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311화 에필로그 3화
노비에서 왕으로.
죽으면 거적때기에 싸여 황야에 버려질 비천한 신분에서, 만인에게 떠받들어지는 존귀한 신분으로.
곱사등이에 절름발이, 칼로 찢어놓은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에 교활한 매부리코, 뱀과도 같은 얇은 입술에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의 추레하고 음험한 얼굴에서 마치 꿀과 우유와 아몬드로 빚어낸 것만 같은,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얼굴로.
지나치게 극적인 변화였다.
동화책의 마지막 장에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기 전에 삽입된 문장이었다면 행복한 마무리라고 웃으며 넘어가겠지만.
백작은 문득, 동화책을 손에서 놓게 된 것이 언제쯤이었는지를 떠올렸다.
성전이 아니라, 학술서적이 아니라,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가죽으로 표지를 대고 모서리에 금속을 댄, 둔기로 써도 좋을 만큼 단단하고, 무겁고, 고리타분하고 어렵기만 한 책이 아니라.
잠 못 드는 밤이면 품에 안고는 부모님에게 읽어달라 칭얼대었던, 읽고 나면 행복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었던, 동화를.
백작은 자신의 키가 지금의 허리춤에나 닿았을 시절을, 정의가 승리할 것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순진한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낭만을 꿈꾸었던 순진함은 이미 가슴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때 정의로운 기사가 되어 공주님과 결혼하는 꿈을 꾸었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남은 것은 정치판의 때가 잔뜩 묻은, 의심병에 찌든 못된 어른뿐이었다.
그렇기에 백작은.
그를 선생님이 아닌, 숙친왕 전하라 불러야 했다.
그렇다면 그 목소리는.
분명 잘못 들은 것일 것이다.
우연히도, 목소리가 비슷했기에.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기에. 흐려진 기억만큼 그리움이 커졌기에.
자신도 모르게 선생님과 숙친왕 전의 목소리를 동일시한 것이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르셨어. 둘만의 이야기를 알고 계셨어. 그렇다면 분명.
분명, 전하께서 나를 시험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거겠지.
선생님께선 후궁의 환관이셨으니, 전하께서 미리 알아 오신 걸 테지. 고귀한 피를 타고난 이들의, 고약한 장난기가 발동하셨을 테지. 분명 그런 걸 거야.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백작은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기대를 폐부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으며,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지인에게 보내는 친근한 인사가 아닌, 존귀한 왕에게 보내는 경애의 인사였다.
백작을 물끄러미 보던 소년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믿기 어려울 테지?”
“선……. 전하.”
“노비의 신분으로 만났던 이가, 다음날에는 왕이라. 그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자네를 설득하려면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난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소년은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리고는, 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직사각형의 칼날.
비에 젖은 까마귀의 날개깃과도 같은 검보라빛이 번뜩인다.
소년은 칼을 한번 던졌다가 받고는,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자네가 한번 시험해 보게. 내가 자네를 놀리고 싶어 연극을 준비한 철부지 왕인지. 아니면.”
자네가 무릎을 꿇고 전속 요리사가 되어달라 애원했던, 그 요리사 오운인지.
소년의 말에 백작은 뺨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헛기침을 했다.
소년은 빙긋 웃고는 마차에 실어놓은 도마를 꺼내 평평한 바위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혀는 솔직한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도마 위로 줄줄이 재료가 오른다.
콩을 발효시킨 짭쪼름한 간장. 찹쌀로 빚은 달착지근한 제국의 술. 동방의 후추라 불리는, 맵고 얼얼하면서도 산뜻한 산초.
나무뿌리처럼 생긴 생강과 굴의 감칠맛을 한껏 농축해 놓은 농후한 호유(蚝油). 법국의 최상품 와인 식초와도 비견되는, 검고, 걸쭉하고, 달큼한 제국의 흑초.
이국적인 조미료가 도마 위를 가득 채운다.
젊은 백작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쉰 후,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만 같은 사람의 얼굴로 말했다.
“어떤 요리를, 해주시겠습니까?”
“먹었던 요리. 자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요리를 만든다면 쉽게 믿음을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지. 안 그런가?
소년의 말에 백작은 열렬하게, 목뼈가 삐거덕거리도록 격렬한 동의를 보내었다.
이왕이면 새로운 요리, 새로우면서도 맛있는 요리를 맛보고 싶은 것이 미식가의 본능 아니겠는가.
