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306화 외전 92화
밝게 빛나던 별빛이 어느새 묽어져서는 방울져 뚝뚝 흐르고 있었다.
주방의 작은 환기창을 통해 소년은 밤하늘의 동녘 끝자락이 파르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횃대에 앉아 잠들어 있던 수탉이 머지않아 눈 비비며 일어날 시간.
새벽이었다.
아침을 준비할 시간. 소년은 아궁이 안쪽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불씨를 깨웠다.
살아난 불씨가 아궁이 가에서 한 뼘쯤 되는 곳까지 열기를 보내었다.
소년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가만히 열기를 쬐었다.
그때 소년의 좁은 어깨너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잠겨 있는 목소리. 태감의 것이었다.
“오늘 아침은 무엇이냐.”
소년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어제 녹두 불려둔 것이 좀 남아, 죽이나 끓이려 합니다.”
“녹두죽이라.”
“여름에 먹기 좋지요. 녹두는 성질이 차고 몸의 열을 가라앉혀 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지요.”
소년은 솥에 거피한 녹두를 넣고는 녹두가 자작하게 잠기도록 물을 부어 센 불에 끓여냈다.
녹두가 거의 익으면 불려둔 찹쌀을 넣고, 진하게 끓인 닭 육수를 부어 센 불에 끓인다.
소년은 주걱으로 솥 바닥을 저어가며 말했다.
“다른 죽처럼, 녹두죽도 육수가 많아야 먹기 좋습니다. 찹쌀을 함께 넣는 이유는 녹두의 찬 성질을 중화하기 위함이지요.”
소년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태감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솥에서는 녹두죽이 뭉근히 익어가고 있었다.
맑은 육수가 탁하고 끈끈하게 변하고, 쌀알이 부드럽게 풀어질 때쯤 소년은 부지깽이로 아궁이에서 아직 타고 있는 장작을 긁어내었다.
죽이 식지 않도록 약간의 잉걸불만을 남긴 소년은 솥에 비스듬하게 뚜껑을 걸쳐놓고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애들이 일어나면, 화로에 장작을 담아두었으니 그걸로 죽을 데우면 된다고 말 좀 전해주십시오.”
“그래, 그러마.”
소년은 무미건조하게 답하는 태감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찬장에서 그릇을 꺼냈다.
죽을 담을 우묵한 그릇.
테두리를 푸른색으로 칠하고 닭을 치는 아이들과 계수나무를 그려 넣은 것.
네 개. 그릇은 총 네 개였다.
태감을 위한 것. 단혜림을 위한 것. 아이들을 위한 것.
태감은 그중 소년의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신음했다.
아침도 먹지 않고. 빈속으로 갈 것이냐.
태감이 묻기 전에 소년이 먼저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태감. 아침 잘 챙겨 드십시오.”
다녀오거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소로 그를 배웅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태감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차려놓은 상을 보고만 있는 태감을 향해 소년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다른 인사말도, 흔하디흔한 악수 한 번 나누지 않고 태감을 떠났다.
문일을 만날 시간이었다.
* * *
노인이 숙친왕부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에 허리가 굽어 더욱 작게만 보이는, 검은색은 찾아볼 수도 없고 빛바랜 회색도 얼마 남지 않은, 힘없이 축 늘어진 흰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노인.
나무 그늘 아래서 게으른 하품을 하다가, 허리가 쿡쿡 쑤시면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는.
그런 노인.
소년은 가슴께를 한번 쓸어 만지고는 노인에게 다가섰다.
겉으로 보면 둘은 꼭 마실을 나온 손주와 할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사이에 오가는 것들은 그렇게 따스하고 다정하지 않았다.
“문일.”
발그레한 고운 입술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목소리는 피로에 찌든 듯 잔뜩 쉬어 있었다.
그 기묘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정원 한편에 피어 있던 해란초를 굽어보던 노인이 빙긋 미소 지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노인은 허리를 툭툭치고는 소년을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치렁치렁하고 거추장스러운 용포가 아닌, 움직이기 쉬운 간편한 차림새.
노인의 시선은 소년의 가슴께에 한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소년의 얼굴로 향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노인은. 문일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앞장서서 걸었다.
