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300화 (301/314)

환관의 요리사 300화 외전 87화

제국의 심장. 황제께서 거하시는 도시. 제국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도시.

경사에도 사람의 발길이 끊긴 황무지는 있었다.

메마르고 갈라지고 자갈과 모래만 가득하여, 사람의 공으로는 어찌 못할 척박한 땅.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쓸쓸한 땅.

황야는 오늘도 어슴푸레한 황혼 너머에서 찾아올 밤의 이불을 덮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을 담아두지 못하고, 꽃과 나무를 싹 틔우지 못하고,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땅에도 밤은 찾아오고, 별은 빛난다.

황야는 별의 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잠들려는 황야의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있었다.

말라죽은 삭정이가 바스러지는 소리도 아니었고, 바람결이 낮게 불며 우는 스산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였다. 한두 명의,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아닌, 수백 명에 달하는 대인원이 일으키는 거대한 소음.

그 활기찬 소란은 고요함에 젖어 있었던 황야를 일깨웠다.

근면한 이들이 이부자리를 펴고 잠들 시간, 그들은 경사의 변두리에 모여 불을 피웠다.

높게 쌓은 장작에 기름을 붓고 큰 모닥불을 피운다.

불티가 내려앉으려는 어둠의 꽁무니를 사르고 그림자가 겅중겅중 춤을 춘다.

그들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서는 수레에 실어온 것들을 내렸다.

자갈과 낙엽이 깔린 모래땅 위로 번듯한 매대가 줄지어 선다.

줄타기꾼이 밟고 뛸 밧줄이 팽팽하게 조여든다.

뱀 부리미가 부리는 커다란 안경사(眼鏡蛇)가 혀를 날름거리며 꼿꼿이 선다.

악단이 자리를 잡고 악기를 점검한다.

매대가 모여 길을 만들고, 길 위로는 수백 개의 홍등이 걸린다.

사자탈, 귀신탈, 온갖 탈을 쓴 춤꾼들이 오가고 방물장수가 한 아름 들고 온 잡동사니를 풀어놓는다.

낮 동안 잠들어 있던 밤도깨비들이 모여든 것처럼, 바쁘고, 부산하고, 떠들썩한.

황야에 야시장이 섰다.

소년은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폭죽 상자는 안 보이는 곳에 쌓아둬. 숯은 가까운 곳에 두고. 그리고, 배역 분담은 끝났나?”

소년이 두서없이 지시를 내릴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가 일사불란하게 끄덕여졌다.

한몫 잡아보러 나온 장사꾼이, 설렘으로 눈을 빛내는 꽃다운 나이의 소녀가, 손주를 데리고 야시장 구경을 나온 노파가,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 짓고 술 한잔으로 피로를 달래러 나온 사내들이.

동창의 요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이미 맡은바 배역에 완벽하게 몰입한 요원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그럼, 각자 자리로.”

소년은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이들의 등을 물끄러미 보다가 짤막한 숨을 몰아쉬었다.

피로감이 묻어나는 한숨은 어딘가에 기대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흐르는 그림자 속에 파묻혔다.

소년은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목을 몇 번 돌리고는 느릿하게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 있어서인지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소년은 뻐근한 비명을 지르는 어깨를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 소년 못지않게 피로에 찌든 목소리가 어깨너머에서 울렸다.

족쇄라도 찬 듯 질질 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귓바퀴를 황홀하게 하는 중성적인 미성.

소년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셨습니까.”

“피곤해 보이는구나.”

“예, 신경 쓸 게 많아서 잠을 좀 못 잤습니다. 태감님도 적잖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래. 누구 덕분에 말이지.”

‘누구’ 덕분에.

유난히 뾰족한 태감의 말에 소년이 멋쩍게 웃었다.

거참, 까칠하기는.

소년은 헛기침하고는 태감의 맨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꽤 시달리다 왔는지, 태감의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설득이 오래 걸리셨나 봅니다. 하긴, 폐하께서도 쉬이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긴 했지요.”

후궁의 비가 암행을 나선다.

제아무리 황제 폐하라 한들 쉽사리 윤허하기 힘든, 그야말로 파격적인 일이 아닌가.

젊고 개방적이라 한들 황제는, 황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단 과자라도 좀 구워 보내는 건데 말입니다.”

단 걸로 기름칠이라도 했으면 좀 더 원활한 설득이 되었을 텐데.

소년의 말에 태감은 내리깐 시선을 힘겹게 들어 소년과 눈을 맞추고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다만?”

