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302화 외전 89화
모닥불과 홍등의 불빛에 묽어진 밤하늘 아래서 창백하게 질린 비명이 메아리친다.
겹겹이 쌓은 비단을 예리한 칼로 단번에 가르는 듯한, 가슴을 에는 절규.
그것을 토해낸 부여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는 소년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소년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어이쿠, 못 주워 가셨네. 아쉬워서 어쩌나.”
아니, 돈이 이렇게 바닥에 굴러다니는데, 이걸 못 주워 가시네.
낄낄 웃는 소년을 얄밉다는 듯 노려보던 부여비는 고개를 숙여 소년이 들어 올린 잔을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그곳엔 구슬이 없었다.
“으으, 한 번만, 한 번만 더 할게요.”
“하시는 거야 아가씨 자유지만, 거실 돈은 있으신지?”
“돈은…….”
부여비는 믿을 만한 패를 쥐고 모험을 시도했다 패가망신한 노름꾼들의 전형적인 행동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아직 한 푼은 남아 있겠지.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고 전낭을 뒤지는 것.
하지만 이미 게워낼 대로 게워낸 전낭은 그녀의 고운 손에 쓸쓸한 먼지만을 쥐여주었다.
결국, 부여비 역시 우울한 표정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홍엽비, 라하비에 이어 세 번째 파산자였다.
“이거 참,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이걸 왜 못 주워 가시나. 주워 가라고 대 드리는데.”
“상책……. 궁에 돌아가서 봐요…….”
“커흠, 상책이라니요. 전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아다니는 야바위꾼일 뿐입니다.”
달그락달그락.
잔 안에서 구슬을 굴리며 야바위꾼은 밉살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곳간에 몰래 숨어든 시궁쥐와도 같은 웃음이었다.
야바위꾼은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낮게 끌끌거리며 제법 두툼해진 제 전낭을 쓰다듬었다.
허허, 어젯밤 꿈자리가 좋더라니, 오늘이 바로 대목이로구나. 이 정도면 찝찌름한 짠지에 시큼하게 쉰 탁주가 아니라 기름기 줄줄 흐르는 삶은 돼지고기에 칼칼한 청주 한잔 걸칠 수 있겠어.
소년의 키득거림에 주머니가 허전해진 여인들의 눈동자에 분노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저희는 다 털렸으니, 이제 남은 건…….
“로샨 양? 이번엔 로샨 양 차례네요?”
“로샨, 힘내!”
불복을 허락하지 않는 냉엄한 명령에 로샨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선다.
분노의 칼자루를 억지로 떠맡은 로샨은 난처한 눈으로 열화와 같은 응원을 보내는 비들을 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럼 이번엔 제가…….”
“어이쿠, 아가씨는 좀 세 보이는데, 이러다 밑천까지 다 털리는 거 아니야?”
애교 있는 엄살을 부리는 소년의 입꼬리는 귀밑까지 길게 찢어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새로운 봉을 잡은 장사꾼의 탐욕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 실실 웃고 있는 교활한 낯짝은 이미 팽창할 대로 팽창한 비들의 분노를 터뜨려 버렸다.
“로샨 양, 믿고 있어요.”
“허허, 부담이 막중하시겠습니다그려.”
소년은 이마에 땀방울을 매단 로샨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는 한 가지 제안을 꺼내놓았다.
마치 선심을 쓰듯이, 다른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았던 기회를 내어주듯이.
지금껏 속임수로 벌어먹고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속죄인 것처럼. 가녀린 어깨에 감당키 어려운 짐을 짊어진 그녀를 동정하는 것처럼.
더없이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원래는 돈을 먼저 걸고 판에 들어오셔야 하지만, 아가씨는 특별히.”
“특별히?”
“판에 먼저 참여하고, 돈을 나중에 걸 수 있도록 해드리지요.”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발을 빼시고, 확신이 있다 싶으면 돈을 걸고. 어떻습니까?
소년의 설명을 곱씹던 로샨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빙긋 웃고는 매대 위에서 구르고 있던 구슬 위로 잔을 덮었다.
“그럼, 시작해 봅시다.”
개시 신호와 함께 소년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구슬이 잘그락거리는 소리, 오른쪽에 있던 것이 가운데로, 가운데에 있던 것이 오른쪽으로, 왼쪽에 있던 것이 가운데로, 구슬이 들어 있던 잔을 쫓던 로샨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자, 한번 맞춰보실…… 이크!.”
손에 땀이 고여서였을까. 아니면 어리숙해 보이는 봉을 보고 방심한 탓일까.
잔을 멈추는 순간, 소년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미끄러졌다.
