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305화 외전 91화
사람이 쏘아 올린 불꽃이 한순간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고는 스러졌다.
남은 것은 망막에 남은 순간의 번뜩임과 코끝을 간질이는 화약 냄새뿐이었다.
그 매캐한 냄새에 질린 조각달은 창백한 얼굴로 밤하늘 끝자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쓸쓸히 물러선 달이 싸라기별의 품에 안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소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느새 식사를 끝마친 태감이 소년의 옆자리에 앉아 소년이 보던 밤하늘을 이어보고 있었다.
소년은 히죽 웃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서두는 제가 열었으니, 이번엔 태감께서 하실 차롑니다.
그 집요한 재촉에 태감이 난처한 얼굴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동정호에서. 그래, 그랬었지.”
“예. 그랬었지요.”
“진작에 풀었어야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보니…… 이제야 풀게 되었구나.”
문일을 보겠다고.
태감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틀림없이 소년이었다. 김승조였다.
그가 후궁에서 거두었고, 고락을 함께하며 만난을 넘어온. 부하이며, 전우이며, 친구. 노회한 요리사 김승조였다.
하지만, 그는 숙친왕 진연운이기도 했다. 존귀한 용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이며, 황제의 조카이며. 누님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그때, 소년이 툭 던지듯 말했다.
“삼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애써 다잡은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태감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태감이 바닥을 구르며 웃다가 지쳐 풀썩 쓰러지기를 기다린 후,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끝까지 묻어둘 생각이었습니다. 어차피, 태감님은 태감님이시고.”
“너는. 그래, 김승조지. 진연운이 아니라.”
“그거면 되었지요. 저희는.”
삼촌과 조카가 아니라. 같은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라. 그저 사례 태감과 그의 요리사로 남기를. 태감이 원했고, 소년 또한 원했다.
직감적으로, 태감은 앞으론 그에게 두 번 다시 삼촌이란 말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역시, 조카 진연운이 아닌 요리사 김승조가 더 편했으니까.
그들은 그것으로 좋았다. 하지만.
“폐하께서, 제게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소년은 입술을 달싹이는 태감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수염 한 오라기 나지 않은 고운 턱과 백옥 같은 이마. 그리고 가지런한 이와 한없이 잠겨 들것만 같은 깊은 눈에서. 소년은 황제를 보았다.
누이의 마지막을 알고 싶다 부탁하던 황제를. 소년은 보았다.
대제국을 지배하는 철혈의 지배자가 아니라, 누이의 죽음을 떨쳐내지 못한, 그 젊은 날의 상처에 아직도 끙끙 앓고만 있는. 어느 청년을 보았다.
“미련이 남아 있으면,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누님을. 그래, 그렇구나.”
태감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소년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해묵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들을 보고는 시선을 하늘을 향해 옮겼다. 그러고는 그가 아직 빛바래지 않은 추억 속에서 꿈꿀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별빛을 머금은 밤바람의 속살거림이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태감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알고자 하는 것이냐.”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뿌리이니. 그래도, 한번은.
살면서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더라도, 진연운이 아닌 김승조로 살아가더라도. 한번은.
주화 공주에 대하여. 어머니에 대하여.
“알고 넘어가야지요.”
태감은 먼 곳에 두었던 시선을 끌어당겨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바위나 나무 따위의, 유수와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사건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정물과도 같은 건조함.
감정이 퇴적되어 굳어진 얼굴을 보던 태감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알아야지. 누님에 대한 것을…….”
“하지만.”
태감께 여쭙지는 않겠습니다.
소년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땀과 흙먼지에 더러워진 옷자락을 툭툭 털며 말했다.
“그리고, 폐하께도.”
“그렇다면, 누구에게 물을 것이냐. 누님에 대한 것을. 누구에게.”
“한 분, 더 계시지요.”
어느 누가 주화 공주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까. 들려줄 수 있을까.
그녀가 웃고 거닐고 숨 쉬었던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시간의 모래 속에 묻어 가물거리는 과거의 일로만 기억할 뿐, 저물어 버린 꽃으로만 기억할 뿐.
저물지 않은, 열흘을 붉을 것만 같았던 그녀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은 오직.
황제와 태감과 문일. 그리고.
“선황께. 여쭐 생각이냐.”
