들이 한숨을 내쉬는 동안 아직 머리에 피가 덜 마른 아이들은 볼을 부풀리며 사과 주스를 마셔야 했다.

물론 레몬즙 약간과 향기로운 꿀을 첨가한 사과 주스 역시 만찬을 시작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소년은 불만으로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아이들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고는 자신의 잔을 비웠다.

그리고 하나둘, 요리가 상에 올랐다.

진하게 우려낸 닭 육수에 노오란 배춧속을 넣고 끓여낸 청나라 궁중 탕 요리 개수백채(開水白菜), 흰살생선 완자를 새끼손톱 크기로 깍둑 썬 두부로 감싸 보드랍게 쪄낸 두부회춘사자두(豆腐鮰春狮子头).

야들야들하게 쪄서 뼈를 발라낸 돼지 앞다리에 두부를 채워 간장에 윤기 나게 조려낸 취피동파고퇴(脆皮東坡烤腿), 굵게 다진 메추라기 살을 잣과 함께 달콤짭짤하게 볶아낸 생초암순(生炒鹌鹑).

포동포동한 새우살을 다져 차지게 반죽하여 기름에 지져낸 전하병(煎虾饼), 꿀을 발라 말린 거위를 화덕에 구워낸 고법와항소아(古法瓦缸燒鵝).

제국 본토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화려한 요리가 상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백작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식탁의 정 중앙에 놓인.

“건팽계(乾烹鷄)와 흑초 탕수육. 이것이 오늘의 메인 요리지.”

곱게 다진 청홍고추가 넉넉하게 얹어진 닭 다리 살 튀김.

식초와 간장, 술을 넣고 마르게 볶아낸 건팽계는 바삭하고도 향긋했으며, 씹으면 육즙이 혀를 촉촉하게 적실 만큼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고추와 파, 생강의 톡 쏘는 알싸한 향기와 녹말 옷을 입혀 튀겨낸 다리 살.

얇은 녹말 옷이 어금니 사이에서 바스러지는 바사삭 소리.

겨울 낙엽을 밟듯 섬세한 울림이 턱뼈를 타고 귓바퀴에 감돈다.

아삭. 아삭.

은은한 소리로 귀를 적시고 산뜻한 맛으로 혀를 축이고 나면.

“건팽계로 입맛을 다시고 나니.”

“탕수육이 눈에 들어오는가?”

잠에서 깨어난 위장은 더욱더 기름지고 강렬한 맛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한 백작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그의 앞접시에 아직 바삭한 기가 남아 있는 탕수육을 올려주었다.

새끼 돼지의 갈비를 튀겨 풍미 좋은 흑초로 만든 당초에 버무린 탕수육을.

페르시아 요리의 보석이라 불리는 매자와 소금에 절인 레몬, 중동에서 아나르다나라 불리는 야생 석류의 씨앗으로 복잡하고 풍성한 신맛을, 벌꿀보다도 진하고 그윽한 대추야자 시럽 디비스로 짙은 단맛을.

흑염이라고도 부르는 화산 호수에서 채취한 무기질 덩어리, 칼라 나마크로 오묘한 대지의 향기와 은근한 짠맛을.

그리고 산서성의 최상품 흑초로 그윽한 풍미를 더한 최상의 당초와. 삼 개월 된 어린 돼지의 기름기 잘 오른 갈비.

바삭한 튀김옷을 입고 맑은 유채씨기름에 튀겨진 갈비가 검은 식초 소스로 치장한 채 혀 위로 뛰어든다.

혀끝이 오그라들 만큼 시큼한 듯하다가 이내 진득한 단맛이 찾아오고, 단맛이 혀 위에 고인 군침으로 묽어질 때쯤 은은한 쌉싸름함과 함께 메마른 모래땅의 거친 흙냄새가 살그머니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시고, 달고 쓴 인생의 고락이 혀끝에 스며들고 나면, 고단했던 세월의 야속함을 채워줄 갈비의 달큼한 기름기가 혀 위를 살그머니 어루만진다.

쫀득하고 말캉한 비곗살. 골즙의 구수한 감칠맛이 스며든 살코기.

백작은 달뜬 숨을 몰아쉬고는 잔에 반쯤 찬 사과주를 들이켰다.

소년은 그의 잔에 가볍게 자신의 잔을 부딪치고는 말했다.

“그래, 요리는 마음에 드는가?”

백작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쉰 후, 요리의 여운에 취한 혀를 힘겹게 놀려 대답했다.

“그저,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이 요리를 다시 맛보려면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뜨는 해와 지는 달을 재촉하며 다시 뵐 날이 오기만을 뜬눈으로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말끝을 흐린 백작은 말을 잇기 어렵다는 듯 길게 숨을 몰아쉬고는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말할 시간도 아끼고 싶다는 듯이. 그저 이 요리에, 이 미식에 잠겨 들고 싶다는 듯이.

소년은 맹렬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는 백작을 보며 나지막하게 웃고는 말했다.

“너무 아쉬워 말게. 앞으로는 자주 먹게 될 테니. 몸은 조금 고달프겠지만 말이야.”

백작은 반문하는 대신 희망과 기대를 품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잔을 들어 올렸다.

만찬을 기념하기 위한 건배가 아닌, 젊은 백작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을 위한 건배였다.

“이번엔 내가 자네를 찾아왔으니, 다음엔 자네가 날 찾아오게.”

제국에서 봅세. 샤를.

-에필로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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