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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95화 (296/314)

환관의 요리사 295화 외전 83화

“부탁이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오늘 이 술 선물은, 취임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었던 셈이군.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위정을 보며 소년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항아리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뚜껑을 열자마자 항아리 안쪽에 고여 있었던 청아한 향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보드랍고 단 연분홍빛의 꽃잎. 겨울철 언 땅 비집고 고개 내민 연두색 새순이 파릇파릇한 녹색으로 물드는, 무르익은 봄날의 꽃.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사월의 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흰 나비처럼 살그머니 날아온 술 향기.

엄숙한 얼굴로 소년의 변명을 기다리고 있었던 위정은 그 감미로운 향기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이 향기는, 복숭아 꽃. 복숭아 꽃이로구나.”

“예, 봄날에 만개한 복숭아꽃으로 담근 도화주(桃花酒)입니다. 제가 태감께 처음 거두어졌을 때, 그때 담근 술이지요.”

원래는 봄에 담가 초여름에 마시는 술인데, 일 년이나 묵어서 그런지 향이 아주 짙군요. 제대로 익었습니다그려.

소년은 술 석 잔이나 담길까 싶은 작은 조롱박 바가지로 술을 퍼 올렸다.

바가지에 맑고 투명한 담홍색의 술이 찰랑거린다. 잔물결이 일 때마다 넘실거리는 복사꽃 향기.

바위 같은 심장을 흐물흐물 녹게 하는 그 달착지근한 향기에 위정의 근엄한 입가 또한 사르르 녹아내렸다.

“도화주, 도화주라.”

“만들기 까다롭고 익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한번 맛을 보면 그 맛이 일품인지라, 청주의 왕이라는 죽엽주를 내주어도 성에 차지 않고 황주 중 최고라는 여아홍(女兒紅)을 내주어도 도리질 치게 된다지요.”

한 모금 마시면 그 향기가 입에 남아 열흘을 가는데, 다른 술로 그 향을 덧칠할 수가 없어 다른 술은 마시질 못하여 결국 술을 끊게 되었단 사람도 있지요.

소년은 도화주에 얽힌 뜬소문을 주절거리며 가져온 작은 술독에 도화주를 옮겨 담았다.

한 바가지, 두 바가지. 폭포 떨어지듯 시원한 소리와 함께 술독에 도화주가 차오르는 것을 보며 위정은 목구멍 안쪽부터 모래알처럼 푸석하게 메마르는 갈증을 느꼈다.

“만들기 까다롭단 말이지?”

“예. 도화주는 예로부터 물이 적게 들어갈수록 맛이 좋다 하여, 밑술을 만들 때 멥쌀과 물의 양을 동량을 씁니다. 그러니 밑술 잡기가 고되지요.”

좋은 멥쌀을 두 말 하고도 닷 되를 준비하여 여러 번 흐르는 물에 씻은 다음 빻아 가루를 만들고, 쌀과 동량의 물을 솥에 데운 다음 물이 따뜻해지면 그때 쌀가루를 넣고 개어 되직한 죽을 쑨다.

“이때 물은 강 한가운데에서 길어온 물이나 바위틈에 고인 물을 써야 하지요. 그리고 죽이 다 되면 차게 식힌 다음 누룩과 밀가루를 한 되씩 넣어 버무려 발효시키지요. 이때 술독은 찬 곳에 두고 이불로 싸매어 천천히 발효되게 두어야 술이 시큼해지지 않지요.”

“허어, 무척 공이 많이 드는구나.”

“예, 하지만 술을 마셔 보면 공들인 값을 하지요.”

밑술이 완성되면 이제 멥쌀과 찹쌀을 석 되씩 씻어 고두밥을 지어 식힌 다음 밑술과 섞는데, 이때 팔팔 끓여 식힌 물을 석 되 넣는다.

“깨끗하게 씻어 꽃받침을 제거한 복숭아꽃과 가지를 넣어 술을 빚으면 됩니다. 이때 들어가는 꽃은 색이 붉은 홍도화(紅桃花)나 색이 흰 백도화(白桃花), 어느 쪽을 써도 좋은데, 계곡이나 들녘에서 피는 개복숭아 꽃을 따다 쓰면 향이 더욱 좋지요.”

이 술도 역시 경사 인근의 계곡에서 따온 개복숭아 꽃으로 담근 겁니다.

소년은 술독이 삼분지 이쯤 되게 차오르자 바가지를 입에 물고는 가져온 성긴 천을 술독에 씌워 삼베로 단단히 동여매었다.

“이 좋은 술을, 설명만 듣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크흠, 근무시간이다.”

“예, 근무시간이지요.”

나으리처럼 대쪽같이 강직하신 분이, 근무시간에 음주를 즐기실 리가 없지요. 하지만.

소년은 입꼬리를 길게 찢는 음산한 웃음을 짓고는 꿀처럼 달고 향긋한 제안을 꺼내놓았다.

