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97화 (298/314)

환관의 요리사 297화 외전 84화

“역시, 여름이 좋다. 서난궁은 여름이 제일 보기 좋아.”

봄의 서난궁은 이곳저곳에서 들풀과 야생화가 기지개를 켜고 있으니 파릇파릇해 보기 좋고, 가을의 서난궁은 사방이 울긋불긋 물들어 있어 화려하니 보기 좋다.

그리고 겨울의 서난궁은 앙상한 가지에 흰 눈꽃이 피어 있으니 곱고 투명해 보기 좋다만, 역시 여름의 생기 넘치는 서난궁이 제일이구나.

소년은 하늘로 힘차게 가지를 뻗은 느티나무가 드리운 그늘을 밟으며 지난 계절을 추억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 태감을 따라 서난궁을 방문했던 것도 여름의 일이었다.

소년은 풀을 먹여 버석버석한 환관복을 억지로 입었던 일을 떠올렸고, 잘 가꿔진 내원을 거닐며 감탄했던 일을 떠올렸고, 앞장서서 걸었던 태감의 등을 떠올렸다.

태감의 등을 쫓아 잰걸음으로 걸었던 길 위를, 이젠 앞장서서 걷는다.

소년은 태감이 걸었던 발자취를 그리며 가만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뎌 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이 나이를 먹고 이런 싱숭생숭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등을 보며 걸었던 이의 자리에 오른다는, 명령을 받는 자리에서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오른다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보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마음이 들뜨는.

서른쯤에 처음 느꼈다가 마흔쯤에는 익숙해졌던 그 기묘한 흥분이 다시 찾아온 것을 느끼며 소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젊어지긴 젊어졌구나. 몸이 젊어지니 마음도 젊어졌나 봐.

소년은 고개를 부르르 털고는 손으로 볼을 짝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그리고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며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자, 가자. 난화비님 기다리시겠다.”

소년은 아이들을 끌고 서난궁의 내원에 들어섰다.

햇볕이 가장 그악스러울 때였지만, 서난궁의 하늘에서만큼은 태양도 온화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무더위에 지친 방문자들을 배려하는 사려 깊은 나무들. 그 아래에선 소박한 야생화들이 옹기종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솜털 보송보송한 박주가리에 주근깨 송송 박힌 하늘말나리, 파르스름한 꽃잎 두 장에 흰 꽃잎 한 장이 앙증맞은 달개비꽃.

소년은 종종히 모여앉은 야생화를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무더위에 질린 바람이 풀잎과 가지를 스치는 시원한 소리 사이로, 간간이 잡음이 섞여들었다.

다그닥다그닥.

편자를 박은 말발굽이 대지를 박차는 소리.

그 기운찬 소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귀가 좋은 이삼이었다.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한 지점을 맴도는 것 같아요.”

“그것까지 구분할 수 있니? 역시, 우리 삼이.”

딱 좋을 때 온 모양이다. 좀 서두르면 멋진 광경을 구경할 수 있겠어.

소년은 무릎 언저리를 툭툭 두드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소년이 성큼성큼 걷자 아이들이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소년의 말대로, 아이들은 대단한 장관을 목격했다.

준마에 올라탄 채 여름의 햇살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기수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소년은 기수가 말을 모는 지점 끝에 놓인 타격대를 한번 보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난화비님이 승마를 즐기고 계시는구나.”

날렵한 준마가 모랫바닥을 박찬다.

성난 투레질. 갈기가 멋지게 뻗은 준마에 올라탄 채 한 손으로 고삐를 쥔 난화비는 낭랑한 기합성으로 말을 독려하고 있었다.

목표는 연무장 중앙에 나무로 만들어진 타격대. 소년은 그녀의 고삐를 쥐지 않은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길쭉한 자루에 금속 재질의 짧은 쇠막대를 쇠사슬로 연결한 무기.

편곤이었다.

“무시무시하군.”

말 위에서 휘두르는 편곤이라.

소년이 경탄을 흘리는 순간, 타격대 주위를 맴돌던 말이 크게 뛰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던 편곤이 초승달과 같은 우아한 곡선을 그려내며 휘둘려졌다.

그려낸 선은 아름다웠지만, 결과물은 그러지 못했다.

콰작.

부러지고 으스러지고 박살 나는 소리.

타격대의 머리 부분은 완전히 바스러진 채 톱밥처럼 흩날리며 모랫바닥 위로 떨어졌다.

처참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난화비는 후련하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고는 가벼운 동작으로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편곤의 사슬에 엉키지 않도록 짧게 묶어 두었던 머리를 대충 풀어헤치고 애교 있는 웃음을 지으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편곤을 쥔 채로.