“폐하께서도 야시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더구나.”

소년은 측은하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린 태감을 보고는 작게 혀를 찼다.

“참나, 눈치도 없으시지.”

“커흠, 아무튼, 폐하께 윤허를 받았으니, 이제 손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구나.”

“혹시,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불청객이 찾아온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내 잘 말씀드렸으니.”

태감의 장담에 소년은 그제야 히죽 미소 짓고는 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 태감에게 안겨주었다.

댓잎으로 감싸 골풀로 단단히 묶은, 아직 연한 온기가 남아 있는 꾸러미.

태감의 의아한 시선에 소년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피로할 땐 역시 단 것이 좋지요. 하나 드십시오.”

“단 것이라. 그래, 마침 배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구나.”

골풀을 풀자 댓잎 안쪽에서 아이 주먹만 한 찹쌀떡이 두 개 나왔다.

통통한 찹쌀떡을 베어 문 태감은 기대했던 팥소와는 조금 다른, 달착지근하고 포슬포슬한 소의 맛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의 맛이 아주 특별하구나. 색이 노르스름한 것이 보아하니, 밤인가? 하지만 밤이라 하기에는…….”

맛의 비밀을 찾아 깊은 사유에 잠겨 있었던 태감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태감의 두 눈동자에는 진리를 찾아낸 구도자의 순수한 희열이 담겨 있었다.

“그래, 노란 완두로구나. 노란 완두로 만든 소였어. 하지만 완두 소라 하기에는 이 푸슬푸슬한 식감과 푸근한 맛은.”

“녹두입니다. 녹두. 거피 해서 소를 만들면 이렇게 노란색이 나지요. 노란 완두와 녹두를 반씩 해서 버무려 소를 만들었습니다.”

“오호라, 그래서 이렇게 고소하면서도 물리지 않는 은은한 달콤함이 나는 거로군.”

태감은 정신없이 떡 하나를 꿀꺽 삼키고는 미리 떠놓은 물을 들이켰다.

무더운 여름밤 공기에 미지근해진 물을 감로수처럼 달게 들이키는 태감을 보며 소년이 피식 웃음 지었다.

“어떻게, 요기는 되셨습니까?”

“조금 부족한 듯한데.”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밤은 이제 시작이지 않습니까.”

“그래, 야시장의 별미를 맛보아야 하는데, 떡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지.”

마침, 손님도 오셨구나.

소년은 태감이 품 안에서 얼굴을 가릴 면사를 꺼내 드는 것을 보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태감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곱게 빛은 갈기를 휘날리는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 * *

경사의 변두리. 이름 없는 황야에 멈춰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비단신을 신은 여인이 메마른 땅 위로 내려섰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서서는 황야에 열린 야시장을 바라보았다.

“난화비님. 잠시만…….”

마차 안쪽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인은 재빠르게 마차 앞에서 물러섰다.

뒤를 이어 곱게 차려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줄줄이 마차에서 내려섰다.

키가 작고 체격이 왜소한 여인, 중키에 선이 고운 여인. 그리고, 면사를 쓰지 않은, 이국적인 차림의 발랄한 소녀.

야시장의 화려함에 정신이 팔린 여인들을 보며 소년이 짤막하게 헛기침했다. 크흠.

“잘 오셨습니다. 난화비님, 홍엽비님, 부여비님, 그리고 라하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허어, 제국어가 퍽 익숙해지셨군요.

손녀를 안아 든 노인과 같은 푸근한 미소로 라하비를 맞이한 소년은 의아하다는 듯 그녀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로샨 양은 오늘 오지 않으셨나요?”

“아, 여기 있습니다.”

그 대답은 조금 늦게, 마차 안쪽에서 들려왔다.

단정하고 검소한 차림새에 시원한 이목구비의 여인.

라하비의 시녀, 로샨이 라하비의 것임이 분명한 면사를 들고 뒤늦게 내리는 것을 본 소년이 미소 지었다.

“오래간만이군요. 로산 양.”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상호님. 아니, 이제 승 상책이시죠?”

무던한 덕담을 교환한 후, 소년은 지극히 극적인 움직임으로 성큼성큼 그녀들의 앞으로 걸어가서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손님분들도 다 오신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인사 올리겠습니다.

“오늘 야시장을 개최한 후궁의 상책, 승조라 합니다.”

인사와 함께 소년은 작은 바구니 다섯 개를 비들에게 건네었다.

등나무로 짠 바구니 안에는 비단으로 만든 작은 전낭이 들어 있었다.