“그러고 보니, 슬슬 점심을 드실 때로군요.”

“그래, 점심시간이로구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으니, 나으리께 점심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점심 반주도 한 잔 곁들여서.

* * *

술이 좋다면 안주는 바싹 말린 딱딱한 육포 한 조각이면 족하리. 육포가 없다면 비들비들 말려 살짝 구운 어포여도 좋으리라.

노릇하게 볶은 땅콩 한 줌이어도 좋고, 시큼한 말린 매실 한 줌이어도 좋다만. 정 사정 여의치 않다면 종지에 간장만 담아주셔도 좋소.

젓가락으로 콕 찍어 혀에 짠기만 축이면 술이 이리 단데, 기름진 안주가 무슨 소용인가.

“좋은 술이라면 번잡하게 안주를 늘어놓고 마실 필요가 없지. 쓰고 독한 싸구려 백주나 시큼하게 쉰 탁주를 마신다면 모를까, 좋은 술은 깔끔하고 부드러우니 기름지고 맛이 센 안주는 되려 술맛을 해치기 십상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주당이며 애주가 답게, 위정은 술을 대하는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좋은 술이라면 마른안주 한 줌, 혹은 맑은 물 한잔에 소금 약간만 있다면 좋다.

위정의 지론을 들으며 소년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고는 말했다.

“예, 그렇지요. 술을 마시기에는 마른안주가 제격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식사시간 아닙니까.”

“크흠, 그렇지. 내 술 향기에 취해 잠시 눈이 흐려졌던 모양이다. 그래, 지금은 식사시간이지.”

“든든히 배를 채우셔야 오후 업무를 보시지요. 관리는 밥심 아닙니까.”

소년은 작게 키득거리고는 도마 위로 두툼한 고깃덩어리를 올렸다.

기름기 한점 없는 선홍빛의 살코기. 육색이 짙고 결이 거친 그 살코기는 틀림없이 소의 양지머리였다

“이걸로 냉흘우육(冷吃牛肉)을 만들 생각입니다. 냉흘우육은 밥반찬으로도 좋고, 술안주로도 좋으니 반주를 곁들인 점심상에 올리기에 딱 좋은 요리지요.”

“냉흘우육이라.”

소년은 가장 먼저 큼직한 양지머리를 길쭉하게 세 등분한 다음 끓지 않은 찬물에 그대로 넣어 고기를 삶기 시작했다.

“국물을 낼 생각이냐? 양지머리가 국물 내기에 좋은 식재료기는 하지.”

“아니요, 냉흘우육은 국물 요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따진다면 볶음에 가깝지요?”

“볶음이라? 고기를 살짝 데쳐내기 위해서라면 맛이 빠지지 않도록 끓는 물에 넣어야 하지 않느냐. 찬물에서 삶으면 맛이 다 빠져 고기가 뻣뻣해질 텐데?”

“그렇지요. 뻣뻣하고 딱딱한 것이, 꼭 말라 비틀어진 삭정이처럼 되지요.”

그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소년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위정에게 뜻 모를 모호한 답만을 안겨주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솥에 시선을 집중했다.

“물이 끓어오르고 고기에서 배어 나온 핏물이 엉겨 떠오르면, 우선 고기를 건진 다음 물을 버리고, 이번엔 뜨겁게 데운 물을 넣어 다시 고기를 삶습니다. 이때 통산초와 껍질 채 썬 생강편, 파 한 대, 월계수 잎과 팔각, 정향, 계피 등의 향신료를 넣고 충분히 삶아준 다음.”

고기를 건져 작은 막대 모양으로 가늘게 썰어주고, 그것을 달군 유채씨기름에 바삭해지도록 튀겨주지요.

“이렇게 하면 고기가 버석버석해지고 식감도 단단해 지지요. 고기가 짙은 갈색으로 튀겨지면 이제 바늘처럼 가늘게 썬 마른 고추와 굵게 빻은 산초 등을 넣고 기름에 고추의 색과 산초의 향이 우러나도록 튀겨주다가,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기름에서 건지면 냉흘우육 완성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냉흘우육 한 접시와 수북한 쌀밥, 그리고 반주로 곁들일 도화주 한 동이.

소박하게 차려진 상에 위정과 아이들, 그리고 소년이 둘러앉았다.

“흐음, 이것이 네가 추천하는 반주에 어울리는 점심 요리란 말이지.”

위정은 그리 탐탁지 않다는 듯 시큰둥한 눈으로 차려진 냉흘우육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냉흘우육은 식욕을 불러일으킨다, 먹음직스럽다,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돈다는 찬사를 받을 만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고기는 척 보기에도 버석버석하고 딱딱해 보이는 것이 육즙이라고는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고 기름에 튀겨진 고추는 빨갛게 달군 바늘처럼 위협적이었다.