소년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멀거니 어딘가를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태감은 비명을 지르듯, 폐부를 쥐어 짜낸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정 선황께, 아버지께 여쭐 것이냐.”
아버지.
그 말을 내뱉은 태감은 그 말의 낯선 어감에 진저리쳤다.
아버지. 아버지.
도대체 얼마 만에 담아보는 말인가.
그 낯선 말에 어깨를 떨던 태감은 아랫입술을 짓씹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쭙고. 어찌할 것이냐.”
“태감님.”
“그분을 용서할 수 있느냐. 십 년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느냐. 후궁의 밑바닥을 기었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하루를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차 헐떡였던 그 시절을. 잊을 수 있느냐. 그분을 마주하고…….”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태감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년이 태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세상살이 거친 풍파에 닳고 닳은, 흠집 많은 유리알 같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어찌 잊겠습니까.”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있었다. 땔감으로 때울 것이 없어, 거적을 몸에 두르고 웅크린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겨울이 있었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있었다. 눈 위로 파리가 꼬이고 모기와 각다귀가 기승을 부리던. 그런 여름이 있었다.
무성히 자라난 잡초를 베느라 손에 풀독이 올라 고생했던 봄이 있었고, 모두가 풍족할 때 홀로 굶주려야 했던 가을이 있었다.
잊을 수 있을까.
소년은 스스로에게 물었고, 웃었다.
다만.
“잊으려고 노력은 해봐야지요. 용서하려고 애는 써봐야지요. 이 차갑고 혹독한 세상이 그나마 살 만한 이유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 아닙니까. 증오의 칼에 대한 보답으로, 용서와 사랑을 베풀기 때문 아닙니까.”
소년은 말끝을 잠시 우물거리고는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
자신도 받아드릴 수 없는 이야기로 어찌 남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나눠야 할 것은 분명 사랑과 용서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소년은 입꼬리를 매만지고는 태감에게 손짓했다.
태감은 젖은 눈으로 그를 보고만 있었다.
“태감, 빙수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빙수.”
“예. 슬슬 비 분들 식사도 끝나신 것 같으니, 후식을 올려야겠습니다. 얼음을 넉넉하게 가져왔으니, 태감께서도 한 그릇 드시지요.”
소년은 제 할 말만을 대충 늘어놓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두커니 선 채 멀어지는 왜소한 등을 응시하던 태감이 힘겹게 그의 뒤를 쫓았다.
그때, 소년이 멈춰 서서는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앞을 본 채로. 뒤돌아보지 않고.
“남도 아니고, 혈육 아닙니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 * *
태감과 이야기를 나눈 후, 돌아온 가림막 안쪽의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가림막 안쪽.
새끼 돼지 통구이와 양 넓적다리 구이를 비롯한 온갖 기름진 요리들.
매실주에 복숭아로 담근 도화주, 여름꽃에서 딴 꿀로 담근 하밀주(夏蜜酒), 산딸기와 산포도로 담근 산하주(山夏酒).
온갖 달고 향기로운 미주가 동이 난 황폐한 식탁 위에 고귀한 신분의 여인들이 늘어져 있었다.
소년은 불콰하게 달아오른 비들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내일 아침은 고생 좀 하시겠군.”
그때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고 부여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초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눈을 억지로 소년에게 놓은 부여비가 뽀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교활하시군요.”
“허허, 제 나름 성의를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씀을……. 혹시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사과드리지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년을 본 부여비는 밉살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는 식탁 위에 동난 술 동이를 가리켰다.
“일부러, 저런 술만 가져다 놓은 거지요?”
“크흠,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저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마시기 쉬운 달콤한 술만 잔뜩 준비해 놓고…… 으으…….”
“전 그저 비 분들의 취향을 고려하여 준비했을 뿐입니다만.”
“마신 것은 어디까지나 저희 책임이다?”
부아가 치민다는 듯 신음하는 부여비에게 선량하고 해맑은 웃음을 보여준 후, 소년은 다섯 개의 우묵한 유리그릇과 큰 얼음덩어리를 가져와 상에 올렸다.
육중한 진동이 상을 울리자 상에 널브러져 있던 비들이 하나둘 비칠비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 이제 해장, 아니, 후식을 드실 차례입니다. 일어나시지요.”
자고로 해장하면 빙수. 그리고 아이스크림 아니겠는가.
