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301화 (302/314)

환관의 요리사 301화 외전 88화

가느다란 피리 소리와 함께 단지에서 고개를 내민 안경사가 개선장군과도 같은 위엄있는 자태로 군중들의 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멋들어진 부채를 쥔 줄타기 꾼이 팽팽하게 조여진 밧줄 위를 겅중겅중 뛴다.

근사한 비단 조끼를 차려입은 원숭이들이 북을 치고, 갈기에 방울을 단 말 위에서 여성 곡마사가 재주를 부리고, 지휘봉을 든 청년의 지휘를 따라 앵무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몸에 기름을 바른 건장한 장한이 불을 뿜고, 사자탈을 쓴 춤꾼들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만큼의 소란. 그 소란에 취한 비들은 눈이 어지럽다는 듯 휘청거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홍엽비를 부축하며 난화비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요기는 이만하면 충분하죠? 이제 상책이 주신 용돈을 쓰러 가볼까요?”

직접 물건을 고르고, 전낭을 열어 돈을 꺼내 셈을 치른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지만, 규중에서 곱게만 자란 처녀들에게는 발을 동동 구르고 뺨을 발갛게 물들일 만큼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저, 물건을 사보는 게 처음이라…….”

“그러니까 이게 철전이고, 이게 은전이죠? 어라? 이건 모양이 다르네?”

“같은 철전이라도, 이건 닷 전짜리고, 이건 열 전짜리에요.”

이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들은.

난화비는 호들갑을 떠는 부여비와 홍엽비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라하비의 옆에 선 로샨을 바라보았다.

‘이 아가씨들은 제가 책임질 테니, 라하비를 부탁할게요.’

‘사실 저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머나, 이 아가씨도 규중 출신이시네.

로샨과 눈빛을 교환한 난화비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로샨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도 오상호, 아니, 승 상책께서 준비하신 사람들이니 설마 바가지를 씌운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난화비는 마음속으로 소년의 얼굴을 그려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승 상책은 오히려, 당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하실 분이시지.

그의 사려 깊은 온화한 표정 속에 감춰진 짓궂음을 떠올린 난화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순진한 어린양과도 같은 처녀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내가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는걸?

* * *

“알겠나? 높으신 분이라고 사정 봐 드릴 것 없다. 봉 잡았다고 생각하고 아주 등골을 뽑아버려. 뜯어낸 금액만큼 성과금으로 지급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라신 순진한 아가씨들 등쳐먹는 일인데, 완전 돈 놓고 돈 먹기 아니냐.

소년의 명에 동창 요원들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감돈다.

탐욕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들여다본 소년은 음습하게 깔리는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그래, 가욋돈 벌이 만큼 재밌는 것도 또 없지. 오늘 아주 한밑천 잡아가도 좋다. 숙친왕의 이름으로 허락하마.

소년이 왕명을 걸고 약속하자 요원들의 사이에서 소리 없는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그 모습을 본 태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비 분들을 등쳐먹으라는 사람은 처음 보는구나.”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비 분들에게 체험시켜 드리려는 겁니다. 자자! 가장 많이 뜯어내는 사람에게는 뜯어낸 금액의 두 배를 특별 성과금으로 지급한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뭐하나, 쓸 시간이 없는데.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 보내라고 휴가도 준다!. 참고로 이거 업무 실적에도 반영되니 승진하기 싫은 사람은 알아서 해!”

그럼, 각자 자리로!

성과급에 휴가. 그리고 실적 반영까지.

고달픈 직장인들의 심장에 불을 지르는 조건들이 모두 모였다.

없던 죄도 만들어낸다는 동창 요원.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관을 짜놓은 노인도 오줌을 지린다는 동창 요원.

악명이 자자한 이들도 결국은 살기 팍팍한 월급쟁이요, 누군가의 가족인지라, 열의가 넘쳐 흐르다 못해 광기까지 느껴지는 요원들의 기세에 동창 제독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래도 되는 거냐? 모처럼 나오신 밤 나들이에 괜히…….”

“그렇게 오냐오냐 떠받들고 대접만 해드리면 후궁에서 열었던 야시장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정글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애송이들.

폭력과 야만성이 만연한 바깥의 비릿한 공기가 어떠냐.

뿔도 송곳니도 없는, 먹기 좋은 먹잇감을 보는 야수의 눈을 한 소년을 보며 태감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그야 그렇다만, 그래도 대놓고 등쳐먹으라 하는 것은 좀 과하지 않느냐?.”

“과하다니요. 난화비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요.”

“난화비께서?”

