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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98화 (299/314)

환관의 요리사 298화 외전 85화

바람결에 한껏 배어 있었던 매캐한 화약 연기가 가실 때쯤, 선선한 바람에 차디찬 냉기가 감돌 때쯤의 일이었다.

“커흠, 부여비님.”

“어째서? 어째서 밀봉하여 가열한 음식은 상하지 않는 거지요? 무엇 때문에?”

소년은 흥분한 무소와도 같은 기세로 질문해 오는 부여비를 보며 굽은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아아, 신이시여. 제국을 가호하시는 금룡이시여. 이 짐은 제게 너무나 버겁나이다. 부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짐만을 지게 하소서.

“자세한 원리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아마도…….”

“아아, 왜일까? 역시 공기의 유무일까? 공기가 없는 상태에선 음식물이 상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역시, 가열하면서 음식물을 부패하게 하는 원인이 제거되는 걸까?”

“그, 정확히는 공기 중의…….”

“공기 중의?”

“그, 그것이.”

소년은 진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소매로 훔치고는 떠듬거리며 말했다.

음식물을 밀폐된 용기에 담아 가열하였을 때 음식의 장기 보존이 가능해지는 이유.

이것을 설명하려면 우선은 세균이라 하는, 이 세계에선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개념을 설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을 불 앞에서 땀 흘리며 일해온 늙은이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해 두는 건데, 학점 채우려 들었던 미생물학 시간에 졸지 말았어야 했는데.

소년은 낙제만 안 받으면 됐지, 요리사는 실전 아니겠어 하면서 이론을 등한시했던 젊은 날을 뼈가 저리도록, 피눈물이 흐르도록 후회했다.

아아, 방탕하게 보냈던 시간이여.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소년은 불타오르는 학구열로 눈을 빛내는 부여비의 앞에서 간신히 무언가를 쥐어 짜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밀봉하여 가열하는 과정에서 음식물을 상하게 하는 원인인 세균이라 하는 것이…….”

“세균? 세균이란 무엇이지?”

“에……. 그러니까 세균이란 것은.”

총이란 것은, 당장 눈으로 보이는 직접적인 위험이었다.

그저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어린아이가 어른을 죽일 수 있게 되는,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물건.

굳이 결과를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구나 끔찍한 참상을 상상할 수 있는 물건.

그렇기에 소년은 총의 발명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다면 병조림은 어떤가.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제과 기술자였던 니콜라 아페르(Nicola Appert, 1752~1841)가 발명해 낸 야전용 음식 보존법. 병조림은 어떤가.

위협적인가. 두려운가. 전쟁의 도화선에 불씨를 붙일 만한가. 세상을 피와 비명과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게 할 만한, 그런 발명품인가.

그렇지 않다. 기껏해야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발명된 기술이 아닌가.

거기에 결함도 많은 기술이었다. 병조림은 무겁고, 쉽게 깨지며, 제작 비용 또한 값비싸 야전용 음식 보존법 이란 목적으로 탄생했음에도 정작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널리 이용되지 못했다.

병조림의 기법이 본격적으로 군용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10년 영국의 피터 듀란드(Peter Durand)가 석관 제조법을 개발한 후의 일이었다.

유리병을 대체할 깡통이 발명되기 전까지, 병조림은 민간에서 저장식품으로나 이용되었을 뿐.

‘그러니, 무슨 문제가 생길까. 분명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소년의, 미생물학과 보건학, 위생학에서 간신히 낙제점만을 면했던 무식한 김승조의 소견이었다.

그리고 지금, 김승조는 그것이 지나치게 낙천적인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를, 부여비라는 여인의 천재성을 얕보았던 것이다. 낙관했던 것이다. 감히, 범부도 되지 못하는 무식쟁이가.

부여비님. 이것은. 도대체?

화약의 매캐한 냄새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청명한 여름 하늘 아래서, 부여비를 다시 만난 소년은 자신의 아둔함에 진저리쳤다.

왜 조금 더 주의 깊게 고르지 않았을까. 왜 조금 더 생각하지 않았을까. 병조림이 이 세상에 미칠 영향력을, 왜 고려하지 않았을까.

