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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12화 (313/314)

환관의 요리사 312화 에필로그 4화

소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백작을 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빛을 흠뻑 머금고 있던 하늘이 누렇게 떠 있었다.

소년은 핏기없는 멀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백작에게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백작의 눈동자는 초저녁에 뜨는 개밥바라기별을 박아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사내가 앞으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한 결심을 했을 때.

지금껏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 자신이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통째로 내던질 때.

소년이, 김승조 역시 몇 번이나 빛내고는 했던, 젊은 혈기를 연료 삼아 불타오르는 패기 넘치는 눈동자였다.

남 일이었으면 도전정신이 있는 요 근래 보기 드문 젊은이라고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줬겠지만.

소년은 백작의 눈을 힐끔 보고는 흉금 깊숙한 곳에서 부풀어 오르는 거북함을 느끼며 진저리쳤다.

그리고 소년이 물러난 빈자리를 채우듯, 태감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 사슴처럼 길고 고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저번에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도 포기를…….”

“태감님. 그간 평안하…….”

“지 못했습니다, 백작님 덕분에.”

근본도 없는 놈이 어딜 감히 내 요리사를!

태감은 마치 발톱을 들어낸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 쏘아보며 백작을 몰아붙였다.

소년은 며느리 잡는 시어머니 같은 태감과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백작에게서 멀찍이 물러서서는 한적한 졸참나무 그늘 아래에 주저앉았다.

소년의 옆으로 흥미롭다는 듯 고부갈등 급의 수라장을 구경하고 있던 단혜림이 다가와서는 말했다.

“역시, 미모는 삼 년, 요리는 삼십 년이라. 남자는 위장을 잡아야 한다고들 하더니. 재주가 아주 일품일세?”

“그러게나 말입니다. 재주가 너무 좋아서 탈이 났나 봅니다.”

탈이 나도 아주 단단히 났지. 멀쩡한 물건은 어디 가고 저런 요상한 것들만 걸렸을까.

소년은 혀를 끌끌 차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단혜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혜림은 한창 흥미진진해지는 구경거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어쩌겠나?”

“어쩌겠습니까. 저 좋다고 오겠다는 거.”

양다리 다 분질러서라도 뜯어말려야지요.

무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린 한마디에 단혜림이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 좋다고 온다는데, 허락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어지간한 친구여야 눈감아주지요. 법국의 외교관에 영주, 사제 서품을 받은 성직자. 그런 인간이 다 버리고 다른 나라에 간다는데 어떤 군주가 잘 살라고 등 떠밀어 보내주겠습니까. 이적행위, 아니, 적국은 아니니 이적행위는 아니더라도…….”

“국가 기밀을 다수 알고 있는 고위 공직자를 곱게 보내주지는 않겠지?”

“보내는 줄 겁니다.”

다만, 중요한 게 든 머리는 보내줄 수 없으니 머리는 떼어놓고, 머리 아래 몸만 보내주겠지요.

소년은 실없는 농담을 흘리고는 입꼬리를 씰룩이다가 말았다.

매가리가 없는 그 농은 소년 스스로도 웃기지 못했기에 대신 단혜림이 슬쩍 웃어주었다.

“그런 자리에 앉은 자가 제 몸값을 모를 리가 없으니, 다 각오하고 한 말일 테지?”

“그냥 한번 해본 말이겠지요. 왜, 젊을 때는 다들 한번은 그러지 않습니까.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다가 그…….”

“객기를 부리고는 하지.”

단혜림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세 글자였다.

그 소리는 잠자리가 날개를 펴듯 작았기에 소년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젊음과 패기를 가져가는 대신 남겨두고 간 연륜 덕분에, 소년은 그녀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무엇을 말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분명 지금은 젊은 날의 객기였다고 말하게 된 꿈과 그 꿈을 함께 꾸었던 사람의 이름이리라.

소년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태감은 여전히 백작과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참나, 기운도 좋지.

소년은 다시 숨을 길게 내쉬고는 옷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저희 쪽 사정상으로도, 저 친구는 법국에 남아서 커 줘야 하니. 어쩔 수 없지요.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든 묶어놓든 해서, 자리에 앉혀놓는 수밖에.”

“사정이라. 그것은 전하의 사정인가. 아니면.”

폐하의 사정인가?

짓궂게 물어오는 단혜림을 향해, 소년이 송곳니가 보이도록 길게 입꼬리를 찢으며 말했다.

“저희의 사정입니다.”

“과연. 앞으로 재밌어지겠군.”

벌써부터 돌아갈 날이 기대되는군. 경사로 돌아갈 날이.

단혜림의 말에 소년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이구 지지리 못난 양반들 같으니. 싸울 거면 밥이나 먹고들 싸워!”

* * *

세상일이란 것이 어디 뜻대로만 되던가.

“밥부터 먹고 하자고 할 걸 그랬나.”

