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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03화 (특별외전) (304/314)

환관의 요리사 303화 특별외전

숙친왕부의 정원.

흐드러지게 분홍빛 꽃을 피운 배롱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참새가 포르륵 새파란 여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무더위에 질린 듯 구름마저 자리를 피한 여름의 하늘은 손으로 문대면 지문이 남을 듯 맑았다.

왕부의 정원에서, 늙은 대장장이는 흙가래에 턱을 괸 채 참새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쫓고 있었다.

그때, 어린아이의 낭랑한 미성으로 빚어진 투박한 한마디가 대장장이의 굽은 어깨너머에서 들려왔다.

대장장이는 흙먼지 말라붙은 수염을 대충 소매로 훔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끝자락이 해지고 흙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허름한 옷을 걸친 왕부의 주인, 숙친왕 진연운이 품에 광주리를 안은 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영감, 흙 다 갰수?”

멀었다 이놈아.

늙은 대장장이는 끙하고 신음을 한번 흘리고는 쥐고 있던 가래를 힘껏 움직였다.

하지만 그새 흙이 마른 것인지, 아니면 팔심이 빠진 것인지 움직이는 것이 영 시원치 않았다.

염병할.

대장장이가 짤막하게 육두문자를 내뱉자 옆으로 다가온 소년이 흙을 만져보고는 낄낄거렸다.

“어이구, 이러다간 흙만 개다 세월 다 가겠네.”

“이 개미 똥구멍 빨아먹다 입술 부르틀 놈아. 왕씩이나 되는 놈이 젊은 놈 몇 불러다 쓰면 될 것을, 굳이 이 늙은이를 부려먹어야 속이 시원하냐?”

“얼씨구, 누가 들으면 공으로 부리는 줄 알겠네.”

소년은 입술을 씰룩이고는 젖은 천을 가져다 흙 위에 덮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보낸 세월, 좀 쉬었다 합시다. 영감쟁이도 다릿심 빠진 것 같은데.”

“다릿심이 빠지긴 누가 빠져 이놈아. 너야말로 후들거리니까 내 핑계 대고 쉬려는 거 아니냐.”

“누가 후들거려, 피죽도 못 먹은 영감쟁이 빌빌대는 꼴 보기 안쓰러워서 그런 거지. 하여간…….”

한동안 입씨름을 하던 둘은 이내 진이 빠졌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고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멀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백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 많은 흙을 다 어디다 쓰려고 그러냐?”

“역시 노망났구만. 말했잖수, 화덕 만든다니까.”

“이 오사랄 놈아, 내가 지금까지 갠 흙만 스무 포다, 스무 포. 작게 사랑채 하나 지을 흙으로 화덕을 만든다고?”

“그럼. 왕부의 주방에 들일 화덕인데 그 정도는 돼야지.”

“속은 밴댕이 창자만 한 것이 배포는 염병할.”

화덕이나 만든다길래 기껏해야 하루 치 가욋돈이나 벌어볼까 해서 왔더니, 꼼짝없이 일주일은 발 묶이게 생겼네그려.

백윤이 투덜거리자 소년이 피식 웃고는 거만한 태도로 이죽거리며 말했다.

“영감탱이도 좋잖아. 가열로 직접 만들었다 하니 기술자 대접해서 품삯도 넉넉하게 주고, 거기에 이럴 때가 아니면 영감탱이가 언제 왕부의 공사에 참여해 봐. 가문의 영광 아니야.”

“이런 호래자식을 봤나. 대장장이가 칼을 만들어 바쳐야 영광이지, 화덕 만들어 바치는 게 영광이냐?”

“칼은 이미 하나 해서 바쳤잖수. 참나. 하나면 됐지, 영감쟁이 욕심 사납기는.”

욕심 사납기는 네 욕심이 더하지. 뭔 바람이 불어 멀쩡히 쓰던 화덕 내버려 두고 새 화덕을 만든다고 야단이냐. 그것도 여행 다녀오자마자.

빨빨거리며 나돌아다녔으면 여독이나 풀면서 드러누워 있을 것이지, 이 땡볕에 무슨 화덕을 만든다고 흙 개고 벽돌 나르고…….

백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자 소년은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하고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전에 쓸 때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다녀와서 보니까 크기가 좀 작은 것 같더라고.”

“싸돌아다니면서 뭘 봤길래, 헛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만.”

변명이 궁해진 소년은 머리를 벅벅 긁고는 벌떡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게으른 하품을 하던 백윤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벌써 작업하게?”

“일단 새참 좀 먹고. 뭐가 좀 들어가야 일을 할 거 아녀.”

소년은 흙을 적시는 물을 떠놓은 물통에 손을 씻고는 옆에 놓아두었던 광주리의 천을 들쳤다.

광주리 안에는 손으로 집어 먹기 편하게 납작납작 썬, 간수에 절인 거위고기(滷鵝)가 그득하게 담겨 있었다.

“아니, 이게 웬 거위냐?”