“부여비님이나 홍엽비님, 라하비님 같은 분들이야 바깥 구경할 일 없이 곱게만 자라셨으니 직접 물건을 고르고 제 돈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경험이겠지만, 난화비님께는 아무래도 자극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지는 해와 뜨는 달을 올려다보며, 등 떠미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말 안장에 몸을 싣고 상단을 따라다녔던 분이시니, 어설프게 해서는 지루하기만 할 것 아닙니까.

이어진 설명에 태감은 그제야 소년의 뜻이 이해되었는지 말간 웃음을 짓고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서, 난화비를 위해 무대를 마련해 주었단 말이구나.”

“대접을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요.”

말에게는 마음껏 뛸 공간이 필요하지요. 수리에게는 날개를 활짝 펼칠 창공이 필요하지요.

잉어에게는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강이 필요하고, 원숭이에게는 오를 수 있는 나무가 필요하지요.

장수에겐 한 자루 창을 꼬나쥐고 활개 칠 전장이 필요하고, 문인에겐 갈고닦은 지식을 뽐낼 관직이 필요하지요.

그렇다면.

소년은 한 호흡쯤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태감은 그의 시선이 난화비를 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가의 딸에게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녀가 원한 자리가, 저곳이란 말이냐.”

“물론 성에 차지는 않겠지요. 무역상의 딸에게 방물장수와 흥정하는 건 기껏해야 소꿉장난하는 기분일 테니.”

그래도, 접었던 날개를 잠시 펼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말을 가만히 곱씹으며, 태감은 소년의 시선을 따라 난화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좌판에 늘어놓은 가락지의 흠을 잡으며 방물장수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비록 면사를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태감은 그녀가 웃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때깔 좀 보십시오. 희고 곱지 않습니까? 진짜 백옥입니다. 그것도 흑룡강성에서 들여온 최고급품이요. 다른 곳의 옥은 이렇게 곱지 않지요. 오직 흑룡강성의 백옥만이 이렇게 눈꽃이 핀 것처럼 희지요.”

“어머어머, 확실히 진짜 흑룡강의 백옥인 것 같네요?”

“그렇지요? 히야, 이렇게 좋은 물건 어디 가서 못 구합니다. 원래 아무 데서나 내놓는 물건이 아닌데, 아가씨가 그래도 물건 볼 줄 아는 사람 같으니까 내놓는 거예요.”

“그럼 얼마에 주실 거에요?”

커흠, 이것 참. 원래 은 스무 전은 주셔야 하는데.

펑퍼짐한 옷차림에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체격이 좋은 젊은 방물장수가 고민스럽다는 듯 말꼬리를 끌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가격을 말했다.

“에이, 좋은 물건은 다 임자가 있는 법인데, 보아하니 아가씨께서 임자신 것 같으니. 은 열 전만 받지요.”

“은 석 전. 그 가격이면 살게요.”

커흑.

명치를 얻어맞은 듯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방물장수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난화비를 바라보았다.

아니, 스무 전짜리를 열 전으로 깎아줬는데, 그걸 또 깎는다고?

억울함마저 엿보이는 방물장수의 시선에 난화비는 조목조목 그 이유를 들려주었다.

“흑룡강성의 백옥이면 뭐하겠어요. 세공한 사람이 엉터리인데. 잔 상처도 많고, 문양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풋내기가 망친 걸 떨이로 사 온 거죠? 그러니 석 전. 그래도 흑룡강성 까지 발품 파신 값을 쳐서 석 전 드리는 거예요.”

“하이고, 젊으신 아가씨가 아주 귀신이네, 귀신! 좋습니다, 석 전.”

은전 세 닢에 백옥 가락지를 손에 넣은 난화비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부여비의 손에 그것을 끼워주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부여비는 그녀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었다.

둘은 마치 봄바람을 맞은 처녀들처럼 까르륵 웃고는 일행에게 돌아갔다.

“어디, 이제 남은 것은. 로샨 양이죠?”

홍엽비의 목에 걸린 은목걸이와 라하비의 구릿빛 손목에서 잘그락거리는 칠보 팔찌를 본 난화비는 마지막으로 로샨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원하는 게 있냐고 물어오는, 그 다정한 시선에 로샨은 시녀에게 어울리는 겸손한 자세로 겸양의 말들을 꺼내놓으려 했다.

그때 라하비가 서툰 제국어로 톡 치고 나왔다.

“로샨은 저기 향낭이 마음에 든다고 했어요.”

“라, 라하비님. 아닙니다. 전…….”

“어머, 그러고 보니 로산 양 허리춤이 좀 허전해 보이네요?”