“어머나, 상호님!”

“커흠. 오랜만에 뵙습니다, 난화비님.”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 * *

“우후후,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정. 말. 오. 랜. 만. 에.”

“커흠,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내원에 소박하게 차려진 탁자에 둘러앉아, 소년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난화비는 그런 소년을 보며 서운하다는 듯 물기 어린 목소리로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홍엽비님도 많이 아쉬워하셨어요. 아, 부여비님도…….”

“크흠, 그것이.”

“아, 저희 시녀들도, 오 상호님께 요리를 배우지 못하게 됐다고 참 많이 섭섭해했는데.”

“그…….”

“그리고 저도, 내심 오 상호님이 그리 말도 없이 떠나셔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껏 움츠러든 소년을 지그시 보던 난화비는 이내 까르륵 웃음 짓고는 탁자의 주전자를 들어 소년의 잔에 맑은 차를 가득 채워주었다.

“이젠, 오 상호님이라 할 수도 없겠네요.”

“지금은 부족한 몸이나마 상책(尙冊)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름도 승조란 환관명을 새로 받았으니, 승 상책이라 불러주십시오.”

“어머, 상책이면 종4품이니, 승진하셨네요? 축하드려요!”

예, 어쩌다 보니…….

난화비의 호들갑스러운 축하에 소년은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발갛게 물든 소년을 보며 깔깔 웃던 난화비는 가늘게 숨을 쉬어 허파에 들어찬 웃음기를 빼내고는 말했다.

담담하고, 경직된 어조로.

“정말, 그리 불러도 될까요?”

존귀하신 숙친왕 전하가 아닌, 보잘것없는 환관의 이름으로. 그리 불러도 될까요.

소년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추레하고 볼품없던 시절, 교활한 매부리코 아래로 음산한 웃음을 그리던 시절의 자세로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예. 부디, 그리 불러주십시오.”

“알았어요, 승 상책. 호호, 조금 어색하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는 배시시 웃음 짓고 있는 난화비에게 작은 함을 내밀었다.

옻칠을 해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함. 은으로 학과 소나무 장식을 댄 함은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분명 안에는 값진 것이 들어 있으리라. 보석과도 같은, 아니, 보석보다도 귀한 것.

함의 내용물을 짐작한 난화비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상책, 혹시?”

“빈손으로 오기 민망하여, 약소하나마 차 과자를 좀 준비해 왔습니다.”

“차 과자, 열어봐도 될까요?”

소년은 잠금쇠를 푼 다음 그대로 난화비 쪽으로 함을 밀었다.

가장 가슴 들뜨는 순간을 양보한 것이다.

난화비는 벅차오른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짚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떤 과자가 들어 있을까. 과연 어떤 맛일까.

어떤 것이든, 분명.

“그럼, 열어볼게요.”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함이 열렸다.

그 안쪽으로는 흰 가루가 눈처럼 흩뿌려진 어른 주먹만 한 과자가 아홉 개 놓여 있었다.

노르스름한 색에 울퉁불퉁한 모양새.

튀긴 걸까, 아니면 구운 걸까. 부풀어 있는 걸 보니 속에 무언가가 들어 있을 것 같은데.

달게 조린 팥일까. 으깬 밤이나 연밥일 지도. 아니면 혹시, 크림일까?

소년은 잠깐 뜸을 들이고는 답을 알려주었다.

“슈 아라 크렘(Chou à la crème). 슈크림입니다. 커스터드 크림과 생크림을 반씩 넣었지요.”

“슈크림?”

“슈는 양배추를 뜻하는 말입니다. 울퉁불퉁한 것이, 제법 닮았지요?”

얇고 바삭한 반죽에 묵직하고 달큼한 커스터드 크림과 몽실몽실 가볍고 고소한 생크림을 함께 넣어 만족감을 배로 높였지요.

소년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은 집게를 들어 슈크림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부여비님과 홍엽비님이 오시려면, 조금 걸리겠지요?”

“네, 아마도.”

“그 전에 하나, 맛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지만…….”

자, 여길 보십시오.

소년은 함을 살짝 기울였다.

하나를 집었음에도, 함에는 여전히 여덟 개의 슈가 남아 있었다.

소년은 입꼬리 한쪽을 비죽 올리고는 비열하고 음습한, 그렇기에 더없이 감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한 사람당 두 개씩 먹더라도, 하나가 남지요.”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먼저 먹는 운 좋은 사람이 임자. 아니겠습니까.”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제 성의 표시일 뿐이니까요.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소년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작게 쿡쿡대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난화비님과 저, 둘만 입을 다문다면.”

