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96화 (297/314)

환관의 요리사 296화 특별외전

양력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복무 중 혼인을 할 수 없었던 로마의 군단병들을 위해 몰래 결혼을 성사시켜 주었던 성인 발렌티노의 축일이자 사랑하는 이에게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하는 연인들의 기념일.

“중국에서는 발렌타인데이 대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음력 7월 7일, 칠석절(七夕節)을 연인들의 기념일로 삼지요.”

소년은 간식으로 쪄온 달콤한 찰떡 애와와를 상에 올리며 태감을 바라보았다.

태감은 시큰둥한 얼굴로 소년을 흘깃 보고는 찰떡을 입에 물었다.

“연인들의 기념일이라. 요리사들에게는 고단한 날이겠군.”

“고단한 날이지만, 행복한 날이기도 합니다. 칠석절이든, 발렌타인데이든.”

“왜지?”

“기념일이라는 명목으로 순진한 연인들을 등쳐먹을 수 있으니 좋지요.”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연인들은 사랑으로 가슴이 따뜻해지니 좋고, 저희는 가게 매상이 좋으니 보너스를 받아 지갑이 두툼해져서 좋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대꾸에 태감은 신음하듯 말했다.

“세상에, 연인들의 단란한 시간 마저 폭리를 취할 명분으로 삼다니, 네가 살던 곳은 도대체…….”

현대 지구의 그악스러운 상술에 혀를 내두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실소를 흘렸다.

“이런 걸로 놀라기엔 이릅니다. 발렌타인데이 다음에는 3월 14일 화이트데이가, 화이트데이 다음에는 11월 11일 빼빼로데이가. 아, 중화요릿집은 4월 14일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지요.”

발렌타인데이 선물에 보답하는 기념일, 친구나 연인들끼리 막대과자를 선물하는 기념일, 선물 받지 못한 외로운 이들이 분을 삭이며 짜장면을 먹는 기념일.

온갖 명목으로 소비자들의 지갑을 갈취하는 화려한 상술의 향연에 태감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휴, 듣다 보니 너희 쪽은 참 살기 복잡하겠구나. 우리 쪽은 이런 기념일이 한 번뿐이라 다행이군.”

“태감께서도 오늘 하루만 참으시면 되니 다행이군요.”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발렌타인데이와 칠석절.

제국에도 이와 같은 의미의 기념일이 있었으니, 가을 추수가 끝나고 창틀에는 서리가 내리는 시기. 상강(霜降) 무렵에 있는 정인절(情人节)이 바로 그 날이었다.

“추수한 곡식을 탈곡해 창고에 그득하게 채워놓았으니 마음도 뿌듯하겠다, 손도 비겠다, 국화도 활짝 피고 단풍도 절정에 이를 때이니, 잘 익은 국화주 한 병 싸 들고 나들이 나가기에 딱 좋을 때지요.”

“그래, 좋을 때지. 하늘은 높고 푸르르고, 바람은 선선하니. 도톰하게 입고 산과 들로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야.”

“태감께선 나들이는커녕 정원 산책도 못 나가고 계시지만 말입니다.”

쯧쯧, 소년은 가엽다는 듯 혀를 차고는 찰떡 그릇 옆에 수북하게 쌓인 서신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평소 궁에서 오가는 용사비등 한 필체의 공문서와는 다른, 보기만 해도 달콤 쌉싸름해 진저리가 나는 풋풋 상큼한 연서.

소년은 아기자기한 필체로 한 자 한 자 공들여 적은 글줄을 위아래로 슬쩍 훑어보고는 몸이 오그라들 것 같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우, 못 읽겠다. 간지러워서 원. 이런 걸 어찌 읽으십니까.”

“어쩌겠느냐. 그래도 마음을 담아 써준 걸 텐데. 답신은 못 해줘도 읽어주기는 해야지.”

그게 사람의 도리 아니겠느냐.

태감은 우물거리던 찰떡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네 번째 편지지였다.

소년은 수북하게 쌓이다 못해 상에 다 올리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연서의 산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연서만 보내온 궁녀들은 낫지요.”

세상엔 용기 있는 자가 미인(미녀, 혹은 미남)을 얻는다는 말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꽤 있었고, 그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열다섯에서 열아홉인 경우가 많았다.

소년은 창밖을 내다보고는 겁이 난다는 듯 목을 움츠렸다.

미세하게 연 창의 틈으로는 돌담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굶주린 승냥이들의 빛나는 눈이 엿보였다.

“저 용감한 소녀들을 위해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주시지요.”

“되었다. 그러다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알고.”

자칫 잘못하면 금형부에서 포승줄을 들고 출동할지도 모른다.

태감의 말에 소년은 썩 궁금하다는 투로 질문했다.

“죄목은?”