로산 양이 마음에 든다고 한 게 이 사향 향낭일까, 아니면 계수나무 향낭일까.

난화비는 볼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는 로샨의 손을 잡고는 그녀를 향낭이 진열된 매대 앞으로 이끌었다.

“이 향낭은 얼만가요?”

* * *

가락지에 목걸이, 팔찌. 향낭. 대모갑으로 만든 얼레빗에 금실 호박 노리개, 상아제 국화문 비녀에 칠보 장식의 나비 비녀, 자개를 붙인 패물함.

매대를 기웃거리며 하나씩 사 모으다 보니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던 전낭이 어느새 홀쭉해져 있었다.

“이런, 장신구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아직 돌아보지 못한 데가 많은데, 벌써 탕진해 버렸네요.”

주머니를 뒤집어 보고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부여비와 홍엽비를 본 난화비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그럼 시원하게 탕진했으니, 이번에는 화끈하게 벌어볼까요?”

“네? 여기서요?”

“그럼요. 세상 어디에나 돈 벌 구석은 있답니다.”

특히, 이런 야시장에는.

난화비는 면사 너머로 의미심장한 눈읏음을 짓고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비들은 난화비의 가녀리면서도 더없이 늠름한 등이 멀어지자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난화비가 걸음을 멈춘 곳에는.

”자, 맞추면 열 배. 열 배로 돌려드립니다. 어이쿠, 아주 돈이 굴러다니는구만. 자 떨어진 돈은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 다들 주워가세요. 맞추기만 하면 열 배.”

별빛마저 기가 죽을 만큼 화려한 홍등의 불빛 아래, 유난히 그늘이 짙게 드리운 구석진 자리.

음충맞은 웃음을 흘리는 소년이 그녀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앞에 놓인 것은 구슬 하나에 잔 세 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난화비가 모른 척 말을 걸었다.

“맞추면 열 배, 확실한 거죠?”

“그럼요. 맞추기만 하면 열 배. 거기에 덤도 얹어드립니다.”

“덤까지?”

“맞추기만 하시면 야시장 노천 식당의 무료 이용권을 드리고 있습니다. 술도 공짜, 음식도 공짜! 얼마든지 먹고 마셔도 공짜!“

공짜.

세상에 이보다 더 감미로운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마음껏 먹고, 마셔도 공짜!

가슴을 뒤흔드는 그 매혹적인 단어에 비들의 입에서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노천식당이라. 거기 어떤 음식이 맛있나요?”

“아이고, 그야 다 맛있지요. 말 듣기로는, 그 노천식당을 차린 사람이 글쎄.”

“글쎄?”

“옛날에 사례 태감 밑에서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오상호인가 하는 사람이 차렸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나, 오상호면 황궁 식방각의 각주를 꺾었다는 그 전설의 요리사?”

소년이 운을 띄우자 난화비가 노련한 입담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잠시 시선을 교환하며 키득거린 둘은 시치미를 뚝 떼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이 있다면.”

우선은 매콤달콤한 양념을 입혀 숯불에 구워낸 닭 날개가 그렇게 맛있다는군요.

거기에 직접 담근 톡 쏘는 탁주에 달착지근한 매실주가 그렇게 잘 어울린다나?

야들야들한 연두부에 얼큰한 마라 양념을 넉넉하게 넣어 뚝배기에 지글지글 끓여낸 마파두부에 짭조름하게 양념한 회과육도 일품이라 들었고, 껍질째 바삭하게 튀겨 달큼한 간장양념에 버무려 낸 민물새우 요리는 밥반찬으로도 술안주로도 최고라더군요.

저기 야시장 중앙에 피운 모닥불에서 통째로 구워낸 양 다리에 소갈비, 통돼지 구이는 그 호방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라던데.

“그것도 좋고 이것도 좋다만, 그중 제일은 여름밤의 무더위를 한 번에 날려주는 특제 빙수가……. 크으.”

“빙수라고요? 이 한여름에?”

“뭐, 황실에서 놀던 양반이니 어떻게 구했나 봅니다. 곱게 간 얼음에 달게 조린 팥이며 과일이며 떡이며, 온갖 달콤한 재료가 듬뿍 올라가는데 맛을 보면 등허리에 오싹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이…….”

햐, 이거 생각했더니 또 군침이 나오네그려.

소년은 넉살 좋게 껄껄 웃으며 소매로 입가를 훔치고는 난화비를 향해 턱짓했다.

“그래서, 하실 겁니까?”

“하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할게요!

난화비의 호기로운 도전장에 소년은 입꼬리를 귀밑까지 길게 찢으며 대답했다.

“후후, 그럼, 한번 판을 벌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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