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99화 외전 86화
그을음 낀 아궁이 속에서, 잿가루의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잠들어 있던 불씨를 향해 더운 숨결이 속살거렸다.
일어날 시간이야, 어서. 그 부드러운 부름에 답하여 불씨가 잿가루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
눈 비비며 일어난 불씨를 위해 소년은 한 아름쯤 되는 장작을 아궁이에 밀어 넣었다.
불씨가 히죽 웃는다. 불씨가 장작을 끌어안는다. 꽃이 핀다.
온기가 느껴지는 불빛에 질린 어둠이 주방의 구석진 곳으로 물러섰다.
태감은 불빛이 아른거리는 영역의 끝자락에 의자를 두고는 앉아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오늘의 야식은?
소년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에 철과를 걸고는 나른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침 양과자를 굽느라 버터를 넉넉하게 만들어 뒀으니, 남은 버터도 처리할 겸 밥이나 볶지요.”
버터는 오래 두면 상하니 말입니다.
소년은 철과가 달아오를 때쯤 작은 단지를 가져왔다.
단지 안에는 유백색의 버터가 가득 차 있었다.
달착지근한 우유 향기가 아궁이의 열기에 녹아 살금살금 콧잔등을 간지럽힌다.
버터 한 덩이가 철과의 경사를 타고 미끄러진다. 녹는다. 끓어오른다. 갈색으로 그을린다.
소년은 거품이 끓어오르는 버터를 향해 다진 마늘을 한 움큼 집어넣었다.
버터의 향기로운 냄새에 마늘의 알싸함이 섞여든다.
젊은이의 위장에 불을 지르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그 향기.
태감은 참지 못하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버터에 마늘.
이 얼마나 근사한 조합인가.
소년은 벌겋게 달아오른 태감의 얼굴을 보고는 입꼬리 한쪽을 비죽여 웃었다.
버터에 마늘, 그리고.
“간장 한 방울이 들어가면, 완벽하지요.”
쪼르륵.
병목이 얇은 도자기 병에서 짙은 색의 액체가 떨어진다.
철과의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린 간장이 버터와 만난다.
달큼하면서도 짭조름한 향기가 밤의 어둠을 불사른다.
태감은 충혈된 눈동자로 불길이 넘실거리는 철과를 노려보았다.
버터와 마늘, 간장이 조려지는 철과에 마지막 한 조각. 식은 밥 한 덩어리가 들어간다. 하얀 쌀 알갱이에 노르스름한 색이 입혀진다.
마무리로는 송송 썬 쪽파 약간. 건더기로는 오직 다진 마늘 한 움큼이 전부인, 볼품없는 볶음밥.
고기도 채소도 달걀도 들어가지 않은 초라한 한 접시.
하지만 태감은 자제력을 잃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흥분된 표정으로 빼앗듯 접시를 낚아챘다.
그때, 아궁이의 두 번째 화구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슬고슬한 마늘 볶음밥을 한술 크게 뜨려 했던 태감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더 할 것이 있느냐?”
“아무래도 볶음밥 한 접시로는 너무 초라하니, 간단한 곁들이 음식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곁들이라, 이것만으로도 족한데.”
이런 근사한 볶음밥을 앞에 두고, 곁들이에 눈길이 갈 것 같지는 않다만.
태감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자신을 기다리는 따끈한 야식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벌려, 볶음밥을 입안에 가득 담았다.
차오른다. 불기운에 알싸한 맛은 누그러지고 고소한 맛은 배가된 마늘의 푸근한 향기, 혀에 착 달라붙는 간장의 은근한 짭짤함.
그리고 버터. 짙은 감칠맛이 뺨 안쪽을 가득 채운다.
그 묵직한 향기에 취해 있던 태감의 코가 갑작스럽게 움찔거렸다.
버터와 마늘과 간장의 그윽한 향기 사이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상큼한 향기.
감귤류의, 그중에서도 가장 새큼한 과실의 향기. 그것은 틀림없이…….
“영몽(柠檬). 영몽이로구나.”
“이왕이면 서방식으로 레몬이라 불러주십시오.”
“레몬? 어감이 나쁘지 않군.”
코끝을 저릿하게 하는 그 상큼함, 상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고 몸을 부르르 떨게 되는 산미.
여름 레몬의 향기가 철과에서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태감의 시선에 소년은 머쓱하게 웃고는 국자로 철과 안의 내용물을 떠올렸다.
끈적하게 늘어지는 향기로운 레몬 소스.