소년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소년은. 왕부의 주인, 숙친왕은 자신도 몰랐던 왕부의 비밀통로를 보게 되었다.
허리 굽은 소나무가 드리운 그림자를 밟고, 메꽃과 물꽈리아재비와 꽃고비를 지나쳐, 가시를 세운 장미 덩굴 아래를 지나서.
소년은 지하로 향하는 비밀통로를 보았다.
이파리와 가지로 얽혀 만들어진 벽과 뿌리로 이루어진 계단, 은방울꽃을 닮은 꽃이 은은하게 빛나는.
소년은 입구에 발을 걸쳐놓고는 문일에게 질문했다.
“이런 비밀통로가 있다는 보고는 받은 적이 없는데.”
“최근에 만들어진 통로인지라, 아직 전하께 보고되지 않은 듯합니다.”
“최근에?”
“황실의 모든 비밀통로는, 노공께서 만드시지요.”
“그래, 노공께서.”
소년은 반룡궁의 지하에 잠들어 있을 뱀을 떠올리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밀통로가 만들어진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통로의 끝은 어디인가. 어디로 통하는가.
소년이 묻기 전에 문일이 먼저 답을 내놓았다.
“이 비밀통로는, 반룡궁의 지하로 통합니다.”
“선황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 아니었나.”
“예, 선황께 갑니다.”
문일은 그 이상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선황을 보기 위해 반룡궁의 지하로 가야만 하는 이유. 그 이유를 물으려 했던 소년은 앞쪽의 흐릿한 어둠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열었던 입을 멈추었다.
파도가 물거품으로 부서지는 소리. 바람결이 수면을 간질이는 소리.
물소리였다.
소년은 황제의 시험을 통과했던 날, 반룡궁의 지하에서 보았던 수로를 떠올리고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걸어갈 필요는 없겠군.”
“노공께서 지난번엔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 이번에는 편히 올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다 하시더군요.”
“이런. 불평했던 걸 들으셨단 말이지.”
태감과 실컷 늘어놓았던 불평불만을, 전부 들으셨단 말이지.
소년은 쓰게 웃고는 외로운 지하 나루터에 대어둔 한 척의 배에 몸을 실었다.
소년이 배 위에 오르자 문일이 노를 잡았다.
그렇게 둘을 실은 배는 조용히 수로를 따라 흘러갔다.
은방울꽃처럼 고개 숙인 꽃들이 밤하늘의 별을 대신하는 어둠 속에서.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 * *
이 길 끝에. 그가 있을까.
사방은 어두웠고, 귓가에 스치는 것은 어딘가의 틈으로 스며들어 와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고여 버린 바람이 우는 소리와 흐르는 물이 뱃전을 어루만지는 희미한 소리뿐이었다.
시간이 제 걷던 보폭대로 걷고 있는지, 혹은 멈추어 서거나 달음박질치는 것은 아닌지. 제대로 가늠할 수 없어 그저 흐를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이 모호한 배 위에서. 소년은 태감에게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나눠야 할 것은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용서겠지요. 그렇지만.
소년은 그 단어에 배어 있는 따스한 느낌에 진저리치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용서할 수 있을까.
지난날, 밤하늘을 물들이는 불꽃 아래서 늘어놓았던 낯간지러운 말들은 그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태감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쥐어 짜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용서해야만 했다.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는 대상이 점점 가까워지고만 있었다.
용서할 수 있을까.
웅얼거리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통증이 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을 폐부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고, 소년을 눈뜨게 했다.
소년은 자신이 여전히 수로를 따라 흐르는 배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문일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또한.
말소리가 작았고, 상념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손바닥으로 귓가를 꾹꾹 누르고는 문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문일은 오래전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금룡기가 피비린내 머금은 바람에 나부끼고, 편자를 박은 말이 황야를 내달리고, 제국인이 서로를 향해 창칼을 겨누던 시절의. 선황의 이야기.
그리고.
주화 공주의 이야기.
소스라치게 놀라 문일을 돌아본 소년이 이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네게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선황께 여쭙지도 않으시겠지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단조로운 어조로 말하는 문일을 보며 소년은 가슴께를 매만졌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을 재확인한 후, 소년은 입꼬리를 가늘게 찢으며 말했다.
“알고 있었군.”
“아직, 숨기시는 기술이 서투시더군요.”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않을 건가.”