그리고 소년이 쥐고 있던 오른쪽 잔에서 작은 달각 소리가 울렸다.
소년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짐과 동시에 부여비와 홍엽비, 라하비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로샨 양!”
전부 걸어요!
* * *
떨리는 눈망울에 의심의 실핏줄이 툭툭 붉어진다.
오른쪽 잔.
로샨은 실성이라도 한 듯 입술을 달싹이며 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구슬은 없었다.
“분명, 오른쪽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눈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귀로 들리는 것이 다가 아니지요.”
“속임수, 로군요?”
“증명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소년은 피식거리고는 왼쪽의 잔을 들어 올렸다.
구슬은 그곳에 있었다.
허망한 눈으로 그것을 보던 로샨은 고개를 떨구고는 허리춤에서 전낭을 풀어 통째로 소년에게 넘겼다.
감사합니다, 손님.
넉살 좋게 웃으며 전낭을 받아든 소년은 손아귀에 들어찬 무게감으로 금액을 대충 셈해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팔짱을 낀 채 일행의 탕진을 관망하고 있던 난화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벌이가 제법 쏠쏠하셨겠어요?”
“예, 이대로 장사 접어도 될 것 같습니다.”
“어머, 벌써 접으시게요?”
“벌 만큼 벌었으면 발 빼야지요. 원래 이 바닥 장사는 좀 아쉽다 싶은 선에서 빼야 탈이 안 납니다.”
어머나, 허리만 숙이면 주울 수 있는 돈이 바닥에 굴러다니는데도?
난화비는 전낭의 끈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는 살랑살랑 흔들었다. 당나귀 앞에서 당근을 흔들 듯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전낭을 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허어, 이런 놀음 좋아하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즐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거시겠습니까?”
그야 물론.
난화비는 생긋 웃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열 십에 일보로.”
열 십. 10은 곧 도박꾼들에게 올인으로 통하는 은어였다. 거기에 일보는 단판 승부.
소년은 실소를 터뜨리고는 난화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좀 노셨던 분이신가 봅니다?”
“어렸을 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잡기를 좀 배웠지요.”
“허, 좋습니다. 열 십에 단판 승부. 화끈해서 좋군요.”
이거 봉 잡으려다가 봉 잡히는 거 아닌지 몰라.
소년은 손아귀에 찬 땀을 옷자락에 슥슥 문지르고는 기세 좋게 잔을 잡았다.
탁, 탁, 탁.
잔 세 개가 오른다.
가장 먼저 구슬을 품는 것은 오른쪽 잔.
소년의 손이 움직인다.
구슬이 잔 안쪽에서 구르고 부딪히는 소리.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내며 소년이 잔을 뒤섞었다.
‘이쪽도 떠돌아다니며 얼치기로 배운 잡기지만, 그래도 이쪽은 투자한 시간이 다르단 말이지.’
상하이에서 오 년, 홍콩에서 오 년, 대만에서 삼 년.
천성이 도박이나 사기와는 맞지 않아 정식으로 손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십여 년간 뒷골목을 드나들다 보니 어깨너머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우연찮게 주워듣는 것도 있었다.
거기에 손기술 하면 또 요리사 아니겠는가.
비록 어디 가서 대놓고 선보일 만한 재주는 아닌지라 지금껏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소년의 기술은 어리숙한 아가씨들은 분간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상단을 따라다니며 견문을 넓혔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이제 막 꽃다운 방년의 아가씨가 아닌가.
소년은 자신 있게 잔을 움직였다.
자, 돈 놓고 돈 먹기. 줍는 사람이 임자라네.
소년의 손을 묵묵히 관찰하던 난화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속임수는 없겠지요?”
“그럼요! 장사꾼의 덕목은 정직과 성실 아니겠습니까?”
입에 침 한번 묻히지 않고 뻔뻔한 말을 늘어놓는 소년을 보며 부여비가 혀를 내둘렀다.
투덜거리는 여인들을 슬며시 돌아본 난화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수상해서 말이죠.”
“에헤이, 제가 정말 속임수를 썼다면, 아가씨들이 잃으신 금액을 열 배로 돌려드리지요.”
“그 말, 약속하신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화비의 손이 소년의 오른쪽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손목뼈를 바스러뜨릴 것만 같은, 범상치 않은 악력.
순간 언월도며 편곤과 같은 장병기를 가볍게 휘두르던 난화비의 모습을 떠올린 소년이 마른침을 삼켰다.
“결국, 진실은, 시시하고 볼품없는 거지요. 그렇지요?”
속임수라 하기도 민망한.
소년은 난화비의 요구에 따라 천천히 손을 폈다.