“기다려 달라 했으면 정말 기다려 주기는 했을 거다.”

“그리고 욕은 바가지로 먹었겠지요? 이번 사열에 동원된 인력이 총 몇 명이었지?”

“예? 일단 사열에 동원된 군 인력이, 의장대에 왕실 기병대, 제1 황금사자 군단이랑 제3 늑대머리 군단이니 총…….”

“어이구야, 두 개 군단에 욕을 먹으면 무병장수하기는 하겠네.”

군단 사열을 시작으로, 왕의 지위에 걸맞은 융숭한 대접을 받은 끝에 간신히 법국에서 제공한 외교 인사용 공관 한편에 몸을 누인 소년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꼭 소금에 절여 물기를 짠 양배추 같은 몰골로 소파에 늘어져 있던 소년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국에서보다 조금 늦게 뜬 서방의 태양이 슬금슬금 지평선 끝자락에 발을 걸치는 시간이었다.

소년은 잿가루처럼 흩뿌려진 새털구름 사이로 잉걸불의 숨죽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황혼이었고, 미뤄두었던 기름칠을 할 시간이었다.

얼빠진 얼굴로 늘어져 있던 소년이 튕기듯 일어섰다.

복직근의 힘만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 위엄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눈에 모인다.

하나같이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이들을 둘러본 소년이 기지개를 켰다.

미성숙한 어깨관절에 어울리지 않는 우악스러운 소리가 크게 울린다.

“할 말도 많고 할 것도 많다만. 일단 배에 뭐 좀 넣고 합시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배가 든든해야 2차전을 할 테니.”

“설득은 인내력이고, 인내력은 뱃심에서 나오지요.”

소년은 날이 바짝 선 둘을 보다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에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장소와 이삼이 쪼르륵 소년에게로 달려왔다.

“저 양반들은 내버려 두고, 우린 저녁 끼닛거리나 만들러 가자꾸나. 서방의 주방은 아직 본 적 없지?”

“네!”

“오늘은 어떤 걸 만드실 거에요?”

“크흠, 그럼 저도 실례를 좀…….”

아이들의 낭랑한 대답 뒤로 우물쭈물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소년이 삐딱하게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태감과 신경전을 벌이던 백작이 겸연쩍은 얼굴로 장소의 뒤에 서 있었다.

“뭐, 참관이야 자유다만, 오늘은 좀 실망스러울 텐데?”

우리한텐 새롭고 이국적이다만, 댁은 늘 먹던 걸 만들 거라.

소년이 옆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자 백작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국의 요리에만 통달하신 줄 알았는데, 법국의 요리에도 조예가 있으실 줄은…….”

“아니, 뭐…… 전에 어깨너머로 배운 거라 본업만큼 대단치는 않은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돼지기름이 아니라 버터로 기름칠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그래도 모처럼 법국까지 왔는데, 빵에 버터 바르고 포도주로 목 좀 축여봐야 하지 않겠어?

소년은 히죽 웃고는 휘적휘적 공관의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뒤로 백작이 마치 추종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렇다면 포도주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럼 시작은 발포성 포도주로 부탁하네. 장밋빛 나는 것이 좋겠군. 떫은 맛이 없고 산뜻한 거로. 아니면 시드르도 좋겠지.”

“시작은 가벼운 것이 좋지요. 그럼 전채 요리는.”

“글쎄. 오일에 콩피한 우설을 올린 타르트로 할까. 아까 슬쩍 창고를 둘러보니 우설이 좋은 게 있더구만.”

“오일에, 예?”

소년은 멀뚱멀뚱 자신을 보는 백작에게 구상 중인 전채 요리의 레시피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올리브오일에 담근 우설을 저온의 화덕에서 느긋하게 익혀낸 다음에 타르트에 올려서. 소스는 크림에 산뜻한 녹후추를 넣은 그린 페퍼콘 소스로 하고, 곁들이로는 새콤하게 사과와 양파를 와인 식초로 졸인 콤포트를 곁들이면 되겠군.”

“예? 그러니까 올리브오일로 익힌 우설에, 후추 향이 감도는 고소한 크림소스, 그리고 새콤한 사과 양파 조림이 곁들여지면.”

“아니. 그냥 먹어보게. 말로 백날 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소년은 상상의 나래에 흠뻑 빠져 허우적거리는 백작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씨익 웃고는 주방 문을 열어젖혔다.

* * *

우아한 붉은빛 마호가니 식탁 위로 백조의 날개깃처럼 하얀 식탁보가 깔리고, 천사와 태양이 장식된 순금 촛대가 상 위에 오른다.

은쟁반에 담긴 과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빵과 부드러운 상아색의 버터. 수정으로 만든 술잔.

만찬에 여유와 흥을 더해줄 포도주. 그리고 식탁을 빛내줄 주빈들.

정갈한 예복을 차려입은 제국의 사절단이 차례로 착석하자 상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백작이 목에 걸고 있던 성표를 쥐고는 식전 기도를 올렸다.