탕수육이나 쏘가리 튀김에 끼얹어 먹는 당초와 유사하지만, 덜 달고, 더 가벼우며 더 산뜻한. 그것은
“닭고기를 위한 소스입니다. 홍콩에서는 이 레몬 소스에 전분 가루를 입혀 튀긴 닭고기를 버무려 만든 레몬 치킨을 즐겨 먹지요.”
어째선지 발상지인 홍콩보다는 물 건너 미국에서 더 인기 있는 요리지만, 레몬 치킨은 세계 어디서나 내놓으면 환호를 받는 중화 요리계의 숨은 보석과 같은 요리였다.
바삭바삭한 튀김에 새큼한 레몬 소스, 그리고 꽝꽝 언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운 맥주는 홍콩의 여름 야시장을 대표하는 명물이었다.
“맛이 무겁고 단조로운 마늘 볶음밥에 곁들이기엔 이만한 것이 또 없지요. 새콤달콤한 레몬 소스가 볶음밥의 기름기를 산뜻하게 잡아줄 겁니다.”
“허어, 볶음밥에 곁들이로 레몬 치킨.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아니냐.”
“주객이 전도되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다 태감님의 뱃속으로 들어갈 텐데.”
네 말이 옳다. 볶음밥이 객이 되면 어떻고 레몬 치킨이 주가 되면 어떠냐. 어차피 뱃속에서 하나가 될 터인데.
태감은 빙긋 웃고는 젓가락과 수저를 양손에 나눠 들었다.
왼손으로는 고소한 버터 향이 솔솔 피어오르는 볶음밥, 오른손으로는 황금빛 레몬 소스에 버무려진 바삭한 치킨.
태감의 눈동자 속에서 거센 불꽃이 타올랐다.
삼두육비(三頭六臂)의 수라가 식사를 한다면 분명 저런 광경이 펼쳐지리라.
소년은 태감의 맹렬한, 그야말로 전투적인 식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한 입, 두 입. 숟가락을 뜰 때마다 볶음밥의 언덕은 뭉텅이로 깎여 나갔다.
마치 굴삭기처럼 움직이는 태감의 숟가락에 질린 소년은 찬장에 올려두었던 버터 단지를 다시 꺼내오고는 사그라들었던 아궁이에 새로운 장작을 공급했다.
불이 크게 타오른다.
소년은 노회한 요리사답게, 태감이 마지막 숟가락을 뜨고 아쉬운 숨을 토해내는 때를 노려 두 번째 볶음밥을 상에 올렸다.
모자란듯한 서운함이 놀라움과 행복으로 역전되는, 극적인 타이밍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황금빛 볶음밥을 굽어보던 태감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휜 미소가.
“야식을 이리 든든하게 챙겨주는 걸 보니, 날 부려먹을 일이 있는 게로구나?”
“허허, 태감께선 든든하게 드셔야 일이 손에 잡히시지 않습니까.”
“동창 제독을 야식 한 끼로 부려먹으려 하다니. 이런 날강도 같은 녀석.”
태감은 애교 있는 목소리로 투덜거리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공을 들이느냐?
소년은 배시시 웃고는 별것 아니라는 말을 서두로 용건을 꺼내놓았다.
“난화비님께 성대한 야시장을 약속드렸는데, 아무래도 후궁은 부지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규모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어서 말입니다. 소란을 피우기엔 눈치도 보이고.”
그러니, 태감께서 황제 폐하를 설득해 윤허를 받아주셨으면 하는데.
소년의 말을 경청한 후, 태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흘리듯 중얼거렸다.
“네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 * *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하품하며 부스스 고개를 드는 시간, 긴긴밤의 어둠을 밀어내며 드리운 돋을볕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횃대에 앉아 있던 새벽닭이었다.
따사로운 빛무리가 닭장 앞까지 들이치자 닭들은 자신들처럼 부지런하지 못한 미욱한 인간들을 위해 움츠렸던 목을 길게 뻗고는 부리를 열었다.
잠시 후, 목청 좋은 수탉의 호령이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단잠에 빠진 둔한 인간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몇 명. 닭들도 감탄할 만한 부지런함으로, 혹은 아침잠이 없는 노인의 서글픈 특성 때문에 그 계명성을 앉아서 듣는 이들이 있었다.
천성이 상인인 표자승과 늙어빠진 소년이 그러했다.
“내가 너무 일찍 찾아온 것 아니냐.”
