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310화 에필로그 2화
엘 마라 법국의 수도 펠리스.
법국 행정의 중심지이자 서방 대륙의 모든 종교인이 생에 한 번쯤 은 방문하기를 소망하는 성지.
왕과 교황. 속세의 지배자와 신앙의 지배자. 두 명의 지배자가 거하는 도시.
펠리스로 향하는 대로에 두 명의 사내가 멈춰서 있었다.
둘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한 명은 밝은 갈색의 곱슬머리에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와 굵은 목을 가진 젊은 기사였고, 다른 한 명은…….
“백작님.”
영광된 엘 마라 법국의 외교관이자 태양 정교회의 사제이며 아르농의 백작인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은 젊은 기사의 채근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기사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백작의 시선이 나뭇가지에 앉아 가슴 깃을 정돈하는 개똥지빠귀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젊은 기사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여 백작을 불렀다.
“백작님. 이만 가셔야 합니다. 사절단이 국경선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이니,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기욤 경.”
샤를마뉴의 기사, 기욤 오레놀은 백작의 부름에 작게 신음하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백작은 젊은 기사를 보지도, 그가 가야 할 대로를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지저귀는 개똥지빠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중대한 임무이지. 이런 일을 맡는다는 것은 외교관에게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것도 제국의, 다른 외교관도 아니고 존귀한 용의 피를 이어받은 제국의 황족이신 숙친왕 전하를 영접하는 일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백작의 말이 길게 늘어질 기미를 보이자 젊은 기사가 헛기침으로 말허리를 끊고는 말했다.
무례임을 알면서도 모시는 이를 위해 충언을 아끼지 않는, 실로 참된 기사다운 자세였다.
“크흠, 그러니 더욱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여나 저희가 늦장을 부려, 전하께서 통역할 수행원도 없이 펠리스를 방문하신다면, 이는 국가적인 결례가 아닙니까.”
존귀한 신분의, 왕족이나 황족이 타국을 방문할 때는 양국의 언어에 능통한 외교관이 공식 의전 행사에 앞서 통역사로 수행하는 것이 외교적 의례였다.
그런 영광된 의무를 맡는 것은 응당…….
젊은 백작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랫입술을 질근 거리다가, 마치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듯이 떠듬거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런 영광된 의무는, 좀 더 경험 많고 노련한 분이 맡으시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과연 내가 적임자였을까.”
물론, 백작님이야말로 적임자시지요.
그럼 마리안 궁정 대학의 신학 박사이며 법학, 외교학의 학사이자 법국의 외교관이며 제국어 능통자이자 사절단의 단장이셨던 백작님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기욤은 그 화려한 이력이 그의 자신감을 북돋워 주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백작님. 어찌하시겠습니까?
젊은 기사의 물음에, 가지를 박차고 포르르 하늘로 날아오르는 개똥지빠귀를 보던 백작이 답하였다.
“기욤 경. 나와 함께 도망치지 않겠는가.”
어쩐지, 기묘하게도, 대단히 낭만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도저히 그럴 때가 아니었지만, 기욤은 우선 백작의 제안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라도 좋겠지. 경과 함께라면.”
기욤은 그 말을 듣고 싶었을 법국의 무수한 처녀들을 떠올렸고,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오싹한 한기에 몸을 떨었다.
젊은 백작은 기욤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의아했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사금을 녹여 엮어낸 것만 같은 화사한 금발을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그래.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이면 좋겠지. 복잡하고 소란스럽고 답답한 도시가 아니라, 목가적인 평온함에 취할 수 있는 곳. 그래, 펠리오뉴는 어떨까.”
“펠리오뉴라면, 법국 남쪽의 작은 어촌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드리아해를 끼고 있는.”
“그곳에 내 조부께서 비밀스럽게 만들어두신 산장이 있네. 잠깐의 도피 도중 쉬어가기에도, 세상을 잊고 은거하기에도 좋은 곳이지. 아름다운 곳이라네. 작지만 아담한 산장이야. 방이 여섯 개에 고서적을 모아놓은 서재와 포도주 창고가 있고, 근사한 벽난로와 넓은 주방이 있지. 마을 뒤편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정원을 거닐다 보면 아드리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네.”
기욤은 어쩐지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만 싶어졌다.
