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94화 외전 82화
연꽃이 내려앉은 궁. 소년은 연좌궁의 야트막한 돌담 아래를 걷고 있었다.
익숙한 돌담이었다.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보수가 잘 된 돌담.
소년은 혹여나 그가 떠난 사이 갈라진 곳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없던 개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는지 주의 깊게 살피며 돌담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근면한 후궁의 환관들은 작은 틈 하나도 놓치지 않고 회반죽과 자갈로 빈틈없이 막아두었다.
비록 환관들의 태만함과 부주의함을 나무랄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소년은 담벼락의 그늘이 드리운 한구석에서 여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돌담 아래에는 별꽃풀이 수수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흰 꽃잎에는 점점이 자주색 반점이 흩뿌려져 있다. 그런 꽃잎이 연두색 꽃받침 위에 다섯 장 모여 있었다.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화려한 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발견하면 기분이 좋은, 소박한 야생화.
허리를 숙여 별꽃풀을 굽어보던 소년은 머리 위로 드리운 긴 그림자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별꽃풀이 일찍 핀 걸 보니, 여름 더위가 한풀 꺾였나 봅니다. 원래 여름 끝물에나 피는 꽃인데.”
화답의 말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바위처럼 묵직하고, 칼집에 넣어둔 칼처럼 절제되어 있는. 진중한 사내의 목소리.
“이번 칠성제는 덜 고되겠구나. 저번엔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려, 가는 길이 고달팠지.”
“그러고 보니, 벌써 칠성제를 치를 때군요.”
소년은 허리를 툭툭치고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체격이 좋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연꽃은 좀 어떻습니까?”
“아직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왕부의 정원은 어떠냐.”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더군요.”
제초하느라 고생 좀 했지요.
소년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중년인을 향해 작게 고개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위정 나으리.”
아니면, 사례 태감이라 불러드릴까요?
농담조로 건네진 소년의 인사에 위정은 누름돌처럼 묵직한 입가에 실처럼 가느다란 웃음을 띄웠다.
“숙친왕 전하 대접을 받고 싶다면.”
“나으리라 부르는 것이 서로 편하겠지요?”
소년은 낮게 낄낄거리고는 반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어미 닭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소년의 뒤에 서 있던 장소와 이삼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위정은 그다운, 건조한 어조로 아이들의 무탈함을 기뻐했다.
“그래, 잘 모셨느냐?.”
“네!”
“그럼 되었다.”
참으로 그다운 간결한 칭찬에 소년은 숨넘어가듯이 끅끅거리며 웃었다.
위정은 힘있게 뻗은 눈썹을 한번 꿈틀대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돌담을 손으로 짚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태감께서 안부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벌여놓은 일은 많은데, 수습을 못 하고 내려와 마음이 좋지 않다고…….”
“그래…….”
위정은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짧게 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비록 투미한 재주뿐이라 이뤄놓으신 것에 빛나는 것을 더하지는 못하겠지만, 더럽히거나 무너뜨리는 일은 없을 거라 전해다오.”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이냐? 그저 안부 인사만을 전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커흠, 섭섭한 말씀이십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소년은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주위에 감시의 눈, 엿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위정에게 속삭이듯 용건을 꺼내놓았다.
“그 혹시, 후궁에서 무언가, 사건이 있지는 않았는지 하여…….”
“아아, 자리를 비운 사이, 비분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걱정되어 확인하러 온 것이냐.”
“예, 뭐. 그것도 있고…….”
아무튼, 무슨 일 있었습니까?
머뭇거리는 소년을 보며 수염을 쓰다듬던 위정은 뭐라 콕 찍어 대답하기 어렵다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년의 상상력을 불길한 방향으로 한없이 비약시키는, 끔찍한 한마디였다.
“사건이라 할 것이, 있기는 했지.”
“있었습니까?”
“사건이라 할지, 사건이 될 불씨라 할지. 부여비님께서……. 아니, 네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다. 사람을 보낼 터이니 늦어도 오후 중으로는 답이 올 게다.”
소년은 긴장, 혹은 체념의 의미로 마른침을 삼키고는 희끄무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 됐군요. 연좌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해야 할 일?”
예, 아마 보시면 알 겁니다.
뜻 모를 모호한 말을 남긴 채, 소년은 제집 들어가듯 성큼 걸음으로 연좌궁의 대문을 넘어 들어갔다.
청록색 짙푸른 연잎과 연분홍빛 탐스러운 연꽃이 반짝이는 연못과 운치 있는 정자가 있는 내원을 가로질러 소년이 향한 곳은 연좌궁의 주방이었다.