빙수나 아이스크림은 간이 알코올을 분해할 때 필요한 수분과 당분을 다량 보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술과 기름진 안주에 찌든 혀를 서늘한 냉기로 달래주는 효과까지 있으니.
소년의 설명에 부여비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이슬이 맺힌 얼음을 쏘아보았다.
“호오. 그렇다면 빙수를 후식으로 준비한 것은, 역시 처음부터 저희를 진탕 마시게 해 숙취에 시달리게 하려는…….”
“자, 어떤 분부터 만들어 드릴까요? 부여비님?”
“휴우. 하긴, 숙취에 시달려 보는 것도 후궁에선 경험하지 못할 새로운 체험이기는 하지요.”
이번엔 그냥 넘어가 드릴게요.
부여비는 싱긋 웃고는 소년에게 유리그릇을 받아들었다.
소년은 그릇에 찹쌀떡 한 알을 놓고는 그 위로 두툼한 얼음 덩어리를 들이민 후, 얼음을 칼로 얇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날카로운 칼날이 대패처럼 움직일 때마다 그릇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인다.
고운 눈가루가 봉긋하게 쌓이자 소년은 그 위로 달게 졸인 단팥과 녹두를 올린 다음, 달콤한 연유를 가득 뿌려냈다.
촉촉한 단팥과 녹두가 담뿍 올라간 빙수.
소년은 작은 은 숟가락을 부여비에게 건네고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기초 토대는 마련하였으니. 본격적으로 빙수를 만들어 볼까요?”
“네? 그냥 이대로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데.”
“물론 이대로 드셔도 좋지요. 하지만.”
빙수는 역시, 온갖 과일로 화려하게 꾸며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소년은 킬킬거리고는 상 위로 온갖 부재료를 꺼내 올렸다.
초여름에 절여둔 딸기와 자두, 복숭아와 같은 과일 설탕 조림. 한천으로 만든 젤리, 술에 절인 건과일과 바삭바삭한 과자류. 그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이게 빠지면 또 섭섭하지요.”
“어머나, 이건 다관 막심의 겨울 한정 상품 아닌가요?”
“커흠. 제가 표가 상단주와 막역한 사이라, 부탁을 좀 했지요.”
온갖 재료가 올라간 빙수 위로 마지막 화룡점정.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한 스푼 올린 후, 소년은 완성된 빙수를 부여비의 앞에 내려놓았다.
자, 드셔보시지요.
“곱기도 해라. 먹기 너무 아까운걸요?”
말로는 먹기 아깝다고 하면서도 부여비의 숟가락은 살그머니 팥으로 덮인 설산의 산마루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연유가 흐르는 빙수의 정상에 놓인 둥근 바닐라 아이스크림.
마치 산의 꼭대기에 걸린 보름달과도 같은 우아한 광경이 포악한 사람의 손길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얼음알갱이와 팥,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술 크게 뜬 부여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물기가 마른 입술 사이로, 차가운 것이 흘러들어 온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오장과 육부를 식히는 서늘함.
들이마실 때는 후덥지근했던 숨이 내쉴 때는 청량한 냉기가 감돈다.
등허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오싹한 한기에 몸을 떨고 나면, 입안에는 살금살금 보드라운 단맛이 살포시 스며든다.
달게 조린 팥의 순하디순한 단맛과 연유의 입천장에 들러붙는 듯한 짙은 단맛. 그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매끄럽게 감겨드는 향기로운 단맛.
세 가지 단맛이 절묘하게 얽혀 목구멍 안쪽으로 사르르 녹아든다.
“어떻게, 입에 맞으십니까?”
입에 맞냐고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냐는 듯이, 샐쭉한 표정으로 소년을 흘겨보던 부여비는 이내 살그머니 웃음 짓고는 말했다.
“네, 너무 맛있어요. 앞으로 한동안은 이 빙수 맛을 못 본다 생각하니 아쉬워 눈물이 날 만큼 맛있네요.”
상책께서 서방에 가시지 못하도록 발목이라도 잡고 싶지만…….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오며 섬뜩하게 변하는 부여비의 시선에 소년이 헛기침을 하며 다급히 말했다.
“크흠. 서방에서 돌아오면, 더 성대한 야시장을 준비하겠습니다. 그걸로 참아주시지요.”
“빙수도 있겠지요?”
물론, 빙수도 있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