“원치 않으실 겁니다.”
선황께서도.
문일은 입가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웃고는 오랜 추억 이야기를 하듯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주화 공주의 이야기였다.
“주화 공주께서는, 본래 황좌에 오르실 분이셨습니다.”
“황제가.”
소년은 황제의 얼굴을 그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지금의 황제보다 자질이 뛰어났다는 말인가?
문일은 소년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분이 더 뛰어나셨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문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호흡에서 소년은 문일의 기억이 해묵은 시간을 거스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래전 일이리라. 어쩌면 그의 머리카락이 아직 새카맣던 시절의 일일지도 모른다.
목덜미가 주름 없이 팽팽하고, 눈두덩이에 검버섯이 없고, 굽은 허리가 꼿꼿하던 시절.
그가 동창 제독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
길게 들이마신 숨을 내쉰 후, 문일이 입술을 열었다.
“선황께서 즉위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한두 혈족이 봉기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기틀을 만들 때부터 함께해 온 혈족 대부분이 자신들의 깃발을 내건, 거대한 전쟁이었지요.”
대화와 타협 따위론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전쟁의 불꽃을 끌 수 없었기에, 선황은 금룡기를 내걸고 전장에 나서야만 했다.
같은 탁자에 앉아 함께 나아갈 미래를 약속하며 웃을 수 없었기에, 창과 칼로, 꿇어 앉혀놓고 복종을 받아내야만 했다.
복종하지 않겠다 천명한 이들은. 두 번 다시 제국의 이름 아래서, 용의 통치를 받지 않겠노라 선언한 이들은.
소년은 수로의 습기 찬 바람결에서 쇠 비린내와 같은 섬뜩한 냄새를 맡았다.
문일은 소년이 코끝을 매만지는 것을 보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모두 죽였습니다. 선황께서 명령하셨고, 제가 집행했지요.”
소년은 담백한 어조로 수많은 이들의 목을 쳤다 말하는 문일을 돌아볼 수가 없어, 그저 앞을 보았다.
문일의 목소리는 노가 수면을 휘젓는 소리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많은 목이 떨어졌고, 많은 피가 흘렀지만, 그럼에도 내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되려 장기화할 조짐을 보였지요. 선황께서도 자신의 대에 내전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장담하실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렇기에.”
그렇기에 선황께서는, 두 명의 황제를 준비하셨습니다. 내전을 끝내지 못했을 때를 위한 황제. 금룡기를 이어받을 황제와.
“내전이 끝났을 때, 상처 입은 백성들을 보듬어 안을 황제. 주화 공주께서는.”
“평화로운 시대를 위해 준비된 군주셨단 말이군.”
하지만 결국, 지금 황좌에 오른 것은 진비운이었다. 주화 공주 진비령이 아닌.
선황이 내전을 끝내고, 간신히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음에도.
문일은 마치 오래전에 감정을 토해낼 기력마저 말라붙은 듯한, 슬픔도 회한도 스러져 그 자국만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날 조짐이 보였을 때, 그분께선 저희를 떠나셨지요. 제국엔 평화가 찾아왔지만, 황좌가 비게 되었으니.”
“생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루려 했던 대업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셈이군.”
소년은 구역질 난다는 표정을 짓지도, 그 분노가 자신에게 표출되었다는 사실에 역정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노인의 넋두리를 듣듯이 문일의 말을 들을 뿐.
소년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문일은 그 흠 많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 속에서 그 어떤 감정의 조각도 찾지 못했다.
문일은 말끝을 흐리다가 한숨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째서, 그분께서 떠나셨는지. 저희는 모릅니다. 여쭐 수도 없지요. 사랑 때문이셨을지도, 황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셨을 수도. 혹은.”
황제가 되지 못한, 오라비를 위해서일 지도.
소년은 문일이 입에 담았던 말을 추측했지만, 대신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배의 나룻배의 이물이 나루터에 닿아 있었다.
소년은 문일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가볍게 나루터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는 문일을 향해 말했다.
“선황은. 어디 있지.”
이해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 시절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
선황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 비통함도 분노도.
차가운 거절의 뜻을 보이는 소년을 물끄러미 보던 문일이 앞장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
노공께서, 길을 알려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