전낭의 무게를 가늠해 본 난화비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어머, 용돈인가요?”

“시장에 방문해 주신 여러분께 주최 측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혹시 야시장이 초행이시라면, 안내인을 붙여드릴까요?

소년의 권유에 멈칫한 난화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그때 부여비가 톡 앞으로 나서서는 당차게 말했다.

“배려에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저희끼리 웃고 떠들 생각이라.

그에 소년이 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정네가 눈치도 없이 끼어들어 방해했군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소년은 다시금 정중한 인사를 올리고는 야시장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작달막한 소년이 인파에 섞여드는 것을 멍하니 보던 난화비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팔에 얽혀오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것은 부여비였다.

“자, 그럼 가실까요?”

야시장은 오늘 하루뿐이잖아요?

그 말이 난화비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렇죠. 오늘 하루뿐이죠. 그러니.”

최대한 만끽해야겠죠?

난화비는 배시시 눈웃음을 짓고는 팔짱을 낀 부여비를 잡아끌듯 힘찬 발걸음으로 야시장에 들어섰다.

야시장의 문턱을 넘자마자 무절제하고 난잡하고 경쾌한 소음이 그녀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한 모금 마시면 속병이 낫고, 상처에 바르면 피가 멎고, 부려진 뼈가 붙고, 피부가 고와지고 눈이 맑아지는 기적의 약을 단돈 넉 전에 만나보십시오! ”

수상쩍은 효험을 자랑하는 약을 늘어놓은 약장수에.

“거기 자네, 신년 운세가 궁금하지 않나? 재물운 연애운 건강운부터 손금, 관상도 봐준다네. 어이쿠, 자네는 보아하니 얼굴에 그늘이 지고 어깨가 늘어지고 발에 힘이 없는 것을 보니, 딱 봐도 조상신이 노하신 게야! 그럴 때는 이 부적을 머리맡에 붙이고 자면 되는데, 크흠, 영험한 부적이라 가격이 조금 비싸. 어허, 그냥 가려고? 그럼 복채는 주고 가야지.”

화려한 도복을 차려입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이라 쓴 깃발을 손에 쥔 점쟁이.

얼레빗이며 반짇고리, 빨간 연지에 흰 분가루 등을 좌판에 펼쳐놓은 방물장수.

부글부글 끓인 엿을 묻힌 과일 꼬치를 파는 중년인, 잔술을 파는 노파.

장사꾼들의 호객 못지않게 손님들의 목소리 또한 대단했다.

물건의 흠을 잡아 가격 흥정을 시도하는 아낙네, 첫사랑에게 선물할 가락지를 두고 상담하는 청년과 벌써 불콰하게 취해서는 휘청거리는 주정뱅이들, 서로가 산 연지의 색을 비교하며 꺅꺅 웃는 처녀들.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물결친다.

오래전, 후궁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야시장의 번잡함과 요란함이 비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저 화원의 꽃처럼 자라나, 정숙함을 최대의 미덕으로 알고 살았던 규중의 여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고, 너무나도 매혹적인 생동감.

난화비는 구경에 정신이 팔린 다른 비들을 돌아보고는 살포시 웃음 지었다.

자신은 후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상단을 따라 다니며 이런저런 경험을 해왔지만, 그녀들은 이번이 처음일 테니.

“어머나, 저기 기예단이 있네요. 같이 구경 갈까요?”

난화비가 앞장서자 그 뒤로 비들이 따라붙는다.

한 줄로 서서는 종종 따르는 그 모습이 마치 처음 둥지 밖으로 나온 새끼 오리들이 어미를 따르는 것 같아, 필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난화비는 그녀들을 이끌었다.

“저쪽은 줄타기 곡예를 하고 있고, 저쪽은 뱀 부리미가 공연을 하고 있네요? 어머, 안경사! 크기도 해라.”

뱀 부리미가 피리를 불자 거대한 안경사가 단지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 특징적인 목 주변의 넓적한 볏을 빳빳하게 세운 그 독살스러운 자태에 홍엽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도, 독사 아니에요?”

“네, 독사예요. 독성이 얼마나 센지 한번 물리면 말도 고꾸라지는데…….”

그때 줄의 맨 끝에서 고개를 불쑥 내민 라하비가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저희, 나라에 마니 살아요! 코브라라고 해여!”

“혹시 저 뱀도 찬드라 왕국에서 온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가까이 가서 볼까요?

창백하게 질린 홍엽비의 얼굴을 본 난화비가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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