아드리아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원이라. 해먹에 누워 짭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드리아해를 바라본다면.
거기에 미식가로 유명한 백작이라면 분명 창고에 훌륭한 포도주를 가득 채워놨을 것이다.
이대로 백작과 함께 도피행에 올라, 포도주 창고를 축내며 주정뱅이로 여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펠리오뉴는 작은 어촌이지만, 주민들은 외지인에게 배타적이지 않고, 무척 배려심 깊지. 물론, 자네처럼 멋진 젊은이와 이웃이 될 기회를 포기할 만큼 배타적인 이들도 많지는 않겠지만.”
“커흠, 백작님. 하지만.”
“생활은 걱정할 것 없네. 소작을 줄 밀밭도 조금 있고, 최상품의 기름을 짜낼 수 있는 올리브 나무 농원과 양질의 포도주를 담글 수 있는 포도밭도 있으니. 매년 서른 통의 포도주와 스무 통의 기름을 얻을 수 있지. 경은 혹시 어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그곳에는 내 소유의 배가 세척이 있다네.”
“어부라…….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는 뱃사람을 동경한 적도 있었지요.”
“훌륭하군. 자네에게 내 배를 한 척 맡기고 싶네. 선원은 자네가 원하는 이들로 채워도 좋아. 펠리오뉴의 인근 바다는 좁지만 알차지. 온갖 해산물을 잡을 수 있어.”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앞바다에서만 빨간퉁돔에 노랑촉수, 농어 등을 잡을 수 있고, 조금 멀리 나가면 대구와 가자미, 넙치, 서대, 새우와 가재, 한치나 문어도 잘 잡힌다네.
배를 끌고 나가지 않아도 광주리 하나만 있으면 작은 게와 온갖 조개를 잡을 수 있지.
“그리고 어쩌면, 그 마을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운명적인 사랑이라.”
세상에 이보다 더 혈기왕성한 기사를 설레게 하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기욤의 얼굴에 뚜렷한 흥미가 드러난 것을 확인한 백작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진중한 어조로 젊은 기사를 설득했다.
“생각해 보게. 발랄하고 생활력 강한 어촌의 아가씨와 소박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랑하는 자식의 손을 잡고 노을 지는 해변을 산책하다가, 밤이 되면 포도주 한잔을 기울이는 여유로운 삶을. 각박한 기사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꿔보는 것은 어떤가.”
만약 결혼한다면 정식 사제 서품을 받은 내가 주례를 서겠네.
그것이 결정타였다. 젊은 기사는 그 이상 백작의 제안을 거절할 만한 명분을 자신에게서 찾아낼 수가 없었다.
기욤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젊은 백작의 얼굴이 안도감으로 화사하게 빛났다.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군요. 백작께서 가시는 길,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일세. 경.”
“단, 백작께서 임무를 끝마치신 후에 말이지요.”
그 말에 백작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어렸다. 백작은 비 맞은 새끼고양이와 같은 처량한 표정으로, 흐느낌을 참듯 천천히 말했다.
“경, 경이라면 분명 이해해 줄 거라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만약 책임을 나 몰라라 하시고 도망치신다면 백작께서 말씀하신 낭만적인 도피행과 목가적인 정착 생활 따윈 꿈속의 일이 될 겁니다. 제국의 사절, 그것도 존귀한 신분의 전하께 무례를 저지른 셈이니, 전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법국에선 백작께 사냥개를 붙일 겁니다. 분명 지옥 같은 도피행이 되겠지요.”
얼굴에는 진흙을 바르고, 나무껍질과 벌레 따위로 끼니를 때우며, 그마저도 먹지 못하고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로 허기를 채우는.
어쩌다 잡은 시궁쥐가 성찬이 되는 나날. 밑창이 뚫린 신발, 퉁퉁 부르튼 발을 질질 끌며 정처 없이 떠돌다가 잡히는 날에는.
“잡히는 날에는?”
“뭐, 처형은 맨 마지막으로 미뤄지겠지요. 우선은 법국 고문관들의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으시고, 가장 추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우정을 나누시다가, 그 끝에는 썩은 달걀을 맞으며 질질 끌려가서는 교수대에서…….”
“그만. 알겠네, 알겠어. 전하를 영접하러 가겠네.”