“이렇게 맛이 강해 보이는 음식이 과연, 이 섬세한 도화주에 어울릴지.”

“제가 자신 있게 추천해 드리는 조합입니다. 한번 드셔보시지요.”

요리 먼저 드셔보시지요.

소년의 거듭된 권유에 위정은 못 이기는 척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집었다. 그리고는.

“이거, 의외로…….”

“맛이 썩 괜찮지요?”

거 보십쇼. 맛있다니까.

소년은 놀라움으로 경직된 위정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킬킬거렸다.

버석거리는 고깃점을 공들여 씹어 삼킨 후, 위정은 더운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놀랍구나, 뻣뻣하고 질기기만 할 줄 알았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고기의 구수한 단맛이 솟아 나와.”

“국물을 우려낼 때처럼 오래도록 익힌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겉 부분은 메마르지만, 속에는 고소한 즙이 농축되어 있지요.”

“그렇군. 그래서 이렇게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감칠맛이 샘솟는 거로군.”

그뿐만이 아니지요.

소년은 고깃점 사이로 고개를 내민 뾰쪽한 고추와 굵은 산초 알갱이들을 가리켰다.

“슬슬, 혀가 후끈 달아오르셨을 테지요. 고추의 알싸함과 산초의 얼얼함으로 민감해진 혀를.”

다디단 도화주로 축여보시지요.

소년은 봉해두었던 술독을 열어 투박한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잔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담홍색의 액체.

찰랑거리며 향기를 뿜어내는 그 그윽한 액체를, 위정은 조심스럽게 입에 머금었다.

한 모금.

서늘한 액체가 메마른 입술을 타고 넘는다.

적신다. 가득 채운다. 흘러넘친다.

고추와 산초의 매운맛으로 한껏 날이 선 혀 위로, 봄날의 따스함이 젖어 든다.

춘풍에 흩날리는 발그스름한 꽃잎이 넘실거리며 날아들어 품 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보드랍고 달콤한 향기.

희고 붉은 꽃송이들을 한껏 끌어모아 따뜻한 물에 띄우고, 그 향이 우러난 물로 세안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위정은 오래간만에 맛보는 흥분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느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춘삼월의 훈훈한 바람 만큼이나 풋풋하고 서툰 흥분.

아마 열일곱, 혹은 열여덟쯔음이었을 것이다. 위정은 열아홉, 스물의 계단을 오르며 가슴에 묻어둔 채 잊어버렸던 것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봄날의 도화주.

그것은 기이하고 야릇한 요술과도 같았다.

오늘 밤, 퇴청할 때 이 도화주 한 동이를 싸 들고 가리라. 낮에 즐기는 복사꽃도 좋지만, 휘영청 밝은 달 아래서 즐기는 것만 하랴.

밝은 달 아래서. 이왕이면 좋은 사람과, 그저 함께 늙어가고만 싶은 사람과 함께 한다면.

위정은 희끗하게 웃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고추와 고기를 한 움큼 집어 수북하게 뜬 쌀밥과 함께 입에 욱여넣고 있었다.

“좋구나. 참으로 달아. 술이 참 달아.”

그러니, 무언가 보답을 해주고 싶구나.

위정을 보며 소년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는 다급한 동작으로 자신의 목을 두드렸다.

소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본 위정은 다급한 동작으로 물 주전자를 소년에게 건네었다.

잠시 후, 주전자 주둥이와의 격렬한 입맞춤을 마치고 숨을 몰아쉬는 소년을 보며 위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때가 좀 안 좋았구나.”

“예, 좀 안 좋았습니다.”

“괜찮으냐.”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소년은 몇 차례 기침을 하고는 숨을 고른 후, 위정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의 인사이며, 동시에 사죄의 뜻이기도 했다.

그 뜻을 짐작한 위정은 담담한 얼굴로 술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태감께서 자리를 비우시고, 후궁에 한동안 쥐가 들끓었지.”

“덕분에, 돌아오자마자 쥐 잡으랴, 곳간 단속하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그것은 후궁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의 말도, 질책의 말도 아니었다.

그저 그러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위정은 사례 태감이었다. 휘두를 수 있는 권한 또한 사례감의 권한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서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렇다 들었다.”

“태감께서 동창 제독직에 복직하시자마자 곳간을 단속하기는 했지만.”

“서방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할 터이니, 오래도록 경사를 비우셔야 할 테지.”

그러면 또 곳간에 쥐가 들끓을 테고.

위정의 말에 소년은 늘어지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호시탐탐 곳간을 노리는 것들이 있으니, 고양이가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울 수가 없지요. 그러니.

“부디, 동창 제독 대리직을 맡아주십시오. 나으리.”

“동창 제독. 대리라.”

보수는 없으나 책임은 막중한, 참으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자리다만.

위정은 입안에 머금었던 도화주를 삼키고는 끌끌 웃으며 말했다.

“받은 것이 크다 보니,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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