창백하게 질린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을, 흥분과 놀라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석하며 부여비는 콧잔등에서 미끄러진 안경을 추스르고는 해맑게 웃었다.

“네 상호께서, 아. 이제는 상책이라 하셨지요? 상책께서 알려주신 대로 병조림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상책께서 언급하신 세균이라 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을, 발명해 내신 겁니까.”

나무로 이루어진 통과 여러 개의 유리판이 겹쳐져 있는, 미세한 것을 확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

현미경을 바라보며 소년은 신음했다.

* * *

“변명처럼 들릴 줄은 압니다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 네겐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었으니, 입단속이 어려웠을 테지.”

투덜거리는 소년에게 건성으로 대꾸하며 태감은 상 앞에 놓인 기이한 기구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는 기구. 아직 현미경이란 이름을 받지 못한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태감은 신기하다는 듯 소년에게 질문했다.

“세균이라,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물이란 말이지. 확실히 네가 살던 세계는 우리가 사는 곳보다 진보해 있군. 그런 것을 이미 관측하고 분류했다니.”

“그것도 제가 살던 시대의 수백 년 전에 말이지요. 그러니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지요. 염병할, 그래도 조금 더 생각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사람이란 으레, 내가 알고 있는 거라면 상대도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지.”

“말실수의 원인이지요.”

그리고 보통,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일수록 그런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더군.

태감은 입꼬리를 비죽이며 소년의 경솔함을 비웃어 주고는 말했다.

“그래서, 그냥 적당히 얼버무리고 도망쳤단 말이냐?”

“어쩌겠습니까. 이미 한번 연구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는데, 또 위험할 것 같으니 묻어버리자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세균이라는 것을 발견한 일이, 그렇게나 위험한 일이냐?”

이래서 모르는 인간들은.

조금 전 비웃음의 앙갚음을 하려던 소년은 이내 그것이 제 얼굴에 침 뱉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의미로는, 위험하지요. 총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렇게나?”

“말하자면……. 예, 천기누설이군요. 천기누설.”

말 그대로, 신의 옷자락을 들춰본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란 말입니다.

소년은 자조적인 웃음을 입에 걸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세균의 존재가 발견되었으니 이제 머지않아 질병의 원인이 규명될 것이고, 소독의 중요성이 대두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어쩌면, 본래 순리대로라면 죽어야 할 이들이 살아남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순리라 하면 곧 하늘의 뜻인바, 그렇다면 네가 지금 뿌린 씨앗이,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거라면…….”

순천자존(順天者存) 역천자망(逆天者亡)이라. 순리에 따른다면 살 것이요, 순리를 거역한다면 망하리라.

“하지만.”

소년은 점차 긴장과 각오로 경직되는 태감의 얼굴을 보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역사적 발견이라 하여 당대에 빛을 보는 일은 많지 않지요. 오히려 머나먼 훗날에, 후대에 발견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러니, 만약 세균과 현미경의 발견이 순리라면 당대에 빛을 볼 것이요, 역천이라면 역사의 모래 속에 묻혀 후대에나 그 가치를 입증받을 테니.”

“그저 지켜보잔 말이구나?”

소년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정자의 냉엄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태감은 이내 입꼬리 한쪽을 살짝 올리고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세기의 발견임이 틀림없구나. 훗날 어찌 될지 모른다고 하여 폐기하기에는 아까운 지식이야.”

“어쩌면, 인류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계기가 되어줄지도 모르지요.”

“허어, 인류의 미래라. 네게 이런 박애주의적 면모가 있었는지는 몰랐구나.”

인류의 미래라.

태감은 잠시 그 단어를 입안에 머금어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너희들의 세계일 수도 있겠구나. 인간이 으르렁거리는 강철을 타고 달리고, 하늘을 날고, 바다 깊은 곳부터 달 위까지 도달한 세계.

미지에 불과했던 많은 것들이 기지(旣知)로 바뀐, 그런데도 여전히 싸우고 피 흘리고 고통받고 굶주리는 세계.

그것을 달갑게 생각해야 할지, 비통해해야 할지 고민하던 태감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그 상념을 털어버렸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할 만큼 그는 여유롭고 넉넉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배가 고플 때는.

소년은 태감의 배에서 울리는 근엄한 울림을 듣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녁이 영 부실하셨나 봅니다?