소년은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앓는 소리를 내는 백작을 보며 낄낄거리고는 도마 위에 진열된 조미료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래, 이왕이면 새롭고, 맛있고. 그리고 거창한 요리라면 더 좋겠지.”
* * *
소년은 경쾌한 걸음으로 마차로 달려가서는, 마차에 실려 있던 짐 중 가장 위쪽에 있던 것을 내려 어깨에 짊어졌다.
소년의 어깨에 실린 것은 살밥이 두툼한 돼지갈비 한 짝이었다.
“오는 길에 농가에서 돼지를 몇 마리 샀는데, 야금야금 먹으면서 오다 보니 남은 게 갈비뿐이군.”
그래도 고기는 역시 뼈에 붙은 고기가 제일 맛있지 않나.
소년은 껄껄 웃고는 도마 위에 갈비짝을 내려놓았다.
육중한 울림. 도마 위를 꽉 채우는 갈비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불그스름한 살코기와 노르스름한 비곗살의 대비를 찬찬히 관찰하던 소년은 엉거주춤한 자세의 백작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것만 같은, 썩 편해 보이지는 않는 자세였다.
‘자네 왜 그러고 있나?’에 해당하는 시선을 소년이 보내자 백작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크흠. 그것이, 갈비가 무겁지는 않을까 하여…….”
도와드리려 했습니다만.
백작은 금군의 병사들과 수행원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왕이 짐을 짊어지려 한다면 응당 먼저 나섰어야 할 이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얼굴로 딴청을 피우며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나서려는 이가 없는 수행원들 사이에서 먼저 나서기도 뭐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절부절못하는 처지가 된 백작을 보며 소년이 피식거렸다.
“괜찮네. 남의 손 빌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이 친구들도 익숙해졌고.”
“커흠, 주제넘었습니다.”
백작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자, 소년이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갈비는 우선 뼈 채로 한입 크기가 되도록 토막을 치고, 뜨거운 물에 살짝 삶아내 핏물과 잡내를 제거한다.
소년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을 꼼꼼히 걷어내며 갈비를 삶아냈다.
갈비가 삶아지면 따로 철과를 불에 올려 기름을 두르고, 설탕을 갈색으로 태운다. 설탕이 녹아들고, 그을린다.
끓어오르는 기름 속에서 점차 짙은 색으로 변하는 설탕에선 다디단 향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본능을 충동질하는 원초적인 달콤함.
그 강렬한 향기에 백작이 한 걸음 다가섰다. 의심과 긴장감으로 경직되었던 눈동자를 순진한 탐구심과 미식을 향한 열망으로 빛내며.
“설탕을 태우시는, 그렇군요. 캐러멜을 만드시는 거로군요. 물이 아니라 기름을 이용해서.”
“이렇게 하면 고기에 근사한 적갈색과 감칠맛을 더할 수 있지.”
“달콤하겠지요?”
“입에서 살살 녹지.”
설탕과 기름이 끓어오르는, 단내가 풀풀 피어오르는 솥 안으로 희게 익은 갈비가 들어갔다.
기름이 넉넉하게 붙은 살코기. 한입에 쏙 들어갈 고기 토막들.
그것들이 기름에 튀겨진다. 그을린 설탕 옷을 입는다. 무미건조한 회백색이 불그스름한 갈색으로 변한다. 물든다.
그윽하고 짙은, 보는 이의 애간장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색.
고기가 설탕과 기름으로 치장한다. 촉촉했던 살코기와 보드라웠던 비곗살이 바삭해진다. 고깃점이 수축하여 흰 뼈가 드러난다.
소리.
기름이 끓어오르는 소리. 설탕이 탁탁 튀는 소리. 주걱이 고기를 뒤적이는 소리.
소리가 끓어오르고, 흘러넘친다.
백작은 그저 솥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마녀에게 홀려, 제 발로 솥으로 걸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의심할 수 없었다.
굳이 끝을 보지 않더라도, 결과는 자명했다. 목소리를 흉내 내고, 비밀을 캐내더라도, 솜씨만큼은 모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백작은 무의미한 의혹에 매달려 심력을 허비하는 대신, 오직 맛좋은 요리가 상에 오르기를 기대하는 미식가의 자세로 소년을, 그리고 솥을 바라보았다.
솥 안에선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물든 갈비가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었다.
* * *
파와 생강, 마늘. 계피와 통후추. 팔각과 정향. 색이 진한 간장과 약간의 호유(蚝油). 누린내를 잡아주고 감칠맛과 깊은 향을 더해줄 흑초 한 방울.