소년의 손안에는 작은 방울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을 받아든 난화비는 방울을 손아귀로 감싸 쥐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달각.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손으로 방울을 감싸 쥐고 흔들면 방울이 제대로 울리지 않아 이렇게, 둔중한 소리가 나지요. 너무 뻔한 속임수를 쓰셨어요.”
“아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시시한 속임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꽤 잘 통하지요. 이걸 아시는 걸 보니, 제법 ‘꾼’이신 가 봅니다?”
소년의 짓궂은 물음에 난화비가 배시시 웃으며 살며시 속삭였다.
“지금은 그저, 황제의 여인일 뿐이랍니다.”
* * *
실컷 보고, 웃고 떠들고, 사고, 즐겼으니. 이제는 주린 배를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두 배로 빵빵해진 전낭을 받은 비들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야시장의 한편에 마련된 노천 식당이었다.
여인들이 가까이 오자 말끔한 조리복을 입은 소년이 곰살궂게 웃으며 마중을 나왔다.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
“어머나, 아까 야바위하시던 분 아니세요?”
“예? 야바위라니요? 전 태어나서 한 번도 도박 같은 건 손에 대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소년이 누가 들을까 무섭다는 듯 화들짝 놀라자 난화비가 깔깔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야바위꾼이 아닌 요리사님? 줄여서 상책이라 불러도 될까요?”
“도대체 어떤 신묘한 방법으로 줄이신 건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편한 대로 부르시지요.”
소년은 면사를 쓴 여인들을 배려하여 가림막이 쳐진 자리로 안내했다.
가림만 안쪽으로는 야시장다운 간소한 탁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 그리고 새큼한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술 동이가 차려져 있었다.
술은 매실주였고, 놀랍게도 살얼음이 살짝 얼어 있었다.
“이 술은?”
“어떤 손님께서 아가씨들께 보내신 겁니다.”
“그 손님, 혹시 키가 작고 심술궂게 생긴 사내아이는 아니었나요?”
“크흠, 글쎄요. 얼굴은 자세히 못 봐서…….”
부여비의 뾰족한 말에 소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얼버무리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부여비는 콧방귀를 한번 끼고는 바가지로 술을 가득 퍼 난화비에게 내밀었다.
“우선은, 저희에게 승리를 선물해 주신 난화비님 먼저.”
손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잔을 받아든 난화비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시원하게 잔을 들이켰다.
살얼음이 버석버석 씹히는 차가운 매실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넘어간다.
뱃속이 오싹 얼어붙는 한기. 여름밤의 무겁고 축축한 공기를 단숨에 떨쳐 버릴 듯 상쾌한 활력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난회비가 숨을 몰아쉬었다.
“좋다…….”
단내가 나던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주는 서늘함, 피로에 찌든 혀를 적셔주는 매실의 새큼한 맛, 목으로 넘기고 나서는 은은하게 남는 그윽한 단맛과 향.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매실주의 여운에 취해 있던 난화비가 짧은 탄성을 질렀다.
무더운 여름밤에 마시는, 살얼음 동동 뜬 매실주라니.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홍엽비가 술 동이에 잠겨 있던 바가지를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홍엽비는 그 이름답게, 난화비보다 더욱 붉게 물들었다.
“에구, 매실주는 마시기는 쉽지만 그만큼 취기도 빨리 오르는 술인데.”
어깨에 큰 쟁반을 올린 소년이 벌써 울긋불긋 달아오른 비들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자 매실주 위에 뜬 살얼음을 걷어내 셔벗처럼 즐기던 부여비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쩌겠어요. 아까 사기당했던 것만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끓는데. 술이라도 마셔서 달래야지.”
“홧술 드시면 속 버리십니다. 안주도 좀 챙기시면서 드십시오.”
소년은 멋쩍은 얼굴로 상 위에 안주를 내려놓았다.
물엿을 발라 구워 껍질이 반짝반짝 빛나는 새끼돼지. 바삭하게 튀겨 두부껍질과 죽순을 넣고 산초와 고추로 양념해 볶은 민물장어.
취기로 한껏 달아오른 속을 달래줄 오리와 당귀로 끓인 맑은 탕, 암염으로 간한 양 갈비 수육과 포하강에서 막 들여온 강굴 튀김. 버터를 올려 구운 전복.
근사한 요리가 상을 가득 채우자 뾰로통했던 비들의 얼굴에 원초적인 식욕이 가득 차올랐다.
소년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족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공짜겠지요?”
“물론 공짜지요. 무엇을 드시든, 얼마나 드시든.”
후식인 빙수도, 공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