그에 태감은 마치 잔칫집 앞에서 기웃거리다 찬물 한 바가지 얻어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혹시나 해서 요리사에게 따로 상을 거나하게 차리라고 말은 해 두었는데…….”

“가짓수는 넉넉했다. 다만.”

“맛이 없어서 깨작깨작하셨단 말이군요?”

하여간, 솜씨가 너무 잘난 것도 문제군.

소년은 낄낄 웃고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중독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왕부의 주방인데 요깃거리 정도는 있겠지요.”

“괜찮겠느냐? 내일은 일정도 빡빡하게 잡혀 있다면서.”

야시장을 열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염려스럽다는 태감의 말에 소년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세상에, 살다 보니 태감님께 이런 말을 듣는 날이 다 오네. 언제부터 제 걱정을 그리하셨다고.”

“어허, 그런 섭섭한 말을. 표현하지 않아 그렇지, 난 늘 네 걱정을 하고 있었다.”

“허허, 절 그렇게 걱정하셨다는 양반이…….”

“커흠,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착취라도 한 줄 알겠다.”

만약 이 세계에도 고용노동부가 있었다면 댁은 고소당해서 징역살이할 팔자란 것만 알아두쇼.

소년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웅얼거리고는 가래침과 함께 뱉었다. 퉤.

“태감님, 혹시 제가 살던 곳의 법규 중에 노동법이라 하는 것이 있는데, 배워보실 생각 있으십니까?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법인데, 그중에서도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건강, 안전 또는 도덕을 해칠 우려가 있는 업무에 종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아동 노동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래, 전에도 한번 말했던 적이 있었지. 내 예전부터 너에게 꼭 들어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귀중한 강의를 듣기에는 나의 심신이 편치 않으니,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어떠냐.”

“허허, 자고로 배움은 몸이 고단할 때, 배가 비었을 때 하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몸이 힘들고 굶주렸을 때야말로 정신이 가장 또렷하게 날이 설 때이니, 지금이야말로 배움에 뜻을 둘 때가 아니겠습니까.”

“허허, 입으로만 지조와 절개를 논하는 문인들이 그런 말을 하고는 하지. 하지만 그런 이들 중 진정 고단함과 굶주림을 아는 이가 어디 있더냐? 비단 방석에 앉아 기름진 음식과 달콤한 술을 즐기는 이들 중 어느 누가 진정한 삶의 피로와 허기를 알더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하였다. 피로와 굶주림에 찌든 육신에 어찌 맑은 정신이 깃들 수 있겠느냐?

“그러니 값진 지식을 받으려면 심신이 편하고 배가 든든할 때 해야 한단 말이다. 배가 비고 사지가 저린데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굶주린 이에게는 식은 밥 한 덩이가, 고단한 이에게는 낡은 거적 한 장이 더 값질 터인데.”

태감의 유려한 달변에 말문이 막힌 소년은 결국 고개를 가로젓고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항복의 표현이었다.

“졌습니다. 참, 정치가 놈이랑 혀로 승부를 보려 했으니, 내가 얼간이 짓을 했구만.”

“이제 정계에 복귀해야 하니, 날을 잘 갈아두었지. 어떠냐. 예전만 하더냐?”

“전보다 더 날카로워지셨습니다그려.”

얄미워서 한 대 갈겨주고 싶을 만큼.

소년은 농담이라는 듯 실실 웃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결코,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듯한 그 차돌 같은 주먹에 태감은 식은땀을 흘리고는 뒷걸음질 쳤다.

“말로 끝난 문제에 주먹을 들이밀면 추한 법이다.”

“원래 사람이 나이가 들면 좀 추해지는 법입니다.”

어이쿠. 노망이 나서 이런가, 손이 말을 안 듣네그려.

소년의 주먹이 턱 쪽을 겨냥하자 태감은 헛기침하고는 곰살궂은 태도로 말했다.

“나이가 들어 추해지는 것은 먹은 나이만큼 지혜를 함양하는 대신 아집만을 키운 볼썽사나운 늙은이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김 대인께선 그런 볼썽사나운 늙은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르셨습니까?”

저 나잇값 못하는 노인네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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