“삶아서 간수에 절인 건데, 찝찌름한 것이 땀 흘리고 나서 먹기 좋지.”

로아(滷鵝).

조주(潮州)지방 사람들이 즐기는 미식 중 가장 각별하기로 유명한 간수에 절인 거위 요리는 경사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반 근이 조금 넘는, 너무 크지 않은 거위를 골라 삶은 다음 다시 솥에서 펄펄 끓인 간수에 절이는데, 은은한 소금기가 밴 거위고기는 그 맛이 담백하면서도 쫄깃한 데다 거위 특유의 누린내가 나지 않아 술안주로도 좋고 밥반찬으로도 훌륭한 데다가…….

“간수에 절였기 때문에 오래 두고 먹어도 쉬이 상하지 않지. 거기에 간수를 끓일 때 장미술에 감초와 계피, 수수꽃다리를 넣고 끓여서 향기도 일품이지.”

“확실히 맛은 좋아 보인다만, 맨입에는 안 넘어갈 것 같은데.”

갈증이 난다는 듯 백윤이 옹색한 쥐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른침을 삼키자 소년이 피식거리며 주방 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장소와 이삼이 술 동이를 품에 안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화덕에 갠 흙을 바르고 있었는지 장소와 이삼의 발간 볼에도 흙이 묻어 있었다.

“술 한 모금 없이 고기를 어떻게 넘기나.”

“그렇지. 일이 고될 때는 술심이 받쳐 줘야 한다니까.”

“영감쟁이 다되긴 다됐구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밥심이 안 받으니 술심을 찾게 된다니까.”

“하여간, 네놈 혓바닥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 죽겠다.”

내가 명대로 살려면 역시 지금이라도 가래로 단매에 그냥…….

씨근덕거리던 백윤은 아이들이 날라오는 술 동이를 받아들고는 그 묵직한 출렁임에 한껏 미소를 지었다.

옹졸한 노인의 얼굴에 헤벌쭉 웃음이 떠오른 것을 본 소년이 대접을 꺼내 들며 말했다.

“가래로 죽이든 뭐로 죽이든, 일단은 목 좀 축이고 나서 하자고.”

* * *

일주일 후.

완성된 화덕을 둘러보며 백윤은 그 웅장한 자태에 혀를 내둘렀다.

과연 이것을 화덕이라 해도 좋을까.

어림잡아 성인 남자 넷 정도는 드러누워도 좋을 만한 내부 공간과 금고에 달아놓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두꺼운 철문을 갖춘 그것은 주방기구라기보다는 차라리 건축물의 하나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듯했다.

“너무 늦은 질문인 것 같다만, 도대체 뭘 구우려고 이런 물건을 만든 거냐?”

“구울 거야 많지. 생선도 굽고, 닭도 굽고, 양도 굽고, 돼지도 굽고.”

“이런 물건이라면 소도 통째로 구울 수 있겠다.”

“그것도 맛있겠네. 소 통구이라. 올릴 접시를 구하는 것도 일이겠어.”

이런 화덕이라면 뭐든 구울 수 있겠지.

소년은 마치 오랜 꿈을 성취한 것만 같은, 뿌듯한 흥분으로 빛나는 눈으로 화덕의 철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자, 그럼 화덕도 새로 들였으니, 개시 손님을 받아볼까.

“영감, 출출하지?”

“그래, 뱃가죽이 등허리에 달라붙을 것 같다.”

“잘됐네.”

소년은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리고는 엄지로 어깨너머 화덕을 가리켰다.

당장에라도 화덕을 써보고 싶어 안달이 난 그 모습에 늙은 대장장이는 쿡쿡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 하나 끝냈으면 거하게 차려 먹어야지. 그런데 뭘 구울 생각이냐?”

뭐든 구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구울 수는 없지. 첫 개시는 각별한 법이니.

소년은 화덕을 만드는 내내 마음속으로 낙점해 두었던 식재료를 떠올리고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처음은 역시, 돼지 아니겠어.”

“돼지라. 그래, 처음은 돼지가 좋겠지.”

기름이 잘 오른 돼지.

화덕에 구울 것으로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재료가 또 어디 있을까.

육질이 섬세하고 껍질이 비단결처럼 보드라운 새끼돼지도 좋고, 살집이 두툼하게 오른 다 큰 놈도 좋지.

젊은 시절을 광동에서 보낸 백윤은 화덕에서 구운 돼지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자고로 화덕 구이 하면 광동 아니겠는가.

“돼지라……. 화덕으로 굽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인 고기지. 기름이 잘 박힌 뱃살은 기름이 안쪽에서 끓어올라 껍질이 튀겨지듯이 익기 때문에 한입 먹으면 바삭바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지. 아니면 살집이 제일 좋은 목살도 좋고. 덩어리째 갈고리에 꿰어 구우면 육즙이 그대로 보존되어 촉촉하고 부드럽지. 갈비짝을 통째로 굽는 것도 훌륭하지. 골즙의 구수한 맛이 화덕의 열기에 녹아 나와 고기에 배는데, 그것을 물어뜯으면……. 크으.”