절뚝거리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낮게 깎은 문턱을 넘어서며, 소년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주방의 풍경은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했다. 금방이라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줄줄이 말할 수 있을 만큼.
“이것 참,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감회가 새로우냐?”
신발 밑창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자신의 손때가 묻은 공간.
소년은 곳곳에 남아 있는 고단했던 시간을 스치며 잠시 멈춰 섰다.
좋은 추억이라 하지는 못하겠지만, 즐거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입술을 달싹이던 소년은 이내 쓰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떠나기 전에는 지긋지긋했는데, 막상 돌아오니 그립습니다그려.”
소년은 오래 멈춰서 있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입가에서 씁쓸한 웃음을 털어낸 후, 소년은 쾌활함마저 느껴지는 성큼 걸음으로 주방의 옆에 딸린 창고에 들어섰다.
쌀가루와 밀가루 포대 등의 가루류와 콩, 조, 수수 등의 잡곡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문틈으로 들이친 은근한 햇살 속으로 부연 먼지 알갱이가 반짝였다.
소년을 따라 창고에 들어선 위정은 짧게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여긴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냐.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의아하다는 듯 물어오는 위정에게 소년은 대답했다. 말이 아닌, 발 구름으로.
소년의 왼발이 바닥을 밟자 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위정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 창고에는 지하실이 있었지. 굳이 쓸 일이 없어 폐쇄 중이었지만.”
“예. 제가 발견해서, 요긴하게 써먹었지요. 아, 물론 태감께 용도변경 신청을 내서, 확인받고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용도지?”
“그야 물론.”
술 창고지요.
* * *
녹슨 사다리를 타고 내려서자 긴 시간 고여 있었던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어두침침하고, 서늘하고, 먼지로 가득한. 그곳은 틀림없이 주당의 낙원이었다.
사다리를 밟고 내려서 등잔불을 치켜든 순간 위정은 벅차오르는 감탄을 참지 못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이런, 세상에. 지하에 이런 공간을 꾸렸을 줄이야.”
“태감님께 허락받은 후 야금야금 혼자 꾸렸지요. 멋지지요?”
“근사하구나. 참으로, 참으로 근사해.”
네가 지금껏 어디서 술을 빚나 궁금했는데, 바로 이곳이었구나.
위정은 수염 끝자락이 휘날리도록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지하 창고를 구경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 사다리 바로 옆부터 등잔의 불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창고의 구석까지.
모든 곳에 빈틈없이 술 항아리가 가득 늘어서 있었다.
“그래, 술을 빚는다면 응당 술을 숙성시키는 항아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간 지상의 술 창고를 드나들 때마다 그 점이 의문이었다. 지상의 창고에는 이미 완성된 술을 담은 술병은 있어도 술이 익는 항아리는 없었으니.”
“허허,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셨나 봅니다. 얼마나 드셨습니까?”
“반쯤 남았다.”
어디 보자, 떠나오면서 몇 병 챙겨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 병이 넘게 남아 있었을 텐데…….
소년의 뜨뜻미지근한 시선에 위정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크흠, 아무튼. 그간 이곳에서 술을 빚어온 것이냐?”
“예. 지하 창고라 그런지 이곳이 습도와 온도가 일정하여, 술을 익히기에는 딱 좋더군요.”
어디 보자. 요건 분명.
소년은 작은 바가지를 품에서 꺼낸 다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항아리를 열어 한 바가지 퍼 올렸다.
잘 익은 밤의 속살, 혹은 치자를 연상시키는 그윽한 노오란 색의 술에선 달착지근하면서도 시원한 향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감미로운 술 향과 함께 위정의 과묵한 목울대가 크게 움찔거렸다.
“캬아, 맛이 아주 제대로 들었군요.”
“그건 도대체 무슨 술이냐? 향이 달큼하면서도 시원한 것이. 꿀로 빚은 밀주 같으면서도 솔잎으로 빚은 솔송주 같기도 한데.”
“둘 다 맞습니다. 이게 바로 밤꿀로 빚은 밑술에 솔잎과 송순을 넣어 담근 율밀송주(栗蜜松酒)입니다. 여기, 향기 한번 맡아 보시지요.”
꿀 중에서도 밤꿀, 그것도 밤이 실하고 맛좋기로 유명한 산서성의 밤꿀로만 빚은 밀주에 어린 솔잎과 송순으로 향을 우려내어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몸에도 좋은 약술입니다.
첫맛은 꿀처럼 단데 입에 머금고 있으면 밤의 구수한 맛이 올라와 입안을 푸근하게 해주고, 꿀꺽 넘기고 나면 목구멍이 싸 한데 내쉬는 날숨에 시원한 솔잎 향이 올라와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지요.