“모르시……겠지요?”

“그럼요. 아무도 모를 겁니다.”

아무도.

* * *

하얀 도자기 접시 위에 슈크림이 올라온다.

흰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황금빛 과자. 크고, 향기롭고, 먹음직스러운.

소년은 손으로 집어 들고 덥석 베어 물기를 권했다.

“조금 품위 없기는 하지만, 슈크림은 자르지 않고 손으로 들고 드시는 것이 가장 맛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맛보겠습니다.

난화비는 주저 없이 슈크림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생크림과 커스터드 크림. 두 가지 크림의 무게감이 얇디얇은 피를 통해 손끝에 전해졌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무너질 것처럼 보드랍고, 녹아내린 황금을 담아놓은 것처럼 묵직하다.

“계란으로 만든 커스터드 크림은 묵직하고 밀도가 높지요. 저번에 한 번 드셔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단다, 에그타르트라 하는 과자에 들어 있던 소가 그것이죠?”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찬드라 왕국에서 들여온 최상품의 바닐라를 아낌없이 사용했으니, 저번보다 더 향기로울 겁니다. 생크림은 목장에서 새벽에 갓 짠 우유로 만든 신선한 걸 썼으니……. 이런,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드시지요.”

소년은 갈망으로 희번덕거리는 그녀의 눈과 바스러진 타격대를 힐끔 보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배고픈 여자를 앞에 두고 입을 나불거리지 말라.

유언으로 남겨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의 현명함은 보답 받았다.

앙!

난화비는 힘껏 슈를 베어 물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곱게 간 분당의 강렬한 단맛이 훅 밀려옴과 동시에 앞니가 푹 잠겨 들었다.

마치 나비나 잠자리 따위의, 얇은 날개를 씹은 듯한 연약한 바스락 소리가 앞니를 타고 귓가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희고 고운 앞니는 크림의 바닷속으로 한없이 잠겨 들었다.

생크림.

얇은 슈 안에 담뿍 담겨 있는 생크림은 하늘의 정중앙에 두껍게 쌓인 적란운과도 같았다.

뛰어들면 푹신하게 몸을 받쳐줄 것만 같은. 그 구름 같은 크림에는 그윽한 우유 향이 배어 있었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질감, 연한 단맛. 절제되어 있는 단맛 덕분에 유지방의 고소함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하얀 생크림으로 입안이 가득 차올랐을 때쯤, 난화비는 두 번째 층을 발견했다. 묵직하게 흐르는, 근사한 향기를 품은 황금의 크림을.

커스터드.

무더운 열대 지방에서 흐드러지게 피는 흰 꽃의 고상한 향기가 흠뻑 배어든 크림은 매끄럽게 혀를 감싸고는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아, 녹는 것 같아.”

과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은근한 단맛이 혀에 감겨든다.

입안 전체에 그 달큼한 바닐라 향이 배어든다. 뺨 안쪽부터 녹는 듯한 그 향기로움.

들숨과 함께 폐부를 가득 채우고는 날숨과 함께 온몸에 스며드는 아찔한 단내에 난화비는 어깨를 떨었다.

난화비의 입이 멈춰섰을 때쯤, 소년은 서방에서 들여온 작은 티스푼을 난화비에게 건네었다.

티스푼은 은제였으며, 오래전 서방 사절단이 선물하고 간 물건이었다.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맛이 질리셨으면 크림을 안쪽에서 섞어보시지요.”

“생크림과, 커스터드를?”

“예. 그럼 또 다른 맛이 나지요.”

몽실몽실 가벼운 생크림과 무겁고 진한 커스터드가 섞이면, 그 고소한 우유 향과 달큼한 바닐라 향이 하나로 섞인다면.

난화비는 소년에게 티스푼을 받아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네요. 이 천상의 맛을 봐 버렸으니, 한동안은 괴롭겠어요.”

“허허, 죄송합니다.”

“죄송하시면, 앞으로는 조금 자주 찾아와주시겠어요?”

“그것도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난화비는 볼을 부풀리고는 심통이 단단히 났다고 주장하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뾰로통한 눈길 앞에 고개를 숙이며 소년은 거래처에 사정을 이해해달라 부탁하는 영업사원과 같은 태도로 말했다.

“크흠, 이번에 제가 또 먼 길을 떠나게 되어, 서난궁을 자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대신, 저번에 약속드렸던 야시장을 성대하게 여는 것으로 부디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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