“아닙니다. 저도 원래 이쯤에 눈을 뜹니다. 자고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하지 않습니까?”
기운차게 웃는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구나.
소년의 건조한 태도에 표자승은 뒷덜미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긴장감을 맛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중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일부러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신 걸 테지.
표자승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눈을 부릅뜨자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표자승, 네 인맥을 좀 빌려야겠다.”
“인맥, 말씀이십니까?”
“그래.”
인맥이라니.
표자승은 의구심과 함께 불안감이 싹트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는 그의 하나뿐인 스승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피를 이은 숙친왕이기도 했다.
그런 분께서 한낱 상인의 인맥을 빌리셔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시길래.
표자승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표자승.”
소년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곡예단을 섭외할 수 있겠나?”
“예?”
표자승은 자신이 퍽 얼빠져 보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국가적 중대사가 오가리라 기대했던 표자승의 속내를 흙발로 짓밟으며 소년은 조건을 늘어놓았다.
“무엇보다도 신용이 중요하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무뢰배는 안 돼. 곡예단 중에는 길에서 만나면 강도로 돌변하는 놈들도 간혹 있으니.”
“그야, 그렇지요. 예. 늘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간혹 그런 이들도 있지요.”
“그러니 믿을 만한 이들이면 좋겠다. 그 외에는, 지나치게 난잡하거나 기괴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곡예를 하는 이들은 없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이국적인 느낌이 산다면 좋겠지.”
“이국적이고, 신용이 확실하며,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은, 그런 곡예단 말씀이시지요.”
그 정도라면야…….
표자승이 얼떨떨한 얼굴로 조건을 수용하자 소년은 다음 조건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너희 쪽에서 혹시 귀금속도 취급하던가?”
“귀금속 말씀이십니까? 그야, 취급하기는 하지요.”
“그럼 장신구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부피가 큰 것 말고, 가락지나 비녀 종류로 준비해다오.”
그리고 노점을 열 매대도 필요하고, 역시 폭죽도 많이 있어야겠지. 그리고…….
고민하는 소년을 멍하니 보던 표자승이 갑작스럽게 고개를 쳐들었다.
당혹스러움으로 벌겋게 얼룩진 표자승의 눈을 들여다본 소년이 턱짓으로 발언권을 넘겼다.
표자승은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거푸 숨을 몰아쉬고는 입을 열었다.
“곡예단에 매대에 폭죽이라니, 스승님, 부디 이 아둔한 제자를 깨우쳐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시려고 이런 것들을 주문하십니까.”
“아아, 야시장을 열 생각이다. 크고, 화려하게.”
“야시장이요?”
“그래, 귀한 손님께서 밤 나들이 나오실 야시장.”
귀한 손님.
표자승은 그 말을 곱씹어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설마.
소년은 표자승의 의문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부드러운 어조로 답을 재촉했다.
“준비할 수 있겠느냐?”
“매대나 폭죽, 장신구 따위는 당장 내일이면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곡예단을 준비하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사람을 모으는 일이니 시일이 필요할 테지. 얼마나 걸리겠느냐?”
표자승은 난처하다는 얼굴로 소년의 시선을 피하고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턱수염이 부숭부숭한 곰 같은 사내가 의기소침해 하는, 대단히 보고 있기 힘든 광경에 소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적어도 닷새, 아니, 엿새는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떠돌아다니며 기예를 파는 이들이다 보니 접선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여…….”
“그만하면 되었다. 어차피 나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엿새로 하자꾸나.”
소년의 선선한 승낙에 표자승의 얼굴에도 말간 웃음이 피어올랐다.
소년은 피식 웃고는 품 안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그중 한 장을 뜯어 표자승에게 내밀었다.
“스승님, 이것은?”
“숙친왕의 이름으로 발행한 전표다. 네가 알아서 금액을 적어넣거라.”
소년의 말에 표자승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께 어찌 이문을 남기겠습니까. 이 표자승, 모자란 놈이지만 그렇게 후안무치한 놈은 아닙니다.”
“개소리 말고 준다고 할 때 제값 받고 팔아라. 제자 등쳐먹는 못난 스승으로 만들지 말고.”
“그래도…….”
소년은 말 대신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표자승의 입을 틀어막았다.
끙 소리를 내며 전표를 받아들고 단가를 계산하던 표자승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인원은 곡예단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매대를 준비하셨으니 매대를 관리할 인원도 따로 뽑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아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쪽은 태감께서 준비하실 테니.”
마침, 이런 일에 적임자들이 있거든. 동창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