“영감도 꽤 먹어봤나 보구만.”

잘됐네. 오늘 실컷 먹고 뱃가죽에 기름칠 좀 하고 가쇼.

소년의 말에 퉁명스럽게 고맙다고 답하려 했던 백윤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소년이 돼지고기를 날라오고 있었다. 아니, 돼지를 날라오고 있었다.

분명 고기였지만, 도축한 돼지를 손질한 것이었지만, 고기라 부르기에는 아직 사람의 손을 덜 탄.

백윤은 얼빠진 사람처럼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돼지구만.”

그것은 돼지였다.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낸, 그 외에 어떠한 손질도 가하지 않은 돼지.

머리와 다리, 꼬리까지 그대로 달린 통돼지.

족히 삼백 근은 넘을 듯한 거대한 돼지를 낑낑대며 날라온 소년은 차마 그것을 도마 위로 올리지는 못하고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 그 위로 올렸다.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백윤이 혹시나 한다는 투로 말했다.

“이거, 아직 손질을 덜 한 거냐?”

“뭔 개소리여. 이게 손질 끝난 건데.”

“그럼, 이걸 통째로 굽는다고? 부위별로 나누지 않고?”

“부위별로 나눌 것 같았으면 애초에 가져올 때 나눠서 가져왔지. 뭐하러 낑낑대면서 여기까지 끌고 와서 나누나.”

그럼 이 정신 빠진 놈아, 먹을 입이 두 갠데 지금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다는 게 말이냐, 지금?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백윤을 빤히 본 소년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말했다.

“거, 걱정도 팔자구만. 누가 다 못 먹으면 죽인다고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고 있나? 못 먹으면 남기쇼.”

여기 딸린 군식구만 몇인데.

소년은 실소를 흘리고는 돼지 손질에 들어갔다.

굵은 소금 한 바가지에 오향분, 감초, 생강 등을 혼합하여 뱃속에 골고루 발라주고는 꼬치로 배를 여며 소금기가 잘 스며들도록 둔다.

돼지가 절여지는 동안 소년은 화덕의 철문을 열어젖히고는 한 아름쯤 되는 장작을 가져다 화덕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 한번 달궈 볼까.”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연통을 완전히 연 다음, 소년은 지푸라기에 불을 붙여 장작더미 안쪽에 두고는 풀무로 조심스럽게 공기를 불어 넣었다.

사르륵. 사르륵.

풍로가 불어넣는 숨결이 메마른 장작더미를 스치며 지푸라기의 불꽃에 닿는다. 어루만진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던 불꽃이 서서히 장작더미에 자리를 잡는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

귓가에 속살거리던 작은 소리가 점점 크게 울린다.

어느새 장작더미를 집어삼킨 불꽃이 새파란 혀를 날름거린다.

입술을 바싹바싹 메마르게 하는 그 맹포한 열기가 얼굴을 쓸어 만진다.

목덜미를 화끈거리게 하는 그 열기에 백윤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됐구먼. 잘 만들어졌어.”

“열기가 새는 곳도 없고, 연기도 잘 빠지고. 훌륭해.”

“이제 얼마나 달궈야 하냐?”

“어디 보자, 화덕 크기가 있으니……. 장작 보충해 가면서 한 세 시간?”

세 시간? 어이구, 이거 돼지고기 한 첨 얻어먹으려다 날밤 새우겠네.

백윤이 주린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소년은 툴툴거리는 대장장이에게 짭짤한 육포 한 줌과 쌉쌀한 청주 한 병을 내어주고는 그가 기댄 아궁이에 걸터앉았다.

“이거나 좀 드쇼.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세 시간이야 금방 가지.”

“쯧, 안줏거리가 부실해서 그런지 술맛이 안 난다.”

백윤은 네 다리를 하늘을 향해 번쩍 쳐들고 드러누워 있는 돼지를 힐끔거리고는 힘없이 육포를 입에 물었다.

간장과 참기름을 발라 말린 육포의 맛은 훌륭했다.

하지만 겹쳐 쌓은 낙엽처럼 바사삭 씹히는 껍질과 흘러넘치는 기름진 육즙과 송곳니를 흥분시키는 보드라운 살코기를 기대하고 있던 혀에 그 밋밋하고 담백한 육포의 맛은 건조하게만 느껴졌다.

갈라진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육포를 질겅거리는 백윤을 보던 소년은 자신의 잔을 채우고는 말했다.

“안줏거리가 왜 부실해.”

저기, 멋들어진 안줏거리가 있는데.

소년은 턱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화덕을 가리키고는 기세 좋게 술을 들이켰다.

메마른 모래사막에서 한 모금의 이슬을 발견한 사람처럼 달게 술을 들이켜는 소년을 보며 백윤이 히죽 웃었다.

“그래, 완성된 작품을 앞에 두고 마시는 술만큼 단 것도 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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