“그야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지. 황제 폐하께서 거하시는 궁에서 소란을 일으켰으니 불경죄를 붙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도당을 짜고 연좌궁을 포위하고 있으니 공직자 감금죄를 붙여도 되겠군.”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고 있으니 과욕죄를 붙여도 되겠군요. 아니면 지나친 열의로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으니 열정죄 라던가.”

“종합하면 청춘죄 정도는 붙일 수 있겠군.”

청춘이 죄기는 하지요.

소년은 낄낄 웃고는 창을 닫았다.

그러자 유난히 크게 들리는 한숨 소리가 가을바람을 타고 넘어와 창을 두드렸다.

“정말 저리 두셔도 괜찮겠습니까?”

“정인절은 오늘 하루뿐이니, 내일이면 알아서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게다. 애초에 궁 생활이 그렇게 녹록하지도 않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좀 풀어주는 것이지.

태감의 말에 소년은 싱겁게 맞창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평소였다면 저렇게 태감님 얼굴 한번 보겠다고 죽치고 앉아 있지는 못 했겠지요.”

“보여줄 수 있는 얼굴도 반절뿐이지만.”

“거참, 잘생기게 태어나셔서 피곤하시겠습니다그려.”

“그러게나 말이다. 좀 덜 잘생기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하아, 잘생긴 게 죄지.”

죄지으신 김에 옥살이 좀 하고 오셨으면 좋겠는데.

입술을 비죽거리는 소년을 보며 콧방귀를 뀐 후, 다 읽은 편지지를 접던 태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살던 곳에서는 연인들이 초콜릿이라는 단 과자를 교환했다 했지?”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못 만듭니다.”

칼처럼 날카로운 소년의 단답에 태감은 몹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맵시있게 뻗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공들여 세공한 수정처럼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에 가없는 슬픔이 차오른다.

벅차오르는 애통함을 노래하지 못하고 달싹이는 붉은 입술, 옷자락을 꼭 움켜쥔 창백한 손.

온몸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매정한 말을 꺼내놓았다.

“애초에 중화요리사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 것 아닙니까. 제 전공은 중화요리지, 양과자가 아닙니다.”

“그래도…….”

완제품으로 나온 초콜릿이 있으면 그걸 녹여 다른 디저트를 만들 수는 있지만, 카카오 콩을 가공하여 초콜릿으로 만드는 것은 소년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방법을 안다면 시도는 해보았겠지만.

“방법을 모르니, 어쩔 수 없지요.”

“그렇다면 연구를 통해…….”

“그 연구 시간과 예산은 따로 빼주실 겁니까? 한 한 달쯤 주신다면 도전은 해보지요.”

한 달 동안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 드셔도 괜찮으시다면야.

* * *

“단 과자는 뭔 단 과자. 먹어봐야 이만 썩고 혈당이나 오르지. 단 과자 사 먹을 돈이면 좀 보태서 뜨끈하고 기름지고 얼큰한 사천요리 사 먹지.”

땀도 쭉 빠지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몸도 개운해지고, 반주로 칼칼한 백주 한잔 곁들이면 잠도 잘 오지.

초콜릿의 부질없음을 설파하며 소년은 태감의 저녁상을 준비했다.

그날 저녁 태감의 저녁 메뉴로 선택된 것은 한국에선 라조기란 이름으로 유명한 사천요리의 대표, 랄자계(辣子鷄)였다.

“와, 랄자계!”

“허허, 우리 장소, 좋으냐?”

“네!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

소년이 랄자계를 만든다는 소리에 가장 들뜬 것은 맵지 않은 음식을 두려워 한다는 귀주 출신, 장소였다.

한껏 들떠서는 통통 튀는 장소를 보며 소년이 껄껄 웃었다.

“혹시 장소는 랄자계가 어디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인지 아니?”

“사천요리라는 건 알고 있는데…….”

“랄자계는 사천 중에서도 중경의 가락산(歌樂山)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이란다. 그래서 랄자계를 달리 가락산 랄자계라고도 부르지.”

랄자계는 사천 사람들의 자존심과도 같은 요리로 사천 사람들은 다른 음식은 무던히 먹어도 랄자계만큼은 유별나다 싶을 만큼 까탈을 부린단다.

소년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장소와 주방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마른고추를 보며 겁에 질린 이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는 설명을 이었다.

“랄자계는 식재료 선별부터 까다로운데, 닭은 반드시 풀어 키운 토종닭을 즉석에서 잡아 써야 하고, 고추는 일초라 부르는 사천의 전통 고추만을 써야 제맛이 나지.”

최근엔 랄자계 뿐만 아니라 부드럽게 삶은 족발을 버무린 랄자족, 바삭하게 튀긴 새우로 만든 랄자하, 기름이 잘 오른 통통한 생선으로 만든 랄자어, 질깃질깃 고소한 곱창으로 만든 랄자장 등도 인기지만.

“역시 왕도는 닭으로 만드는 랄자계지.”