일이 끝나면 언제든, 백작께서 계획 중이신 낭만적인 도피행에 따르겠습니다.
충직한 기사의 맹세에 젊은 백작은 한껏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기욤은 작게 피식거리고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백작의 의욕을 고취시킬 만한 마법과도 같은 한마디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이번 일을 잘 끝마치신다면, 다음번 사절단의 단장은 백작님께서 맡으시는 거로 확정되겠지요.”
“사절단. 그래, 그랬었지.”
“그 선생님이라는 분을, 다시 뵈어야 하지 않습니까.”
“맞아, 선생님. 그분을 다시 뵈러 가야지.”
그 달콤했던 기억. 혀끝을 스치는 아스라한 맛에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백작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것을 본 젊은 기사는 오랜 기다림에 지친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 만져주고는 고삐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말은 작게 투레질하고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젊은 기사는 백작을 이끌 듯 앞서 걸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자, 가시지요. 백작님. 아드리아해건 제국이건,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 * *
젊은 백작.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에서 내렸다.
조금 전 간신히 싹 틔웠던 의욕과 열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예병 중의 정예병. 제국의 금군이 무장을 갖춘 채 백작을 맞이했다.
백작은 조금 주눅 든 표정으로 도열한 병사들을 둘러보고는 힘겹게 발걸음을 떼었다.
어깨를 펴고, 시선을 내리깔지 말아야 하며, 보폭은 너무 크지 않게.
외교관으로서 보여야 할 지나치게 겸손하지도, 과하게 오만하지도 않은 정중한 걸음걸이를 강박적으로 되새기며 백작은 병사들의 사이로 걸어갔다.
그 길의 끝에, 숙친왕이 있었다.
백작은 열 살은 넘었을까 싶은 숙친왕의 왜소한 체격에 한 번 놀랐고, 그가 화려한 옥좌에 앉아서가 아닌 산책을 나온 듯 뒷짐을 지고 선 채로 그를 맞이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그가 입은 옷이 그 신분에 어울리는 비단옷이 아닌 제국의 백성들이 흔히 입는 검박한 차림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나를 시험하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으신 걸까.’
그 검소한 옷차림 때문에 한순간 오해할 뻔했지만, 눈앞의 어린아이가 그가 맞이해야 하는 숙친왕인 것은 확실했다.
백작은 자신을 긴장케 했던 금군 병사들이 그의 손짓 한 번에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다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숙친왕 진연운 전하 천세. 법국의 외교관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이라 합니다. 오늘 전하를 영접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쪽은 법국의 기사 기욤 오레놀 입니다.”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
숙친왕은 백작의 이름을 입에 담고는 가만히 한 걸음 내디뎠다.
그 목소리가 독특했다. 어린 사내아이의 낭랑한 미성과 닳고 닳은 노인의 쉰 소리를 반씩 섞어놓으면 이런 목소리가 될까.
그 기이한 목소리가 백작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째선지 백작의 귓가에 오래도록 남았다.
어째서일까.
백작은 심장이 거세게 맥동함을 느꼈다.
걱정과 불안, 긴장, 두려움 따위가 아닌, 설렘과 흥분에서 기인한 떨림.
낯설지 않은 두근거림이었다. 익숙한 것이었다.
백작은 그 두근거림을, 빗장뼈 안쪽을 가득 채우는 그 뻐근한 설렘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때를 떠올렸다.
분명, 제국에서였다.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기억이 거슬러 올라갈수록, 심장의 두근거림은 점차 커져만 갔다.
백작은 온몸을 울리는 그 거센 울림 때문에 고막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가슴속이 아닌 혀에 남아 있었다.
백작이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군침을 삼킨 순간, 그에게 기이한 흥분을 안긴 목소리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샤를. 그래. 백작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했었지. 샤를.”
자네가 나를 찾아오기로 했었는데, 어떻게 내가 먼저 자네를 찾게 되었군.
숙친왕은 나지막하게 웃고는 백작의 이름을 되뇌었다.
샤를.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
아직 고개를 들라는 말은 없었지만, 젊은 백작은 그 이상 벅차오른 흥분을 참을 수 없었다.
“선생……님?”
진정, 당신이십니까? 하지만, 당신께선 분명.
경악과 기쁨의 감정이 뒤섞여 얼룩진 백작의 얼굴을 굽어보며,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