소년의 은근한 설명에 위정은 참기 어렵다는 듯 목에 핏대를 한껏 세우며 말했다.
“그것참, 말만 들어도 벌써부터 침이 고이는구나.”
“식사 반주로 즐기기보다는 식후, 입안을 정돈하기에 좋은 술이지요. 아니면 달을 벗 삼아 마시기에도 좋은 술입니다.”
“달이 밝은 밤, 풍류를 즐기기에 좋은 술이라.”
“이 율밀송주도 좋지만, 이 술도 좋습니다.”
소년이 이번에 가리킨 것은 특이하게도 땅에 묻은 항아리였다.
다른 항아리와는 달리 뚜껑만을 내밀고 있는 항아리를 본 위정이 기이하다는 듯 소년을 향해 물었다.
“채소를 삭히거나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어찌하여 항아리를 땅에 묻은 것이냐?”
“여기 아래 땅을 파보니, 흙이 황토더군요. 아시겠지만 흙 중 으뜸으로 치는 흙이 바로 황토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흙으로는 황토가 으뜸이요, 그다음으로는 붉은 적토가 좋으며, 그다음이 건조하고 푸석한 백토지.”
“예, 그런데 제가 보니 이 지하실 밑의 흙은 황토 중에서도 지기가 좋고 맛이 달더군요. 오래 묵어서 그런지, 아니면 황제 폐하께서 거하시는 곳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이런 좋은 흙이 있는 곳에는 쌀로 빚은 맑은 술을 묻어 토납주(土納酒)를 만들어야지요.
소년은 새로운 바가지로 술을 가득 퍼 올려 위정에게 내밀었다.
작은 조롱박 바가지에는 맑은 호박색 술이 가득 차 있었다.
“쌀로만 빚은 맑은 술임에도 색이 그윽하지요? 숙성시키며 땅의 기운을 받아들여 그렇습니다.”
“허어, 땅의 기운을 받은 술이라. 분명 약주겠구나.”
“예, 약주지요. 무릎과 허리의 통증에 좋고 비장에 찬 열을 내리는 효과도 있으며 간을 튼튼하게 하지요. 하지만 효능뿐만 아니라 맛도 좋습니다. 순 쌀로만 빚어 맛이 깨끗하고 단데, 마시고 나면 구수한 맛이 입안에 오래 남고, 뱃속이 훈훈해지지요.”
날이 추울 때 마시면 몸을 데워주고, 날이 더울 때 마시면 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지요.
소년의 말에 위정은 그 근엄한 얼굴에 한껏 놀라움을 드러내었다.
“참으로 좋은 술이구나. 한 모금 맛이라도 보고 싶은데.”
“커흠. 근무시간입니다, 나으리.”
“그래, 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술들을 가져가려 온 것이냐?”
“또다시 절 섭섭하게 하시는군요. 나으리. 절 그렇게 쩨쩨하고 쪼잔한 놈으로 보셨습니까?”
소년이 짐짓 서운하다는 듯 볼을 부풀리고 토라진 표정을 짓자 위정은 입가에 한껏 차오르려는 웃음을 참으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네가 그런 옹졸한 자는 아니지. 그러면 이것들은.”
“조금 늦었습니다만, 사례 태감 취임 축하 선물입니다. 나으리.”
창고를 가득 채우는, 수십 개의 술 항아리. 술꾼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또 무엇이 있을까.
세상살이에 닳고 닳은 그의 노회한 눈동자에 샛별 같은 흥분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소년은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이것은 차조로 빚은 술, 이것은 자두가 한창 맛이 좋을 때 술을 담가 증류한 자두술,
이건 포도와 꿀로 빚은 술, 이건 해열에 좋은 용담으로 빚은 술, 이건 박하와 산딸기로 빚은 술.
수십 가지 술 이름과 그 내력이 줄줄이 읊어질 때마다 위정의 근엄한 얼굴에는 그 고상한 수염으로도 숨길 수 없는 행복감이 어렸다.
“하루에 하나씩만 맛을 보아도, 한 바퀴를 도는 데 족히 두 달은 걸리겠는걸.”
“이 정도면 십 년은 족히 드실 겁니다. 아, 술이 어느 정도 익었으면 체에 거른 다음 병입해 주셔야 합니다. 거르지 않고 오래 두면 술이 탁해져서…….”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걱정 말거라.”
어떤 술을 먼저 맛볼까. 오늘 밤은 어떤 술과 함께 지새울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민에 잠겨 있는 위정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소년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고말고. 세상에 어느 누가 이런 선물을 마다하겠느냐?”
“그러면 말입니다. 큼, 크흠.”
혹시 괜찮으시다면, 작은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