설명을 마친 소년은 미리 손질해둔 닭을 도마에 올리고는 작게 토막을 치기 시작했다.

기름이 노란 닭을 뼈째로 토막 낸 다음 간장과 술, 생강과 산초, 소금으로 간하여 삼십여 분간 절여준다.

“밑간을 할 땐 소금을 조금 많다 싶게 넣는 것이 좋단다. 튀기고 나면 튀김옷 때문에 뒤늦게 간을 해도 간이 제대로 배이질 않거든.”

고기에 간이 배이는 동안 양념을 준비한다. 생강은 편으로 썰고 파는 실처럼 가늘게 채친다. 그리고 고추는.

“고추는 반으로 가르기만 하면 된단다. 그대로 써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고추의 맛과 향이 충분히 우러나지 않거든.”

소년은 광주리에 수북하게 쌓인 고추를 모조리 반으로 갈라 철과 옆에 두었다.

그 양이 대접 세 개를 채울 정도였는데, 고추에서 올라오는 아릿한 냄새에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그 포악한 향기에 이삼은 뒷걸음질 치며 소년에게 물었다.

“저, 저걸 다 쓰실 거에요?”

“그럼. 자고로 랄자계는 고기 양보다 고추 양이 더 많아야 제맛이 난단다. 고추 속에서 고깃점을 쏙쏙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야 제대로 만든 랄자계라 할 수 있지.”

창백하게 질린 이삼의 얼굴을 뒤로한 채 소년은 본격적으로 랄자계 요리를 시작했다.

우선은 달군 기름에 미리 양념해둔 닭을 노랗게 되도록 튀겨 건지고, 고기를 건진 다음 기름을 따라낸다. 그다음에는.

“철과를 깨끗이 닦은 다음 새 기름을 두르고, 기름이 충분히 달궈지면 우선 대파와 생강을 먼저 튀겨 향을 우려낸 단다.”

“그다음에는요?”

“향이 충분히 우러나면 이제, 고추와 산초를 넣어야지.”

산더미같은 고추와 한 대접이나 되는 산초가 철과 안으로 쏟아진다.

팥이나 콩 따위가 구르는 자르륵 소리와 함께 철과에선 눈과 코를 찌르는 패악적인 향기가 폭발했다.

기름 끓는 소리, 산초가 튀겨지며 철과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소리, 고추가 바삭해지는 소리.

소리와 함께 향기가 요동친다. 춤을 춘다. 코로 들이닥쳐서는 폐부를 달군다.

지옥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향기, 그 향기야말로 근사한 랄자계가 완성되리란 보증수표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웃었다. 철과를 흔들고 국자를 뒤집으며, 애욕과 번민을 떨쳐내고 고통과 마주한 수라의 웃음을 그렸다.

“단 과자 먹어봤자 뭐하겠나. 배가 차기를 하나, 몸에 좋기를 하나, 괜히 찝찝하게 갈증이나 나지.”

단과자 먹고 사랑놀음 할 바에야, 뜨끈하고 얼얼한 사천요리나 배부르게 먹고 발 뻗고 자는 게 낫지. 안 그렇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태감이 답했다.

“그래, 칼칼한 랄자계 한 접시 배부르게 먹는 게 낫지.”

태감은 상에 오른 넓적한 접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지옥이 실존한다는 증거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죄인의 몸뚱어리를 찌르기만을 기다리는 창날과 같은 시뻘건 고추와 심지에 불이 붙기만을 기다리는 폭탄과도 같은 산초 알갱이.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닭고기.

태감은 조심스럽게, 마치 잠자는 사자의 옆을 지나듯 살금살금 고기를 집어 들었다.

“먹으면, 분명 내일을 장담할 수 없을 테지.”

“하지만 눈앞의 랄자계를 먹지 못했는데, 찾아올 내일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네 말이 옳다. 랄자계를 먹지 않고 내일을 보느니, 차라리 랄자계를 먹고 오늘 죽겠다.”

죽기 좋은 날이다.

태감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는 전투적으로 식사에 돌입했다.

닭고기는 거의 양념이 묻어 있지 않은 듯, 노르스름한 색으로 익어 있었다.

하지만 그 밍숭맹숭해 보이는 닭고기를 입에 넣는 순간, 태감은 혓바닥을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폭발적인 자극을 느꼈다.

머리털이 쭈뼛 솟아오르고 굵은 땀방울이 주르륵 등허리를 흘러내리는,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리는 그 느낌.

마치 메말라 있었던 몸속 깊은 곳의 샘에 단비가 내리는 듯한, 진액이 끓어오르는 그 쾌감.

후끈 달아오른 태감의 얼굴을 보며 소년이 낄낄거렸다.

“정인절이니 발렌타인이니 칠석절이니, 다 부질없지요?”

얼큰한 거나 먹고 잡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