국물이 졸아든다. 진득해진다.
흥건했던 국물이 졸아들며 고기에는 반드르르한 윤기가 생긴다.
국자로 솥을 뒤적이던 소년이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병에서 짙은 색의 액체가 흘러내린다. 끈적하고 농후한 향기.
부드럽고 순하고, 은근한 단맛 사이로 살포시 쌉싸름한 냄새가 감돈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향기. 향기의 잔향을 쫓던 백작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밤꿀. 밤꿀이로군요.”
밤꿀이 녹아든 갈비에, 마지막으로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이 더해진다.
소년은 흰 깨 한 줌을 갈비 위에 흩뿌리고는 솥째로 상 위에 올렸다. 요리의 이름은.
“홍소배골(糖醋排骨)일세. 어디, 젓가락보다는 포크가 편하겠지?”
백작은 소년이 건넨 은빛 포크를 받아들고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갈비를 찍었다.
가장 양념이 잘 밴 것, 깨가 듬뿍 묻어 있는 것. 한입에 쏙 들어오는 것으로.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갈비 토막이 입술을 넘는다. 입안에 꽉 들어차는 열기와 향기가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다.
하- 후-
검지 두 마디쯤 되는 크기의 갈비 한 토막이 입안을 흠뻑 적셨다. 그 달콤한 기름기와 은근한 짭조름함과, 그윽한 향기로.
백작은 혀 위에 오른 갈비 토막을 조심스럽게 왼쪽 볼로 옮기고는, 다시 오른쪽 볼로 옮겼다.
쪽.
기름진 고깃점에서 뼈가 쏙 빠져나온다.
‘기가 막히게 부드럽군.’
데치고, 튀기고 조려낸 갈비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어금니와 송곳니, 앞니의 협조를 빌릴 필요도 없이 혀만으로도 살코기와 뼈를 분리해낼 수 있을 만큼.
백작은 결이 고운 살코기와 보들보들한 비곗살, 근막의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 느낌을, 이 황홀함을 도대체 뭐에 비유해야 할까.
공직자 이전에 신에게 몸 바친 성직자로서, 최상급의 극찬은 응당 성전의 한 구설을 인용해야겠지만. 그 순간 백작의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성에 관련된 은유적이고 짓궂은 농담이었다.
천박하고 음탕하다 욕을 먹겠지만, 그럼에도 백작은 머릿속에 떠오른 한순간의 느낌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입맞춤보다 달콤하군.
달고, 향기롭고, 기름진 갈빗살은 혀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첫눈처럼 덧없이 녹아내렸다.
그 빈자리에서, 아직 달큼한 살코기의 감동을 잊지 못한 혀가 고독 속에서 전율했다.
이 강렬한 감칠맛을 품어줄, 입안을 가득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푸근하고, 담백한.
“면은 어떠한가.”
백작은 소년이 구멍이 뚫린 국자로 솥에서 무언가를 건지는 것을 보았다. 넓적하고 기다랗고, 달걀이 많이 들어간 듯 샛노란.
그것은 면이었다.
“쌀보다는 밀가루가 익숙할 것 같아 면을 준비했네. 빵도 괜찮겠지만, 홍소배골에는 면이 더 어울려서.”
“면을.”
그 달콤한 양념에 버무려서 먹어보게.
소년은 얼빠진 듯 멍한 얼굴의 백작을 보며 씩 웃고는 홍소배골이 담긴 접시에 면을 쏟아 넣었다.
면은 엄지손톱만 한 넓이였고, 제법 도톰했다.
분명 쫄깃쫄깃하리라. 목 넘김도 좋을 테지.
작은 쫄깃한 면발이 달콤 짭짤한 양념에 흠뻑 젖어서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느낌을 상상했다.
매끄럽고, 묵직하고. 밀가루의 풍미가 가득하리라.
백작은 포크를 들고, 면을 양념에 골고루 버무린 다음 소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이제 믿음이 가나?
고개를 끄덕이려 했던 소년은 백작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백작은 눈을 지그시 감고는 말했다.
“그때,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어찌 잊겠나.”
선생님, 이대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께 모든 영광을 바치고 싶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그리 말했었지. 참, 그런 낯뜨거운 말을.”
“지금이라면 더한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신 당신께, 그런 청을 드릴 수는 없지요. 그러니.
백작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이 제게 와주실 수 없으니.
“제가 선생님께 가겠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제국으로 이민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