식전 기도문화가 익숙하지 않을 이국의 손님들을 위하여, 기도문은 간결하고 무난한 것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의 태양이시여. 법국을 방문해 주신 손님들의 여정에 그늘이 드리우지 않게 하소서.”

지나치게 짧아 완고한 원리주의자가 분노에 빠질 만한 기도문이었으나, 백작의 기도문에 신성 모독의 우려를 표할 수 있을 만큼 태양 정교의 교리에 해박한 것은 오직 백작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태양 정교의 정식 사제이자 마리안 궁정 대학의 신학박사인 백작은 자신의 기도문이 흠잡을 데 없다고 생각했다.

태양의 은총은 햇볕이 드리운 모든 곳에 있으며, 진실된 신앙은 고리타분한 경전의 구절이 아닌 일상의 모든 행위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태양께선 지상의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기도문을 외느라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것 또한 신앙의 한 형태 아니겠는가!

자기합리화에서 비롯된 백작의 생각이 신학적 의문으로 비약하기 전, 상석의 주인이자 사절단의 책임자이며 만찬의 주방장인 숙친왕 진연운이 만찬장에 들어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전채 요리와 함께.

“자, 오늘의 전채 요리입니다.”

금으로 테두리를 두른 흰 백자 접시에 오른 앙증맞은 타르트.

곱게 다진 처빌을 흩뿌리고 녹색 후추알갱이가 보이는 크림소스를 두른 황금빛 타르트 안에는 도톰하게 썬 우설이 담뿍 담겨 있었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도…….”

“담음새를 칭찬해 주는 것도 기쁘지만, 역시 요리사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건 맛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소년의 부드러운 재촉에 백작이 황급히 잔을 들어 올렸다.

잔에 장밋빛 포도주가 가득 차오른다.

가볍고 경쾌한 건배사.

한 모금 들이키면 설익은 사과의 풋풋함과 베리류 특유의 달콤함과 함께 부드러운 탄산이 목젖을 살짝 간질인다.

만찬의 시작을 알리는 기분 좋은 한 모금.

가볍게 목을 축인 백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톱니 모양의 나이프가 타르트를 가른다.

양질의 버터로 반죽한 황금빛 타르트가 바삭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그 속에서 켜켜이 쌓인 우설의 고아한 자태가 드러난다.

덩어리째로 기름에 재워 저온에서 익혀냈기 때문일까. 우설의 단면에는 은은한 분홍빛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가슴을 한없이 설레게 하는. 봄바람에 살그머니 날아온 꽃잎과도 같은 보드라운 색.

그 색만큼이나 식감 또한.

‘보드라워. 아니, 그보다 더…….’

운동량이 많아 탄탄하고 쫀득한 식감으로 유명한 우설이. 이렇게나 부드럽고도, 나긋나긋할 수 있나.

백작은 제 혀 위에 올라있는 것이 진정 우설이 맞는지 의심했다.

얇게 저민 것도 아니었다. 엄지 마디 하나쯤 되는 굵기로, 두껍게 깍뚝썬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우설 특유의 아삭한 듯한 느낌이 송곳니를 살짝 건드리는 듯싶다가 이내 사르르 무너져 내리는 이 느낌은.”

공기가 닿지 않도록 기름에 재운 채 익혔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온에서 장시간 익혔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미식을 향한 순수한 탐구심으로 한없이 날카로워진 정신이 점차 허물어진다.

아, 이 야들야들하고 육즙 풍부한 우설의 감칠맛을 한층 끌어올리는, 햇빛을 듬뿍 받은 신선한 후추 향 감도는 크림소스의 풍성함.

그윽한 유지방의 고소함과 코끝을 톡 쏘는 후추의 알싸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크림소스가 입안을 흥건하게 적시고 나면, 포도주 식초로 졸인 사과 양파 콤포트의 새콤달콤함이 입안을 깨끗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향기로운 산미로 정돈된 혀는 또다시 짙은 감칠맛을 갈구한다.

정교하게 계산된 맛의 함정에 빠져 넋이 나간 백작의 얼굴을 보며 소년이 킬킬거린다.

“이제 전채 요린데 벌써 얼이 빠지면 어떡하나.”

“그…… 다음 코스는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 미리 알 수 있을까요?”

“흐음, 전채 다음으로는 홍합과 토마토 수프, 허브 오일로 익힌 농어와 버터에 볶은 꾀꼬리버섯을 곁들인 치즈 오믈렛. 민물 가재로 속을 채운 라비올리, 브랜디 소스를 곁들인 멧도요, 버터로 튀긴 꿩, 닭가슴살 무스와 말린 자두로 속을 채운 돼지고기 롤, 양 갈비 로스트와 송아지고기 스튜. 후식으로는 사과주로 향을 낸 수플레가 준비되어 있지.”

저녁은 길고, 만찬은 이제 시작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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